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스토리 뉴스

스토리 뉴스

KAIST와 포스텍을 연구중심대학으로 발전시킨 화학공학자

세계적 촉매연구로 화학공학의 수준 향상에 기여 / 연구 중심의 대학 학사운영 기틀 마련

KAIST와 포스텍을 연구중심대학으로 발전시킨 화학공학자 김영걸|세계적 촉매연구로 화학공학의 수준 향상에 기여 / 연구 중심의 대학 학사운영 기틀 마련 학력 | 1951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공학사(화학공학) 1958 미국 버크넬대학 대학원 공학석사(화학공학) 1963 미국 프린스턴대학 대학원 공학박사(화학공학) / 경력 | 1963~1974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교수 1974~1987 한국과학원 교수 1981~1983 한국화학공학회 회장 1987~2001 포항공과대학교 교수 1991~2000 포항공대 촉매기술연구센터 소장 / 포상 | 1987 국민훈장 동백장 1993 한국화학공학회 공로상 1994 한국화학공학회 학술상 “안정된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한국과학기술원을 선택하여 최고의 수준까지 올려 높은 것에 만족한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여 성취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에 가장 큰 보람이 남는다.” /  종신 교수직을 버리고 귀국한 재외과학자 1호. 김영걸 교수는 일신의 평안보다 조국의 발전을 바라며 헌신한 과학자였다. 국내 이공계 대학의 새로운 발전을 추구하며, 인재들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데 자신의 역량을 쏟아 부은 그는 늘 솔선수범하며 책임 있는 리더십을 보여준 과학계 큰 스승이었다. 김영걸 교수는 1930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신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넉넉하진 않지만 부족함 없이 자랐던 그가 처음 맞닥뜨린 불행은 한국전쟁이었다. 전쟁통에 부친을 여읜 그에게 슬픔에 빠져 있을 시간이란 없었다. 다른 가족들을 위해 일어서야만 했던 그는 암흑기 속에서도 학업이라는 동아줄을 놓지 않았고, 마침내 1951년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할 수 있었다. “2차 대전과 6.25전쟁, 휴전 후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대학 졸업장을 받았으나 참으로 배울 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 유학을 갔다.” / 더 큰 배움을 찾아 1955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1958년 버크넬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63년에는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박사논문 제목은 “Studies of turbulent mixing by light-scattering method”였다. 이후부터는 탄탄대로였다. 그는 미국 중북부의 명문대학인 노스웨스턴대학에서 화학공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12년간 교육과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그의 헌신에 노스웨스턴대학은 종신 교수직을 제안했다. 온전히 그의 실력과 역량으로 올라선 자리였다. 수락한다면 미국에서 과학자로 원하는 활동을 계속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안정된 미국 생활을 뒤로 한 그의 결정은 ‘한국행’이었다. 그가 갑작스럽게 귀국을 결정한 건, 당시 정부가 추진하던 ‘재외과학자 유치사업’ 때문이었다. 정부는 우수 과학기술인력을 국내로 다시 데려오기 위해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고 귀국을 권유했는데, 김 교수가 그에 응한 것이었다. 그의 영구 귀국엔 1973년 참여했던 미국 국립과학재단 개발도상국 기술협력 프로그램이 결정적 계기가 됐는데, 9개월간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서울대학교에서 강의를 진행하며 역량을 인정받았던 것이 시작점이 됐다. 이후 그는 한국과학원(현 KAIST)의 정교수로 임용되게 된다. / 그의 이러한 결정은 한국에게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다. 첫 번째로는 그가 미국에서 정년 보장까지 받은 교수로는 처음으로 귀국을 단행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그가 조국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는 데 있다. 한국과학원(1988년 KAIST로 재편)이 국내 최초의 대학원 대학으로 자리 잡은 데에는 그의 공이 혁혁했다. 그는 귀국 후부터 1987년까지 화학공학과 교수, 교무처장, 부원장을 역임하며 한국과학원의 학사 운영 체제를 바로잡는 데 힘을 기울였다. 특히 그의 미국 유학 시절 경험은 기준 미달의 과학기술 인력 배출 방지에 효과적이었다. 그는 교수와 학생을 위한 각종 제도와 기준, 요건 등을 새로 만들거나 국제 수준에 걸맞게 강화시켜 나갔다. 그가 특히 두각을 드러낸 곳은 교수 충원 쪽이었다. 