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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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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 레이저를 최초로 개발한 광학의 대부

국내 최초 레이저와 렌즈 개발로 광기술 국산화 견인 / 세계 최고 수준의 광학 연구자들을 배출한 존경받는 스승

국산 레이저를 최초로 개발한 광학의 대부 이상수 | 국내 최초 레이저와 렌즈 개발로 광기술 국산화 견인
세계 최고 수준의 광학 연구자들을 배출한 존경받는 스승 학력 : 1949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 1956 영국 Imperial College London 물리학 석사 1959 영국 Imperial College London 물리학 박사 (광학) / 경력 : 1967~1970 원자력연구소 소장 1970~1971 원자력청 청장 1971~1972 한국과학원 초대 원장 1989~1993 한국광학회 초대·2대 회장 1972~1991 한국과학원(후에 KAIST) 교수 / 포상 : 1979 국민훈장 모란장 1982 대한민국 과학기술상 과학상 2000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7 Esther Hoffman Beller Medal(미국광학회) [보통 아침 8시에 출근하여 저녁 8시경에 퇴근하면서 연구실에 있는 학생들의 그날그날 한 일을 일일이 확인하고 문제가 있으면 같이 토론도 하며 매일 같이 반복해서 그 당시로서는 저녁 시간이 공포의 시간이었으나, 지금 돌이켜보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정말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학생들을 지도한 것을 알 수 있다.](이민희 인하대학교 교수) /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국내 광학 연구에 뜨거운 불씨를 지핀 이상수 박사. 그는 연구자로서 뿐만 아니라 교육자, 그리고 과학행정 및 조직가로서의 폭넓은 활동으로 국가에 이바지한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다. 이상수 박사는 1925년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태어났다. 함흥상업고등학교를 거쳐 1949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한 그는 같은 서울대 대학원에서 1년을 더 공부했다. 이후 모교 물리학과 강사로 처음 교단에 선 그는 1955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중 영국문화원의 장학금을 받고 유학길에 오른다. 영국 유학은 그가 광학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됐다. 그가 진학한 런던대학 임페리얼 컬리지(Imperial College London)에는 색채과학의 대가인 William David Wright 교수가 재직하고 있었고, 광학설계의 대가인 W. T. Welford, 수차이론으로 유명한 H. H. Hopkins, 홀로그래피에 대한 연구로 1971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D. Gabor, 극초단파 레이저의 권위자인 D. J. Bradley 등 광학분야에서 당대 최고의 세계적 학자들이 연구 활동을 하고 있었다. / 이 박사는 쟁쟁한 학자들과 함께 연구하며 학문적 열정을 충족시켰다. 1959년 광학박막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국내 최초 광학분야 박사학위 취득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그러나 그의 유학 생활은 즐겁기만 하지 않았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 형편 탓에 해군 단화를 사 신고 영국에 간 그는 친구들로부터 [Are you navy?]라는 놀림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4년간을 꿋꿋하게 신고 다녔던 이 박사는 이후 뱃길로 들어오는 귀국길에서 신발을 던져버렸다고 회고했다. 그때의 후련함은 그 무엇에도 비견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귀국 후 그는 1960년대 광학 연구 및 교육과 더불어 과학행정에서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우선 그는 1959년에 설립된 원자력연구소에서 원자로와 관련된 물리학 연구를 진두지휘했다. 
