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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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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광물자원 연구를 개척한 지질학자

지하자원 연구로 대한민국 산업화에 기여 / 지질학계 후진 양성과 학술공동체 형성 주도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59 한국 광물자원 연구를 개척한 지질학자 박동길|지하자원 연구로 대한민국 산업화에 기여 / 지질학계 후진 양성과 학술공동체 형성 주도 학력 | 1925 일본 오사카공업고등학교 응용화학과 졸업 1930 일본 도호쿠제국대학 지질광물학과 졸업 1963 한양대학교 명예공학박사 / 경력 | 1939~1945 경성광업전문학교 교수 1945~1951 지질광산연구소·중앙지질광물연구소 소장 1947~1955 대한지질학회 초대 회장 1952~1962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 1959~1963 원자력원 원자력위원 1974~1978 대한민국학술원 부회장 / 포상 | 1959 대한민국학술원상 1963 청조소성훈장(근정훈장 1등급) 1963 국민훈장 무궁화장 1981 수당과학상 “수많은 그분의 제자들과 또 그 제자들이 오늘날 학계, 산업계, 그리고 연구기관에서 
우리나라 자원 개발에 여념 없이 노력하고 있다.”(운암지질학상 운영위원회) / 한국 광물자원 연구를 개척하며 대한민국 산업화에 앞장선 박동길 교수. 그의 인생은 많은 이들의 거울이 되어 변화를 이끌어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패기 하나로 자신의 인생과 조국을 책임졌던 박동길 교수. 현재도 그를 존경하는 많은 후학들이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다. 그는 1897년, 충남 연기군 전동면의 가재골로 불리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그는 어렸을 적부터 서당을 다녔는데, 철이 들 무렵부터는 신학문에 대한 호기심을 지녔다. / 결국 그는 17세의 늦은 나이에 천안보통학교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힘들게 이어갔지만, 그는 천성이 긍정적이며 패기가 넘쳤다. 
특히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는데, 자신과 성적이 같은 천안 군수의 아들이 석차가 그보다 두 계단이나 위인 걸 알고는 교사에게 성적표를 내던지며 항의했을 정도였다. 1917년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집안이 넉넉했다면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교장의 추천으로 일본에 소년 직공으로 취직하게 된 그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도일(渡日)을 결심하게 된다. / 그는 일본 오사카에서 견습공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일본은 군수 물자를 바탕으로 공업 국가로의 성장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기업 내에 새로운 연구기관이 설치됐고, 지역별로는 고등교육기관 신설이 급격히 추진됐다. 그는 일본의 변화를 직접 눈으로 살피며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기술만 배워서는 큰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이듬해에 간사이상공학교 야간반에 입학해 주경야독 했다. 야간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후로 일본인 직공들의 야유가 심해졌다. “너 같은 조센징이 야학은 뭐하러 다니냐”는 비난적 언사는 기본이었다. 그는 결국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오사카시립공업연구소로 직장을 옮겼고, 학교도 간사이상공학교가 아닌 같은 야간학교였던 오사카공업전수학교 중등부로 전학했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생활했던 그는 그곳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를 눈여겨 본 오사카공업전수학교 교사는 그에게 주간인 오사카고등공업학교(현 오사카대학)로의 진학을 권했다. 그러나 당시의 그에게 오사카고등공업학교는 오를 수 없는 산과도 같았다. 걱정하는 그를 독려한 건 진학을 권한 교사였다. 그는 교사의 격려에 힘입어 입학시험을 준비했고, 1922년 마침내 합격하게 된다. / 오사카고등공업학교에서 응용화학을 전공하고 1925년에 졸업한 그는
