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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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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IT 강국으로 이끌다

전자계산기, 컴퓨터, 전자교환기의 국산화로 한국 정보통신산업의 고도화에 기여
TDX, 4M D램, CDMA 기술개발사업을 매개로 대형 IT 국책사업의 토대를 구축

한국을 (정보의 황무지에서) IT 강국으로 이끌다 안병성 전자계산기, 컴퓨터, 전자교환기의 국산화로 한국 정보통신산업의 고도화에 기여 /TDX, 4M D램, CDMA 기술개발사업을 매개로 대형 IT 국책사업의 토대를 구축학력-1959 인하공과대학 전기 (공학) 과 졸업
1961 인하공과대학 전기 (“) 과 석사
1975 인하대학교 공과대학 전자 (“) 과 박사
경력-1962~1970 한국원자력연구소 연구관
1970~1977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실장
1977~1981 한국통신기술연구소 교환 담당 부소장
1981~1984 대영전자공업주식회사 부사장, 연구소장
1984~1998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연구단장, 선임연구위원
1999 주식회사 수미 설립, 대표이사 사장
포상-1972 제8차 수출진흥확대회의 대통령 표창
1974 3․1문화상 기술상
1976 국민훈장 석류장
1979 대한전자공학회 기술상
1989 국민훈장 동백장1972년 2월 서울 홍릉의 한국과학기술연구소.당시 연구소 부소장이었던 정만영 박사가 안병성 연구실장 방을 찾았다. 그는 비밀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안 실장에게 꺼냈다. “청와대에서 뭘 부탁해 왔네. 각하 승용차에 달린 모토로라 이동전화 알지? 그게 지방에 통화할 때 자꾸 말썽을 부리나 봐. 그리고 각하 책상에 비상전화가 여러 개 있는데, 벨들이 울릴 때마다 어느 전화인지 몰라서 짜증을 내신대. 그래서 말인데, 어느 벨이 울리든 전화 한 대로 자동 연결되게 전자 교환 시스템을 만들면 해결되잖아.”“그러니까 무선이든 유선이든 자동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전자 교환기를 원하시는군요.”“맞아! 각하가 전화를 걸 때 상대가 통화중이면 기다려야 하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그렇죠. 하지만 무선 통신은 미국 장비가 훨씬 나은데 왜 굳이 우리한테 맡기죠?”“보안 때문이겠지. 청와대가 갖고 있는 유일한 피해의식이 뭔 줄 아나? 국무회의 내용이 미국에 도청될까 봐 전전긍긍한대. 어때? 일 년 안에 만들어 달라는데 할 수 있겠지?” (책 ‘우리 휴대폰 덩크슛 쏘다’ 중)암호명 ‘메모콜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이를 계기로 안병성 박사를 팀장으로 하는 전자교환시스템팀이 구성됐다. 1972년 8월부터 1973년 6월까지 약 10개월 간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청와대 핫라인용으로 쓸 수 있는 전자교환기를 개발하는 일이었다. 자동식 교환기에 컴퓨터를 결합해야만 하는 전자교환기를 개발하기 위해 프로젝트 일원들은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듯 연구에 매달렸다. 결과는 반쪽 성공이었다. 보안 문제를 완벽히 해결하지 못해 청와대에서 쓰이진 못했지만, 성능 평가는 기대 이상의 결과로 이어졌다. 통신의 불모지에서 IT 강국으로 향하는 길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고, 그 길의 출발점에 안병성 박사가 있었다.  안병성 박사는 1935년 출생했다.우리나라 공업 기술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설립됐던 인하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과를 졸업한 그는 1961년 같은 학과에서 석사를 마치고, 이후 1975년 동 대학 전자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석사 학위를 마치고 들어간 곳은 한국원자력연구소였다. 당시 전자공학연구실에서 연구관을 지낸 그는 이곳에서 9년간 재직하며 펄스증폭기, 계수기, 파고분석기 등의 트랜지스터화를 연구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KIST)로 자리를 옮긴 건 1970년의 일이었다. 당시 국가 산업화 추진의 ‘두뇌’ 역할을 하고 있던 KIST는 산업계가 필요로 하는 기술이 무엇인지를 찾는 동시에 우리나라에 유리한 산업 분야를 찾아야만 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유학파는 아니었지만 원자력연구소에서 쌓은 실력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던 안 박사는 방식기기연구실(후신 전자공학부) 실장을 맡아 다양한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다.
