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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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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과학 발전을 주도한 국내 소아심장학의 태두

선천성 소아심장질환 치료 등 소아 건강 증진에 큰 기여 /
남북한의 첫 소아병동과 어린이병원 설립에 주도적 역할 홍창의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42 / 선천성 소아심장질환 치료 등 소아 건강 증진에 큰 기여
    남북한의 첫 소아병동과 어린이병원 설립에 주도적 역할 /홍창의 소아과학 발전을 주도한 국내 소아심장학의 태두

학력 - 
    1943 ~ 1945 | 일본 교토제국대학 의학부 재학
    1945 ~ 1947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1962 | 서울대학교 대학원 의과대학 소아과학교실 의학박사
    
    경력 - 
    1966 ~ 1988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소아과 교수
    1972 ~ 1974 | 대한혈액학회 회장
    1980 ~ 1982 |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장
    1982 ~ 1984 |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장
    1999 ~ 2002 |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초대 이사장
    
    포상 - 
    1967 | 문교부장관 표창
    1988 | 국민훈장 모란장

의사는 아픈 사람들이 있다면 그 누구든 어디에 있든 달려가야 하고 그들의 처지에서 치료를 해야 한다.    
    의사의 본분은 항상 환자와 함께여야 한다는 믿음을 평생 가르치고 실천해 온 홍창의 박사.
    그는 노숙인, 쪽방촌 사람들, 차가운 아스팔트와 철탑 위의 농성자, 차별받는 이주 노동자, 낙도 오지의 의료 소외계층 등 아픔이 깃든 곳에 주저 않고 달려간 참된 의사이자 의학자였다. 
    
    소아심장질환, 소아백혈병 등 소아 질환에 대한 연구 및 진료를 통해 국내 소아과의 발전을 이끌어낸 홍 박사의 삶은 상처를 보듬고 함께 걸어가는 든든한 벗의 인생과 꼭 닮아 있다.

홍창의 박사의 대학생활은 그야말로 혼돈과도 같았다. 
    시대의 불행으로 의과대학 생활의 반은 일본 교토대에서, 그 중의 반은 서울대에서 보내야 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해방이 됐음에도 정치·사회적인 혼란으로 제대로 된 대학생활이 힘든 때였다. 
    그 후로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대학은 황무지가 됐다. 
    그럼에도 그는 생존만으로 감사하다 여기며, 주어진 여건에서 묵묵히 견뎌나갔다.     
    1947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1회로 졸업한 그는 서울대병원에서 줄곧 환자들을 진료하며 의학교육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다 1955년 미국 미네소타대학과의 교환교수 프로그램을 통해 서울대병원 소아과에서는 홍 박사가 처음으로 연수를 가게 된다. 
    그는 2년간 미네소타대학 소아과에서 연수하며 소아혈액과 소아심장질환 진단법 연구를 수행했다. 
    
    미국에서의 경험은 그가 한국 소아심장학 발전의 물꼬를 여는 데 단단한 기반이 됐다. 
    / 미네소타대학 소아과에서 연수하던 시절의 홍창의 박사 사진

홍 박사는 국내 최초로 소아 백혈병환자를 치료했으며, 처음으로 심도자법(cardiac catheterization)을 시행하여 소아심장질환 진단의 발전을 이끌었다. 
    
    심도자법은 사람의 심장에 가느다란 줄인 도자(catheter)를 넣어서 혈액의 압력과 산소 포화도를 측정해 심장병을 진단하는 기술이었다. 
    1956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앙드레 쿠르낭(André Cournand)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가 노벨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심도자법은 20세기 들어와 심장학의 새로운 문을 열어준 열쇠”라고 했을 정도로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이라고 평가받았다.

또한, 그는 선천성심장병의 진단법을 처음으로 국내에 도입해 심실중격결손(ventricular septal defect, VSD) 등 국내 어린이들에게 가장 흔한 기형질환인 선천성심장병의 정확한 진단이 가능하게 했다. 
    
    홍 박사는 1959년 심실중격결손 및 비청색증형 폐동맥협착(pulmonary stenosis, PS)이 있는 8세 남아를 진단하여 국내 최초로 개심술(open heart surgery)을 시행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 소아 의학교육 발전을 위해 교과서를 집필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소아과학 교과서를 펴낸 홍 박사는 1970년 이후로 소아과 진료, 소아과학, 소아 심전도 해설, 소아 심에코도 해설, 소아과 아틀라스 등을 집필했으며, 2001년에 소아의 수액요법을 펴냈다. 
    특히 소아과 진료(2003년 9판 발행)와 소아과학(2004년 7판 발행)은 소아의 전반적인 질환에 대한 이해와 진단 및 치료에 대해 폭넓게 다룬 책으로 대표적인 소아과 진료 지침서와 소아과 교과서로 활용되고 있다.

