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스토리 뉴스

스토리 뉴스

한국 천연물 바이오텍의 선구자

고추의 캡사이신 성분에 대한 생화학 연구로 국제적 인정 /
미생물을 이용한 유기화합물 생전환 메커니즘 연구 권위자 이상섭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47 고추의 캡사이신 성분에 대한 생화학 연구로 국제적 인정 미생물을 이용한 유기화합물 생전환 메커니즘 연구 권위자 이상섭 한국 천연물 바이오텍의 선구자

학력 1954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학사, 1956 서울대학교 대학원 약학석사(생화학), 1966 미국 위스콘신대학 대학원 약학박사(생화학),    
    경력 1955~1996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조교, 교수, 1978~1981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학장, 1981~1982 한국생화학회 회장, 1983~1984 사단법인 대한약학회 회장, 1981~현재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1990~1993 한국과학재단 연구개발심의회 위원장    
    포상 1984 대한민국학술원 저작상, 1995 서울대학교 40년 근속상, 1996 국민훈장 목련장

우리 시각으로 겪었던 일들을 바탕으로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을 모르고 조언하는 것과 같은 꼴입니다. 
    이상섭 교수는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이    사명감보다는 꿈을 위해 도전하길 염원했다. 극한 상황에서 어려운 고비를 넘긴 세대의 대표로, 아무것도 없는 극단의 환경에서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일궜기에 그가 전하는 진심은 가까이 와 닿을 수밖에 없다. 
    미생물을 이용한 스테로이드 호르몬 생산 등의 연구로 국제적 인정을 받고 한국의 생화학, 약학 연구의 튼튼한 기반을 구축한 그는 지금도 여전히 과학계의 큰 스승으로 젊은 세대들의 방향키가 되어주고 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상섭 교수가 공부했던 부산의 서울대학교 임시교사는 영락없는 판잣집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교수들과 학생들의 열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의자는 각목을 가운데 끝에 6개 정도 세우고, 긴 나무판자를 두 장 정도 얹어 여러 사람이 쭉 앉는 방식이었어요. 책상은 없죠. 노트필기하려면 들고 받쳐가지고 했어요.

무엇하나 변변한 것이 없어 빠져들 것이라곤 학문의 길뿐이었던 그때, 그는 서서히 생화학 분야에 매료되기 시작한다.     
    당시 약학대학 학장이셨던 한구동 교수님이 생화학을 가르치셨는데, 그 강의에 매료되어 생화학이라는 학문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자연스럽게 생화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 교수가 고추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실험을 위한 비용도, 시설도,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작물로 실험을 했다. 그게 바로 고추였다. 고추의 매운 성분인 캡사이신에 주목한 그는 처음에는 발효연구에서 시작해 생체 내 대사, 대사산물과 관련 효소군, 독성, 약리작용, 발암성 유무, 진통작용 연구를 진행하게 된다.

그의 연구가 확장되기 시작한 건 미국 유학에서였다. 세 번째 시도에서야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된 이 교수는 1962년에 전액 장학금과 체제비를 약속한 미국의 위스콘신대학으로 떠난다.     
    1966년 위스콘신대학에서 미생물에 의한 스테로이드의 분해과정을 규명한 논문(Microbial Degradation of Steroids)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약학을 배경으로 한 생화학자로서 미생물의 효소반응에 의한 유용한 유기화합물의 생전환(biotransformation) 메커니즘을 밝히는 연구를 추진했다.

이 교수는 연구를 통해 미생물에 의한 스테이로드 대사경로를 규명하고 이 경로에 관여하는 효소군의 기능을 적절히 조절함으로써 산업적으로 효용가치가 적은 콜레스테롤이나 식물성 스테롤에서 스테로이드 호르몬을 생산하는 길을 개척했다.     
    이후, 그는 스테로이드 호르몬 생산과 관련된 여러 편의 연구논문을 1960년대부터 미국화학회지, 미국생화학회지 등에 발표했으며, 여러 바이오텍 전문서적의 스테로이드 관련 장에는 그가 규명한 생전환 메커니즘이 소개되기도 했다.

