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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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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PCB 산업의 역사 일군 전자산업 개척자

한국 전자제품 기술 향상에 기여 /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김정식

한국 PCB 산업의 역사 일군 전자산업 개척자 김정식 한국 전자제품 기술 향상에 기여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1학력-    1946 조선전기공업고등학교
    1956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자통신학과,    2002 광운대학교 명예공학박사,    
    2경력-
    1965 대덕산업(주) 설립,    1972 대덕전자(주) 설립,    1987 대덕전자 부설 연구소 설립,    1989 한국전자산업진흥회 부회장,    1991 해동과학문화재단 설립    
    3포상-    1975 상공부 기술개발 공로상,    1982 기술개발 국무총리상 ,    1996 경제정의 기업상 대상(경실련),    1999 금탑산업훈장,    2001 200대 월드베스트 중소기업(포브스)

기술이 곧 사람이다.
    故 김정식 대덕전자 회장은 씨앗(인재)의 성장을 늘 갈망했던 시대의 선각자였다. 
    국가 기술 발전을 위해선 인재양성이 우선이라는 신념은 그의 삶의 철학과도 같았다. 
    그는 생전 마지막 인터뷰에서조차 
    나무가 비를 맞고 자라듯 기업이 미래 인재들에게 비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며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이공계 인재들의 키다리 아저씨였던 김정식 회장. 
    그가 뿌린 작은 씨앗들은 울창한 숲을 이루며 국가 경쟁력의 근간이 되고 있다.

김정식 회장은 1929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났다. 
    서울에 위치한 조선전기공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해방 후 어렵사리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자통신학과에 진학하지만,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학업을 순탄하게 이어가진 못했다. 
    
    이웃에 살던 조선호텔 지배인을 찾아가 사연을 말하고 호텔에 웨이터로 취직한 그는 
    식당 바닥에 담요를 깔고 자는 등 주경야독하며 8년 후에야 대학을 졸업했다.

한국전쟁 당시 군에서 쌓은 경험은 그의 인생에 자양분이 됐다. 
    대학에 다니던 중 전쟁이 발발해 대구에 있는 부대의 공군 통신장교로 복무하게 된 그는 
    당시 얻은 경험과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밑거름 삼아 졸업 후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공군에서 함께 복무했던 통신장교 출신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관수용 통신기 개발에 도전한 그는 이를 기반으로 1964년 대덕전자의 모태인 ‘삼성전기제작소’를 세우고 사업을 확대시켜 나간다.

김 회장이 본격적으로 통신기기 산업에 뛰어든 건 이듬해인 1965년 
    대덕산업(대덕GDS로 개칭)을 설립한 후부터였다.
    
    한국 산업화에서 1960년대는 전자공업진흥법(1968)이 제정되고 
    전자공업 육성정책이 발표되는 등 정부의 산업화 노력이 활발했던 시기였다. 
    그는 1969년 국내에 전자산업 기반이 전무하던 시절 전자산업해외기술조사단 일원으로 
    미국과 유럽지역을 순회한 후, 전자제품의 핵심 부품인 PCB(인쇄회로기판)의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발견하고 국내 생산을 결정하게 된다.

PCB의 등장은 획기적이었다. 
    집적회로 관련 부품을 납땜해 기판에 올리는 PCB를 사용할 경우 기존 부품 간 연결을 전선으로 하던 방식보다 전자제품의 무게와 부피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PCB를 주력 사업으로 키우기 위해 PCB 전문업체 대덕전자를 1972년에 설립,
    일본 마쓰시타전기산업(현 파나소닉)에서 재료와 기술연수를 받은 후 
    단면 인쇄회로기판을 생산하는 데 성공한다.

PCB를 최초로 국산화하는 데 성공한 그는 시작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곧바로 PCB의 고급화에 도전했다. 당시 수입에만 의존했던 양면 PCB 개발이 목표였다. 
    기술 개발을 위해 일본 우라하마 전자와 손을 잡은 그는 
    수입에만 의존하던 양면 PCB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한다. 
    그의 선견지명으로 PCB는 1970년대 한국 전자제품 성능 향성과 가격 경쟁력에 도움을 주었고, 역으로 일본 기업에 수출하는 성과도 달성하게 된다.

PCB 국산화에 성공한 대덕전자는 핵심 전자부품의 국산화를 주도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79년에는 반전자교환기 M10CN을 위한 PCB를 국산화해 유선전화 확대 보급에도 기여했는데, 이 기술은 1982년 다층 PCB의 국내 최초 개발로 이어지는 성과를 낳았다. 
    
