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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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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형 간염 백신을 개발한 간질환 연구의 선구자

‘해파박스-B’ 개발로 한국 B형 간염 퇴치에 이바지
세계 최초로 C형간염 바이러스 혈청 분리 성공

 

B형 간염 백신을 개발한 간질환 연구의 선구자
故김정룡
‘해파박스-B’ 개발로 한국 B형 간염 퇴치에 이바지
세계 최초로 C형간염 바이러스 혈청 분리 성공 학력
1959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1961 서울대학교 대학원 내과학 의학석사
1966 서울대학교 대학원 내과학 의학박사

경력
1971~2000 서울대학교 교수
1988~1992 아시아태평양소화기병학회 회장
1996~1997 대한내과학회 회장
2005 대한민국학술원 자연 제4분과 회원

포상
1983 대한민국과학상
1984 국민훈장 모란장
1995 호암상
2011 국민훈장 무궁화장 “대한민국 첫 간염백신, 그건 기적이었다.”

1983년 6월 23일, 김정룡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와 녹십자 연구진은 순수 국내 기술과 시설로 만들어진 국내 최초 B형 간염백신 ‘헤파박스-B’를 들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B형간염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는 소식은 세계 제약업계를 들썩이게 했다. 무려 미국 제약회사 MSD(머크)와 프랑스 파스퇴르에 이은 세계 3번째 기적이었다. 대한민국 1호 간염백신은 김정룡 교수의 10년 집념이 만들어낸 쾌거였다. 헤파박스B의 개발로 국민들의 건강을 지킬 수 있었던 우리나라는 ‘간염왕국’이란 오명도 씻어낼 수 있었다.
B형 간염 바이러스 연구와 예방백신 개발 연구를 통해 한국 B형간염 유병률을 통제하고, 국민 보건에 큰 기여를 한 김정룡 교수. 정년 후에도 젊은 의사들 못지않게 환자 치료와 연구에 전념했던 그의 열정으로 한국 의료계는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김정룡 교수는 함경남도 삼수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광복을 맞았고, 3년 후인 1948년 남하해 큰고모부가 있던 목포에 터를 잡고 살게 됐다. 목포고를 2회로 졸업한 그는 진로를 일찌감치 정해두고 있었다. 여덟 형제 중 일곱이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의사가 되어 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을 치료하며 인생을 살고 싶었다. 그는 1953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의예과에 진학했고, 1959년 3월 의대를 차석으로 졸업하며 꿈을 이루게 된다. 동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간담도 질환에 있어서의 혈청단백여지전기영동분획상에 관한 연구”로 1961년 석사학위를, “혈청단백분획상에 관한 연구”로 1966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유학의 기회를 얻어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보스턴시립병원으로 연수를 떠났다. 그가 간염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은 그곳에서 만난 찰스 데이비슨(Charles S. Davidson) 교수의 권유 때문이었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보다 연구 환경이 좋은 미국에서의 연구를 통해 항원을 함유하고 있는 혈청의 처리 방법을 숙련했다. 그 결과 김 교수는 우리나라 간질환이 B형간염 바이러스와 깊은 관계가 있으며 B형간염 바이러스의 가장 중요한 감염 경로가 모자(母子) 감염임을 규명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B형간염 바이러스를 사람 혈청에서 최초로 분리해낸 그는 1970년 11월 혈청성 간염 바이러스에 관한 정체를 규명하는 논문을 국제학회에 발표하며 세계 의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성과는 한국에게 희소식이었다. 1970년대 간염 유병률이 12%에 육박하며 ‘간염왕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치료법 자체가 없었던 B형 간염은 간경화로, 또 간암으로 진행됐다. B형 간염을 20년 앓으면 그중 절반이 간경화가 된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였다. 우리나라는 유난히 B형 간염 환자가 많았는데, 이들 대부분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수직 감염자’에 해당됐다. 10대 양성률이 높았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B형 간염은 바이러스가 5세 이전에 침입해 잠복해 있다가 대부분 성인이 된 후 발병하기 때문에 영아 때 백신을 접종하는 게 최선의 예방법이었다. 