그는 이제 막 역량을 드러내기 시작한 과학자 초빙을 목표로 삼았는데, 무조건적인 애국심으로 귀국을 종용하는 것이 아니라 임용 절차와 조건, 근로 처우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과학자가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여러 기관이나 학교에 복수 지원을 용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 과학기술처 장관이 한국과학기술원(전 한국과학원) 정원을 크게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우리가 언제 대학에서 제대로 배운 일이 있습니까? 그러고도 이렇게 놀라운 발전을 하지 않았습니까? 너무 질을 따지지 말고 양을 공급하십시오’라고 말해 놀랐다.” / 그는 인력 양성에서 양보다는 질을 우선해야 한다는 주의였다. 그러나 1970년대 우리나라 과학 교육은 미국을 비롯한 강국과는 반대로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주변의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한 그의 신념 덕분에 국내 이공계 대학원에 연구 중심의 학사운영 체제가 마련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연구의 목표 수준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 교수 승진과 더불어 박사학위를 받으려면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해야 한다는 것을 필수 조건으로 삼았다. 모든 조건을 국제 수준에 걸맞게 강화함으로써 한국과학원의 박사학위 수준을 크게 높였다. 그의 업적은 한국과학원 설립조사팀 위원장이며 뒷날 미국 고문단 단장을 맡아 한국과학원의 산파 역할을 했던 스탠포드대학의 터만(Frederick E. Terman) 교수도 높이 평가했다. 그의 활약은 한국과학원에서만 멈추지 않았다. 그는 1987년 포항공대(현 포스텍)가 문을 열면서 바로 합류했다. 또 하나의 연구중심 대학을 세우기 위한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 그는 포항공대에서 초대 화학공학과 주임교수와 초대 대학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2001년 2월 정년 은퇴할 때까지 포항공대를 연구중심대학으로 육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의 헌신으로 KAIST와 포스텍은 오늘날 세계 유수의 연구중심대학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 화학공학의 국제화를 추진한 개척자이기도 했다. 1981년부터 2년간 한국화학공학회 회장으로 재임한 그는 조직위원장으로서 대형 국제학회인 ‘제3회 Pacific Chemical Engineering Congress(PACHEC-III)’를 한국에 유치하는 데 성공한다. 1983년 열린 이 학회는 공식적으로 1,100명 이상이 참석한 것으로 집계됐으며,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그리고 1997년에는 아시아태평양 촉매학회(APACS)의 창립을 주도했으며, 그 첫 번째 학회인 ‘APCAT-I’을 경주에서 개최하는 등 국제적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는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의 위상을 높이는 데 헌신한 것은 물론, 촉매에 관한 연구로도 국제적인 명성을 떨쳤다. / 국내 화학공학 분야에서 촉매와 관련된 연구를 본격적으로 추진한 그는 1991년부터 9년간 한국과학재단 지정 우수공학연구센터(ERC)인 촉매기술연구센터의 소장으로 촉매 연구분야 발전을 이끌었다. 또한, 활발한 산학협력을 통하여 국내 화학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2001년 퇴임 전까지 유명 국제학술지에 72편, 국내 학술지에 30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포스코 등과의 산학협력을 거쳐 13건의 특허를 획득해 기술을 이전했다. 더불어 2개의 국제 학술지(Applied Catalysis · Catalysis Review)의 편집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학반응공학개론](한림원, 1990)을 집필하며 후학 교육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어디에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는 인재들만이 배출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주어진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 과학자이자 교육자, 전략가로서 각각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대학 발전에 이바지했던 김영걸 교수. 그가 걸어 온 발자취는 대한민국 이공계 대학이 걸어갈 나침반이 됐다. 이공계 학생들의 가능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데 평생을 바친 그의 진심은 국가 성장의 발판이 되어 더 큰 도약을 이끌어 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자신의 신념으로 뚜벅 뚜벅 걸어간 김영걸 교수.  금도 여전히 그는 자신의 길을 걸으며 담담히 과학적 진심을 전해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