1971년엔 전자계산기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탁상용 전자계산기, 포켓형 전자계산기, 프린터형 전자계산기 등을 개발한 그는 그 공로로 1972년 대통령 표창과 1974년 3.1문화상 기술상을 받았다. 당시 탁상용 전자계산기는 미국, 캐나다, 브라질 등지에 10만여 대가 수출될 정도로 인기 수출 품목이었다. 1972년도에는 우리나라 산업전자기기 수출액 중 70%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 우수성에 힘입어 미국의 <Consumer Report> 1973년 6월호에서 다른 15종의 전자계산기와 비교되기도 했다. 1973년엔 그의 주도로 최초의 국산1호 컴퓨터인 ‘세종1호’가 개발됐다. 1972년 진행된 메모콜 프로젝트를 통해 탄생한 세종1호는 미국 데이터제너럴(DG)의 미니컴퓨터 ‘노바01’을 개량해서 만들어진 컴퓨터였다. 메모콜 프로젝트 진행 당시 KIST 연구진이 ‘노바01’ 환경에서 전자교환시스템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했지만, 컴퓨터가 소프트웨어의 핵심 기능을 지원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면서 끝내 합격점을 받지 못했다. 이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노바01’과 호환되는 컴퓨터 개발이 추진됐고, 그 결실로 세종1호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 국내 연구진에 의해 자체적으로 개발된 세종1호는 미니급 컴퓨터가 보유한 모든 기능을 갖췄다고 평가받았다. 당시의 기술적 한계 등을 고려하면 최첨단 제품이었다. “세종1호의 16비트 프로세서는 소프트웨어적으로는 노바(Nova)와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즉 노바는 여러 종류의 버스를 갖는 다중 버스 방식이었으나 세종1호는 여러 버스를 하나로 통합한 단일 방식이었으며, 구조적으로 훨씬 간결하여 제조원가를 절감할 수 있었다. 세종 1호는 16비트 자료를 한 번에 처리하는 16비트 병렬처리 방식을 채택하여 처리속도를 개선하였다.”
(산업통상자원부, 한국공학한림원, 한국산업기술발전사 중)세종1호의 개발 성공은 우리나라 ICT 산업의 자양분이 됐다. KIST는 세종1호와 결합된 전자교환시스템을 ‘KIT-CCSS(Computer Controlled Switching System)’로 명명했다. 안 박사는 합격점을 받지 못한 이 기술의 상용화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 결과, 미국 GTE사로부터 500회선 규모의 사설전자교환기 연구 과제를 수주할 수 있었다. 안 박사와 KIST 연구진들은 미국 GTE 사의 지원으로 1975년 KIST-CCSS를 보완한 ‘KIST 500’을 발표했다. 그는 이 작업을 수행하면서 “분산 배정법에 의한 시분할통신계의 용량증가에 관한 연구”(1975)로 인하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GTE사는 KIST 500과 세종1호를 대량 생산하기 위해 1977년 2월 삼성그룹과 공동으로 삼성 GTE라는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삼성GTE사는 이후 삼성반도체통신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국산 컴퓨터 및 TDX-1 개발의 밑거름이 된 교환기 기술을 축적하게 된다.세종1호는 삼성반도체통신이 1980년대 중후반에 독자모델로 개발한 ‘삼성 슈퍼마이크로’ 시리즈 컴퓨터의 기술적 토대가 되었으며, KIST 500은 이후에 지속적으로 개량되어 1977~1991년에 추진된 전전자(全電子)교환기(TDX) 기술개발사업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1978년엔 체신부 산하 특정연구기관인 한국통신기술연구소(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ETRI)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교환 담당 부소장으로 재직하면서 시분할(時分割) 전자교환기 개발사업에 필요한 기반연구를 본격화했다. 시분할 전자교환기 시업은 우리나라가 통신 강국으로 발돋움한 계기가 된 전전자(全電子)교환기(TDX, Time Division eXchange) 개발의 모태가 된 개발 사업이었다. TDX 개발은 5년간 총 1,300명의 인력과 240억 원의 연구비가 투입된 초대형 연구개발 프로젝트였다. 하나의 목표로 똘똘 뭉친 ETRI 연구진과 전폭적인 정부 지원, 기업들간의 협력은 프로젝트의 성공을 예상케 했다. 모든 이들의 열정으로 1986년 선진국만 보유하고 있던 TDX 기술을 세계에서 10번째로 국산화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TDX 상용화로 당시 문제가 됐던 만성적인 전화적체 현상을 해결할 수 있었다.또한, TDX 기술로부터 파생된 다양한 기술과 서비스로 1997년 말에는 전화망 구축 1천 만 회선을 돌파했으며, 이를 통해 본격적인 ‘1가구 1전화’ 시대가 도래하게 됐다. 똑똑한 기술 개발은 경제적 효과를 불러왔다. 수입대체 효과 4조3,406억 원, 수출 1조458억 원 등 약 5조3,846억 원의 경제효과가 창출됐다. TDX 개발은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사회 및 경제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킨 역사적 사건이었다.1986~1989년에는 ETRI가 주관하고 삼성전자, 금성반도체, 현대전자 등 반도체 3사가 참여하는 일명 ‘4M D램 공동개발사업’이 전개되었는데, 안박사는 이러한 초고집적 반도체기술 사업의 종합개발 계획 수립과 사업자 관리를 주도했다. 또한, 1989년에서 1996년까지 약 7년간 추진한 디지털 이동통신 기술개발사업(CDMA 기술개발사업)에서는 무선통신개발단 단장을 맡아 이동통신 기술개발에 관한 기반연구를 수행하면서 공동개발업체를 선정하는 작업을 주관했다. “안병성 박사님은 천생 엔지니어셨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무섭도록 몰입하셨는데,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해결책을 마련하곤 하셨죠. 이렇게 장인 정신을 가진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지금의 IT 강국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김명준 ETRI 원장)TDX 기술개발사업, 4M D램 공동개발사업, CDMA 기술개발사업 등 우리나라가 IT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마중물이 됐던 주요 국책사업에 모두 참여했던 그는 자신의 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불모지를 개척해 나간 선구자였다. IT 산업의 초석이 된 모든 기술 개발사에서 그의 족적은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 천생 엔지니어였던 안병성 박사, 그의 열정과 추진력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