당시 한국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 TRIGA-II가 1962년 가동을 시작함에 따라 물리학연구실에서는 그의 지휘 아래 원자로 재료의 중성자 흡수단면적 측정 연구, 열중성자회절 및 산란 연구, 핵분광학 연구 등이 수행됐다. / 탁월한 업적을 인정받은 그는 1967년 원자력연구소 소장에 임명됐으며, 1970년부터는 원자력청 청장의 소임을 맡아 TRIGA-II 출력 증강, TRIGA-III 수주 및 건설 등 한국 원자력 물리학 연구의 기틀을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레이저 연구도 원자력연구소 재직 시절 시작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설립되기 전인 1964년, 원자력연구소는 사실상 국내 유일의 현대적 과학기술 연구소였다. 때문에 연구 범위가 원자력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레이저는 세계의 첨단에 서있던 연구 분야였다. 그는 장비, 예산, 정보 등 모든 것이 부족한 열악한 환경에서 1967년 처음으로 헬륨-네온 레이저 빔을 추출하는 데 성공한다. 이 연구는 이후 다양한 고성능 레이저 개발의 신호탄이 됐다. 광학 연구가 본격화 된 때는 그가 한국과학원(현 KAIST)에 몸담고부터다. 1971년 원장으로 취임한 그는 우수 교수와 학생들이 모여 안정적으로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환경 구축에 힘을 쏟았다. 최고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각계각층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한국과학원 교수와 학생들은 전액 장학금은 물론, 기숙사 제공, 병역 혜택 등 파격적인 조건에 연구 활동을 해나갈 수 있었다. / 1972년 3월 급변하는 국내의 정치상황과 맞물려 원장직을 사임한 그는 이후 1991년 퇴임 때까지 수학 및 물리학과의 교수로서 연구와 교육에만 몰두하게 된다. 그의 연구 열정이 폭발한 때가 바로 이 시기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연속발진 이산화탄소 레이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을 당시, 그는 펄스형 레이저로 대출력을 낼 수 있는 광분해 옥소레이저와 이를 이용한 X-선 연구까지 폭넓은 연구를 수행했다. / 이에 대한 연구 성과를 인정받은 그는 1987년 정부로부터 1TW Nd-glass 레이저의 개발을 위한 대형 연구과제를 수주하는 데 성공했으며,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극초단파 레이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그는 1970년대 산업체에서 가장 많이 필요로 한 렌즈 설계는 물론, 반도체 산업에 필수적인 리소그래피용 광학시스템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 박사는 1980년대 극자외선 영역에서 반사경으로 구성된 리소그래피용 광학시스템을 개발한 데 이어, X-선을 사용하는 리소그래피용 반사경형 광학계에 대한 연구도 수행했다. 광학 분야 전반에 걸쳐 있는 그의 연구는 기초연구에 기반하면서도 광학 기기와 부품 개발, 광산업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 개발로 오늘날의 응용연구의 시작점이 됐다. 응용연구를 강조한 그의 연구 정신은 우수한 광학 연구집단 형성의 토대가 됐다. 그가 길러낸 107명의 석사와 48명의 박사들은 대학, 기업, 공공연구소 등으로 퍼져나가 스승인 이 박사와 함께 한국의 광산업 발전을 이끌었고, 광학 연구를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 그는 40여 년의 연구 생활 동안 학술논문 266편, 저서5권, 역서 7권 등 총 278편(권)의 업적을 남겼다. 특히 연구 논문 중 51편은 그의 KAIST 퇴임 이후 발표된 것으로,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박사는 한국 광학 분야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을 보탰다. 특히 그가 영국 유학 시절 맺은 인연은 한국 과학의 국제적 지위 향상에 큰 도움이 됐다. / 이 박사는 1974년 9월 일본에서 개최된 국제광학위원회(ICO: International Commission for Optics) 총회에 참석했을 당시 ICO 사무총장을 포함한 프랑스 광학자 10명을 초청하여 한국과학원에서 심포지움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1975년 ICO 총회에 회원 가입 신청서를 제출할 수 있었고, 마침내 한국은 ICO의 21번째 가입국의 지위를 가질 수 있었다. 응용연구를 중시하는 그의 지론은 고스란히 산학협력의 당위성으로 이어졌다. 이 박사는 한국의 광산업이 성장하기 위해선 광학의 산업적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989년 전기전자, 화학, 기계 등 광학 관련 분야 연구자들이 참여하는 한국광학회의 창립을 주도했으며, 초대 및 2대 회장을 역임하며 체계를 정립했다. / 1999년 레이저 및 광전자 환태평양 국제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될 때 국내 광산업 기업들의 제품전시회가 병행 개최된 것도 산학협력을 중시하는 그의 지론이 바탕이 됐다. 정부와 국내외 학술단체는 그가 일생 동안 보여준 헌신과 공로에 감사를 표했다. / 그는 1979년에 국민훈장 모란장, 1982년에 대한민국 과학기술상 과학상, 2000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으며, 국제적으로는 1975년에 미국광학회 펠로우로 선출되었고 2007년에는 미국광학회의 Esther Hoffman Beller Medal을 목에 걸었다. 2014년부터는 미국광학회와 한국광학회가 그의 업적을 기려 ‘이상수 상’을 공동 제정하고 격년으로 광학 발전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고 있다. 이에 정부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과학기술유공자의 명예를 헌정했다. 그는 법과 원칙을 지키는 것을 신념으로 삼았던 강직한 과학자였다. 한국과학원 초대 원장 시절, 저녁 식사 후 담소를 나누던 직원들에게 불호령을 내린 일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유명한 일화다. 나랏돈을 쓰는 사람들이 태만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였다.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과학기술 불모지였던 우리나라를 성장하게 만드는 탄탄한 토대가 됐다. /과학연구가 산업발전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보여준 한국의 대표 과학자, 이상수 박사. 그의 업적으로 오늘날 한국 광학계를 이끌어가는 후속 세대들이 세계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빛의 과학을 사랑한 이 박사. 그가 쏘아 올린 불꽃은 여전히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