이에 김 교수는 자신이 개발한 백신 물질의 상용화를 추진했다. 녹십자와 계약을 맺은 그는 부단한 연구 끝에 1977년 B형 간염 예방 백신을 실험실 수준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정부의 생산 허가를 얻지 못해 제품으로 만드는 데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그러던 중 미국과 프랑스에서 B형간염 백신이 생산됐고,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로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싼 값에 백신을 수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에 보건사회부는 미국과 프랑스 백신 요약서를 기준으로 김 교수의 백신을 허가했고, 그 결과 1983년 6월 세계에서 세 번째로 B형간염 예방백신인 ‘헤파박스-B’가 생산될 수 있었다. 헤파박스-B는 수입 백신보다 가격이 10분의 1이었지만 효과는 더 뛰어났다. 경쟁력 있는 백신의 국내 개발에 힘입어 정부는 중장기 간염 퇴치계획을 시행했고, 그 결과 1980년대 중반부터 학령기 아동과 일반인, 신생아 예방접종에 간염 백신이 추가될 수 있었다. 백신의 접종으로 B형 간염 유병률이 획기적으로 감소되면서 마침내 간염왕국이라는 오명도 씻어낼 수 있었다. 이후 헤파박스-B는 1988년 유전자재조합 2세대 백신인 ‘헤파박스-진’으로 바뀌었고, 60여 개국으로 수출되며 지구촌 B형 간염 퇴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 교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백신 개발을 통해 얻은 수익금 32억 원과 각종 기부금, 사비를 더해 1984년 한국간연구재단을, 1986년엔 모교인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간연구소를 설립했다. 또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과학교실의 우수 연구 지원비 기탁을 통해 후배 연구자들의 연구 환경 개선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전보다 나아진 환경에서 그는 후배들보다 더 연구와 치료에 몰두했다 그는 C형간염 연구에서도 우수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C형간염 연구에서도 우수한 성과를 거두었다. 1999년 세계 최초로 C형간염 바이러스를 혈청에서 분리하는 데 성공한 그는 바이러스의 생물학적 특성도 밝혀내며 세계 학계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김 교수는 이 내용을 국제학술지에 논문으로 발표해 C형간염 예방백신 개발의 기초를 마련했다. 김 교수는 실험실 밖에서는 국민들의 선생님이기도 했다. 연구도 중요하지만, 간염의 실체를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간 질환의 종류, 원인, 간염 예방을 위한 홍보에 열심히 참여했다. 일회용 면도기 사용, 접객업소에서의 식기 소독, 민간약 오남용 금지 등 일상생 활에서 지킬 수 있는 내용을 대중에 알리면서 간염 예방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던 그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은 간염 전도사라는 애칭을 붙여주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3년 대한의학협회 학술상, 1983년 대한민국과학상, 1984년 국민훈장 모란장, 1995년 호암상, 201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의 영예를 얻었다. “의학자라면 환자에게는 친절하되 자신에겐 엄격해야 합니다. 제자들 중에는 간 분야의 권위자가 된 사람들이 꽤 있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했다는 것입니다. 후학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혹시 자신에게 너무 관대한 것은 아닌지, 환자에겐 소홀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동아일보, [인물포커스]최근 회고록 낸 한국肝연구재단 김정룡 이사장 中, 2004.09.21.) “救人醫國(구인의국, 사람을 살리는 것이 나라를 구하는 것)”

2000년 정년을 맞고도 자신이 설립한 간연구소의 특별연구원으로 일하며 연구에 전념했던 김정룡 교수는 연구실 한 쪽 벽면에 ‘구인의국’이라는 문구가 적힌 액자를 걸어두고 있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나라를 구하는 것’이라는 신념은 그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자신의 꿈을 이루고,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길을 올곧게 걸어간 김정룡 교수. 마지막 순간까지 환자를 대면하며 의사의 본무를 다했던 그의 빛나는 업적은 한국 의학사에 한 획을 긋는 이정표로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