그는 소아과 진단 및 치료와 관련된 여러 논문을 통해 
    소아심장학과 혈액학 뿐 아니라 소아과 진료 영역 전체에 걸친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특히 홍 박사가 1992년 발표한 한국 소아에서 다카야스 동맥염에 대한 논문은 70사례에 이르는 많은 환자들을 조사하여 보고한 결과로서 국제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았다.
    
    또한, 발전된 한국의 심장 수술적 치료 기술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제3세계 소아심장질환 환자를 국내로 초빙해 치료를 받게 함으로써 한국의 국가적 위상을 높이는 데 앞장섰다.

1980년 8월 12일 서울대병원장 취임식 사진 / 홍 박사는 1954년 서울대 의대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1980년 서울대병원장, 1982년 서울대보건대학원장을 차례로 역임하며, 특수 법인화된 서울대병원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당시까지 생소했던 가정의학과 창설이 대표적 사례다.
    그는 국내의 전문의 제도가 일반질환 진료와 포괄적인 진료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가정의제도의 필요성을 제안했다. 
    결국 홍 박사는 1979년 단과위주 전문의 교육을 고집하던 당시 교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차 진료의 중요성을 역설, 국내 최초로 대학병원에 가정의학과를 설립하는 데 성공한다.

남북의 첫 소아병동과 어린이병원도 모두 그의 생각과 손으로 이뤄졌다. 

    1980년 서울대병원장으로 재직하던 홍 박사는 병원 장기발전위원회에 어린이병원을 새로 지을 것을 제안하고 추진했다. 
    그 결과, 1985년 서울대병원에 국내 최초의 어린이 건강 전문 의료기관이 세워질 수 있었다. 
    이밖에도 미국 등 선진국처럼 서울대병원에 어린이들을 따로 전문 진료하는 소아병동을 개설하기도 했다.

평양어깨동무어린이병원 준공식 사진 / 북한 평양 어깨동무 어린이병원 건립의 일등공신도 바로 홍 박사였다. 

    그는 정년퇴직 이후 대북 지원단체인 남북어린이어깨동무에 이사로 참여하며 평양 어린이 영양증진센터 건립을 위한 북측 어린이영양관리연구소와의 협약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이후 영양증진센터 명칭이 평양 어깨동무 어린이병원으로 변경됐고, 2004년 무사히 설립될 수 있었다. 
    홍 박사는 집필한 책들을 평양의대의 소아병동에도 비치해 북쪽의 의사들도 보게 했다.

어린이들의 건강을 부모의 마음으로 걱정했던 그의 진심은 인터뷰를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최선을 다해 보람을 느낀다. 생전에 병원 준공식을 보게 돼 감개가 무량하다. 앞으로 이 병원에 북측에서 유능한 의사 등 전문 인력을 배치해 남측에서 지원한 병원 설비와 검사장비 등이 잘 활용되기를 바란다. 어린이들은 장차 우리 민족의 통일시대를 이끌어 나갈 주역이며 우리 겨레의 희망이자 보배다. 남과 북의 어린이들이 다함께 건강하고 총명하게 자라서 같은 키로 어깨동무하며 얼싸 안고 어울릴 날이 속히 와야 한다.

무의촌에서 어린이들을 진료하는 홍창의 박사 사진 /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는 옳은 일 앞에서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강직한 의사였다.
    
    홍 박사는 “세상이 아프면 의사도 아파야 한다”는 자신의 지론에 따라 
    1987년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던 의사들이 결성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의 
    초대 이사장을 맡아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무를 성실히 수행해 나갔다.

소아과학의 태두로 의사들의 교류 증진에도 앞장섰던 그는 1958년 대한혈액학회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972년 회장을 맡았으며, 이후 대한소아과학회, 대한가정의학회, 대한의공학회, 대한순환기학회, 한국소아심장연구회, Asian Society of Pediatric Cardiology 등의 회장을 역임하면서 각 학회의 발전을 도모했다.

병만 고치는 소의(小醫) 보다 사회를 고치는 대의(大醫)가 되어 달라.
    그는 아픔을 보듬는 소명을 가진 의사들이 사회적 책임을 방기해서는 안 된다는 소박하지만 굳건한 믿음을 의업의 근본정신임을 매사에 강조했던 의학계의 큰 스승이었다. 
    새로운 의료 기술 도입에 앞장서며 아픈 사람이 없는 대한민국을 꿈꿨던 대의(大醫) 홍창의. 정부는 그에게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의 명예를 헌정하며 업적을 칭송했다.     
    국민의 건강권이 더 평등한 사회에서 더 보편적으로 지켜지길 기대했던 그의 바람은 후학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아픈 세상에서 의업의 근본정신을 지키며 온 몸으로 이야기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