제약회사에 2년 근무하다가 일본 북동부 센다이의 도호쿠제국대학 이학부 지질광물학과에 입학한다. 당시 36명이 응시해 7명이 합격했는데, 일본인을 제외한 외국인은 그가 유일했다. 그는 1930년 귀국했다. 14년 전 나라를 떠난 까까머리 소년이 제국대학을 졸업한 이학사로 고국의 땅을 밟은 것이었다. 그는 귀국과 동시에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광산과가 있었던 경성고등공업학교 조교수로 부임했고, 1939년 경성광산전문학교가 문을 열자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척박하고 암울했던 당시의 한국에서 그는 국내 지질학계에 기념비가 될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며 걸출한 학자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그는 ‘스타 교수’였다. 1935년 동아시아지역에서는 지질학적으로 다이아몬드가 나오지 않는 다는 정설을 뒤엎고, 최초로 다이아몬드 원석을 발견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학문의 자유를 누릴 수 없었던 시기에 발견한 성과라 더 의미가 있었다. 물론, 이 모든 일은 그의 지질광물에 관한 학문적 조예와 경험, 탁월한 분석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그의 발견은 2월 2일자 [동아일보] 에 대서특필됐다. “두만강 연안에서 천연산 금광석 발견-동양에서 최초의 일” 그의 지질학적 성과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일본 제약회사 재직 시절 피마자유 재생에 관한 ‘술폰화유지 제조법’을 개발해 특허를 받은 바 있었다. 그의 탁월한 연구 역량이 꽃피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다. 이후 그는 화학적 방법에 의한 광물자원의 검출 및 감정법을 개발해 특허를 받았으며, 1940년에는 황해도 지역에서 알루미늄을 포함하는 규산염 광물의 일종인 알칼리 장석(長石, feldspar) 광상을 발견하는 성과를 올렸다. 또 함경북도 지역에서 유색 조암광물의 일종인 각섬석(角閃石, amphibole), 강원도 지역에서 화석 광상을 발견하는 등 업적을 남겼다. / 그의 업적으로 우리나라는 현대 지질 광물학 연구의 초석을 다질 수 있었다.   광복 후 그는 한국 지질학 재건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미군정청 상무부는 일본인들이 빠져나간 지질조사소와 연료선광연구소를 접수한 뒤, 두 기관을 통합하기로 결정하고 박동길을 겸임 소장으로 임명했다. 두 기관은 1946년 4월 지질광산연구소로 통합되었고, 1949년 9월 중앙지질광물연구소 등 몇 차례 명칭 변경을 거쳐 현재의 한국지질자원연구원(KIGAM)으로 계승되었다. / 그는 지질광산연구소와 중앙지질광물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1951년까지 봉직하며, 분단과 전쟁 등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연구소의 기틀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당시 지질학 연구는 국가경제 재건에 꼭 필요했다. 이제 막 농업 국가에서 벗어난 한국은 기술이 필요한 공업보다 지하자원을 활용한 광업에 경제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각종 광물자원의 효과적인 활용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질학 연구는 국가 재건에 직접적으로 이바지하는 일이었다. / 그는 [한국의 광물자원](1953), [방사성 광물의 탐광](1961) 등의 학술서를 펴내 광물자원 개발을 위한 학문적 토대를 제공했다. 또한, 강원도 양양 철산광상(철광석) 등 유용 자원을 발굴하여 산업화의 기틀을 닦는 데에 기여했다. 대한지질학회 창립의 중심에도 그가 있었다. 당시 지질학을 전공한 한국인은 10명에 불과했다. 그중에서도 한국 지질학계를 대표했던 그는 1947년 학회 창립과 함께 초대 회장에 올랐고, 1955년까지 재임했다. 그의 주도 아래 대한지질학회는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1952년부터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광산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정년 후에는 인하공과대학(현 인하대학교) 명예교수로 후학 양성에 주력했다. 청조소성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당과학상, 5·16민족문화상 등의 상훈을 받았으며, 학술원 부원장을 역임했다. 후학들과 대한지질학회는 1974년 그의 공적을 기려 [운암지질학상]을 제정하고, 매년 지질학계에 공헌이 큰 이에게 시상하고 있다. “운암 선생님은 지난 50년간 관계나 업계에서 여러 제의를 받았지만, 명예나 지위나 재물은 전혀 외면하시고 오직 이 나라를 짊어질 동량(棟梁)을 가꾸고 키우시는 데 정력을 쏟아 오셨다. 그분이 걸어온 길은 바로 우리나라 자연계 고등교육기관의 발자취로 그분의 증언은 바로 그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운암지질학상 운영위원회) 17세의 나이에 보통학교의 문을 두드린 소년. 그는 그것을 부끄럽다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무언가를 찾았다는 기쁨이 전부였다. 박동길 교수는 그런 사람이었다. 넘치는 리더십으로 좌중을 휘어잡고, 뛰어난 연구력으로 학계의 존경을 받았던 한국 지질광물학의 보석 박동길 교수. 정부는 그의 헌신과 업적을 인정하며,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의 명예를 헌정했다. 그가 품었던 고귀한 뜻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그대로 실현되고 있다. 다이아몬드처럼 반짝 반짝 빛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