1970년대 미국에서는 이 교수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스테로이드 호르몬 생산이 시작됐다.그의 국제적 명성은 시대적 상황도 불식시킬 정도였다. 
    냉전시대인 1981년 불가리아 건국 1300주년 기념 국제학술행사(The 1st International Conference on Chemistry and Biotechnology of Biologically Active National Products)에 한국 대표 과학자로 초청되며 학계에서의 권위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국내 제약기업에도 스테로이드 생산기술이 이전됐다. 
    그는 동아제약의 연구비 지원으로 1968년 미생물 전환반응과 유기화학반응을 이용해 경구용 스테로이드 피임제 피고로와 임신 진단약 프레그나를 개발하고 국내 발명 특허를 출원했으며,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72년 보건사회부로부터 ‘약의 상’을 수상했다.

그는 1960년대 말부터 국소 호르몬으로서 통증과 발열, 관절염 같은 염증, 혈압조절과 혈액응고, 생식기능 조절 등 다양한 생리 기능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진 
    프로스타글란딘류(prostaglandin)를 곰팡이와 효모균을 활용해 전합성하는 연구를 추진했고, 그 결과를 1975년 미국화학회지에 발표했다.     
    이 연구를 바탕으로 John R. Vane(1982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은 해열, 소염, 진통작용을 하는 아스피린이 프로스타글란딘을 생합성하는 사이클로옥시지네이스(COX: cyclooxygenase) 저해제라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

또한, 1980년대 후반에는 많은 캡사이신 유사체를 합성, 
    진통작용과의 상관성 연구를 통하여 캡사이신 수용체의 존재를 가정하고 그 모델을 제시했다. 1997년 캘리포니아대학 연구진이 이 수용체를 클로닝함으로써 새로운 유형의 진통약물 개발이 추진됐다.

이 교수는 약학 교육과 연구 발전에 기틀을 닦은 선구자였다. 그는 1981년 서울대 약학대학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종합약학연구소와 교육연구재단을 만들어 대학은 연구소를 통해 제약산업계를 지원하고 
    산업계는 주식 기부로 재단을 지원하도록 하는 산학협동의 좋은 사례를 만들어 약학 교육연구 발전의 기반을 구축했다. 국가 예산의 충분한 뒷받침없이 독자적으로 대학원 교육을 충실히 하는 길은 약학 전 분야를 망라할 수 있는 종합연구소를 설치하여 대학원 교육에 활용하는 길밖에 없다.

서울대 약학대학의 강의 수준을 크게 높인 것도 그였다. 
    이 교수는 미국에서 처음 수여한 약-생화학(Pharmaceutical Biochemistry) 전공 Ph.D.를 받고 서울대에 복직하여 큰 기대를 받았으며, 저명 저널에 3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특허 3건을 실용화하는 등 우수한 연구성과를 생산해내면서 한국의 생화학 및 약학 연구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학계에서 쌓은 영향력으로 법안 정착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한국유전공학학술협의회 부위원장 시절 그는 학계의 의견을 모아 유전공학육성법에 반영시켰다.     
    또한, 아시아대양주생화학자연합(FAOB)의 한국대표로서 제5차 대회(1989년)를 유치하고 그 조직위원장으로 6년간의 준비 끝에 노벨상 수상자 3명을 비롯한 많은 석학들을 초빙하여 국내 최대 규모의 바이오 학술대회인 제5차 FAOB Seoul Congress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은퇴 이후 그의 호를 딴 오당 심포지엄 기금을 출연해 젊은 후학들이 자신의 연구결과를 소개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등 변함없는 약학계의 스승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 이상섭 교수.
    그가 지금껏 보인 한길 행보는 한국의 생화학, 약학 연구의 기반을 튼튼하게 구축하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여전한 청년(靑年)의 모습으로 새로운 인생의 한 페이지를 써내려가고 있는 이상섭 교수. 과학기술유공자로 대한민국 역사의 한 챕터를 담당할 그의 멋진 인생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