    대덕전자는 1984년 북미 최대 교환기 제조사 중 하나였던 캐나다 노던텔레콤(노텔)과 다층 PCB 공급 계약에 성공하면서 세계 PCB 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교환기 단가를 크게 낮추면서도 제품 신뢰성을 갖춘 대덕전자 제품은 노텔이 북미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990년대에는 휴대폰용 PCB, 2000년대에는 반도체용 PCB 등 
    신제품 개발에 필요한 PCB를 개발하며 기술능력을 키웠다. 
    휴대폰용 PCB, STH PCB, 반도체용 초박판 PKG PCB는 
    정부 주관 세계 일류상품에도 선정되어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대덕전자는 포브스 선정 미국 제외한 국가의 200대 중소기업에 
    2001년과 2002년 2년 연속 선정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는 PCB 분야에서 모방에서 창조로 이어지는 한국형 기술혁신의 우수 사례를 만들면서 
    한국을 PCB 강국의 위치에 올리는 데 공을 세웠다.

김 회장은 PCB 기술개발에 평생을 바친 선각자로 
    개도국의 중소기업도 글로벌 전문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는 PCB 기술 성과와 수출을 통해 국가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석탑산업훈장(1979), 동탑산업훈장(1990), 금탑산업훈장(1999)을 받았다. 
    
    또한 2000년에는 대덕전자가 2억불 수출의 탑을 받아 PCB 전문업체로서의 세계적 위상,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기술력을 한 번 더 보여주었다.

국내 전자산업과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그의 애정과 관심은 언제나 뜨거웠다. 
    김 회장은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일에 열정을 쏟았는데, 
    그 중심에는 언제나 과학기술, 인재양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 1991년 사재를 들여 해동과학문화재단을 설립한 그는 30여 년 간 
    한국공학한림원, 한국통신학회, 한국 마이크로전자 및 패키징학회 등 
    4개 학회의 연구자 282명에게 1인당 2,500만원의 연구비를 지원했다. 
    어려운 대학생 280명에게는 장학금 약 22억 원을 지원했다. 
    2002년에는 공장 인근 경기도 안산에 대덕복지재단을 세워 지역 사회공헌사업도 추진했다.

지난 2019년 2월에는 서울대에 4차 산업혁명시대에 걸맞은 교육을 위한 AI센터 설립에 써 달라며 사재 500억 원을 쾌척하기도 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가 AI 단과대인 '스티븐 슈워츠먼(Stephen A. Schwarzman) 컴퓨팅 칼리지'를 신설한다는 소식을 접한 뒤 내린 결정이었다. 

    그의 기부금으로 서울대 공대는 2022년 개관 목표로 한 '해동첨단공학기술원'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김 회장이 모교에 기부한 사재는 모두 657억 원으로, 서울대 역대 개인기부 가운데 최고액이다.

아버지는 항상 외국 경제 신문과 공학 잡지를 챙겨 보면서 우리나라 전자 산업이 갈 데까지 갔다. 남의 것을 모방하는 것으로는 더 이상 안 된다.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공학도이자 사업 후배로서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고 싶다. (김영재 대덕전자 사장)

    김 회장님은 우리나라 전자 산업을 일으켰다. 학생이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기부를 많이 하신 정말 훌륭하고 모두에게 귀감이 되는 분이었다.(오세정 서울대 총장)

김 회장은 모방에서 창조로 이어지는 한국형 기술혁신의 모범 사례를 만든 개척자였다. 
    그는 기업가로만 머무르지 않고 폭넓은 기부를 통해 기업의 이윤을 사회에 되돌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진정한 기업가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의 헌신으로 대덕전자는 2018년 기준 매출 9,600억 원, 
    직원 수 2,000여명의 건실한 중견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김 회장은 모교에 사재 500억 원을 쾌척한 지 50여 일만에 별세하며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한다.

    50년 동안 대덕전자를 경영하며 그가 늘 마음에 새겼던 단어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이었다.
    김 회장은 자연 섭리를 따르고 인간을 사랑하며 살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실천했다.
    그는 PCB가 물리 법칙과 각종 기계기술을 동원해 만드는 제품이지만, 
    그 안에 담긴 진정한 가치는 언제나 사람이라는 점을 기억하고 직원들을 사랑으로 독려했다.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선각자, 김정식 회장.
    기업의 가치를 돈이 아닌 나눔에서 찾았던 그의 경영 철학은 
    우리나라 산업계를 단단하게 만든 토대가 됐다. 
    그 토대 위에서 그토록 바랐던 기술강국의 꿈도 여물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