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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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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사 연구를 통해 한국 전통천문학의 우수성 증명

현대천문학과 지구과학 교육의 기틀 마련한 선구적 과학자 유경로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38 천문학사 연구를 통해 한국 전통천문학의 우수성 증명 현대천문학과 지구과학 교육의 기틀 마련한 선구적 과학자 유경로 학자의 길을 걸으며 조국의 천문(天文)을 밝히다

학력: 1936 경성사범학교 졸업, 1949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물리학과 졸업 1963 미국 인디애나대학 대학원 이학석사(천문학) / 경력:1958 ~ 1982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1979 ~ 1982 서울대학교 과학교육연구소 소장, 1968 ~ 69, 1974 ~ 76 한국천문학회 회장, 1973 ~ 1974 한국지구과학교육회 초대 회장, 1985 ~ 1987 한국과학사학회 회장 / 포상:1982 국민훈장 동백장,    1985 한국천문학회 창립 20주년 기념 공로상

공부하는 사람은 돈 욕심을 버려야 한다. 돈을 알면 공부를 못해.우리나라 천문학사 연구의 태두인 유경로 교수는     참 선비의 자세로 학문의 길만 우직하게 걸었던 과학자였다. 
    그가 항상 제자들에게 당부했던 말은 학자의 길을 걸어갈 때, 부와 명예를 따라 움직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학자의 양심에 따라 일생을 살며 뜨거운 열정을 발산한 과학자 유경로. 그는 천문학이라는 공통점이 있긴 하나 과학, 교육학, 역사학이라는 전혀 다른 세 학문에서 성취를 거두었던 융합적 탐구의 선구자이자 개척자였다.

유경로 교수는 1917년 경기도 수원군 성호면(지금의 경기도 오산시)에서 유병상과 홍만후의 2남 2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교원 양성학교였던 경성사범학교를 다녔던 그는, 동기생들 사이에서 장난꾸러기에 게으름뱅이로 소문난 학생이었다.     이유는 수업 시간에 집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특히 일본어 고전 시간에는 한 시간 내내 창밖으로 보이는 남산의 푸른 소나무만 바라보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암울한 시기를 견뎌야 했던 민족적 울분의 표시였다. 
    당시의 동기생들은 그를 이렇게 기억했다. 수학 시간에 교사의 설명은 안 듣고 교과서로 혼자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학업에 의욕이 없었던 나태한 학생이었을 뿐, 불량 학생은 아니었다.    
    용광로처럼 들끓던 배움을 향한 열정도 일본인 교사 밑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던 시대적 상황 앞에선 식어버리기 일쑤였다.


    01 경성사범학교 졸업, 02 대구수창보통학교 교사, 03 오산중고등학교 교감, 04 홍익대 물리학과 조교수, 05 서울대 사범대학 교수 /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대구 수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 그는 
    학생 시절 하지 못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1949년 서울대 사범대학 물리학과 졸업 후 교감으로 가게 된 오산중·고등학교에서 교육의 이상을 꿈꾸며 젊음을 불태웠다.     
    교감으로 있으면서 서울대 사범대학에 출강했던 유 교수는 1955년 홍익대학교 물리학과 조교수로 부임하였고, 3년 뒤에는 서울대 사범대학 교수가 됐다.


    1995년 서울대 천문학 강의 개설, 현대 천문학 교육 시작 / 
    그가 두각을 처음 보였던 건 천문학 분야였다. 
    유 교수는 1955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서울대에 천문학 강의를 개설하며 천체물리와 천문관측법 등의 현대 천문학 교육을 시작했다.    
    그러나 전문적으로 천문학을 배운 적이 없었던 그로서는 수준 높은 교육을 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유 교수는 1961년 미국으로 건너가 인디애나대학 대학원에서 천문학과 천체물리학을 배우고, 미국 로웰(Lowell)천문대에서 천문관측에 관한 연구를 수행한 후 귀국한다.

국립천문대가 전신인 한국천문연구원 항공사진(출처:천문연)
    유 교수는 미국에서 학습한 경험을 토대로 대학에 선진적인 천문학 교육체계를 마련했으며, 많은 천문학도들을 길러냈다. 
    이밖에도 그는 1967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국립천문대 건설위원으로서 천문대의 위치 선정 및 망원경 도입 사업에 참여했고, 1965년에는 한국천문학회를 창설해 한국 천문학 발전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의 선구자적 면모는 지구과학 교육 분야에서도 볼 수 있었다. 
    유 교수는 1959년 서울대 사범대학에 지학과(후에 지구과학교육과)를 창설, 우수한 인재 양성에 앞장섰다.     
    또한 그는 지구과학을 중등 과학교육 과정에 포함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에 초·중등 과학교육 과정 개발과 교사 재교육 등에 힘을 쏟았고, 1973년에는 한국지구과학교육회도 창설했다. 
    이 같은 지구과학 교육 발전을 위한 그의 전방위적 활동 덕분에 오늘날 지구과학은 중등 과학교육에서 필수 교과목으로 자리잡게 됐다

(좌)칠정산 내편 상,중,하 사진 (우) 칠정산 외편 사진(출처:서울대 규장각) /
    무엇보다 그의 뛰어난 재능은 천문학사 연구에서 빛을 발했다. 
    열성적으로 가르쳤던 제자들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70년대 무렵부터 귀국하기 시작하자, 그의 관심 분야는 현대 천문학에서 동양과 한국의 천문학사로 옮겨갔다.     
    당시 한국 천문학사 연구는 불모지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유 교수는 이에 굴하지 않고 1973년 이은성, 현정준 교수와 함께 조선의 천문과 역법을 체계화한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과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의 역주를 편찬하며 한국천문학사에 기념비적 연구성과를 남겼다.

우리에게 맞는 우리의 천문역법이 필요 / 
    칠정산은 세종시대를 대표하는 역산서(曆算書)로 그 내용이 현대 천문학적으로 어떻게 해석되는지 당시까지만 해도 연구된 적이 없었다. 
    15세기의 천문학과 역산학의 용어를 현대적 의미로 풀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 교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와 제자들은 홍릉의 세종대왕기념관에서 역산서를 해석하기 위해 골몰했다.

작업은 칠정산내편을 번역하고 계산한 뒤, 주석을 달고 그림으로 도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중국과 일본 학자들의 관련 연구 서적들을 샅샅이 읽고 분석했으며, 한문사전을 찾아 하나 하나 확인해 나갔다. 
    그래도 이해하기 힘든 개념은 『칠정산내편』에 나오는 숫자를 역계산해 찾아냈다. 공동 작업은 끝없이 계속됐다. 여름방학에도 무더운 연구실에서 선풍기를 벗 삼아 지루한 싸움을 이어갔다.

철저한 공동연구로 편찬된 역주는 조선 천문학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다. 
    또한, 본격적인 한국천문학사 연구의 초석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
    그는 이후에도 과학사학자들과 함께 증보문헌비고 상위고(增補文獻備考 象緯考), 서운관지(書雲觀志) 등 천문학의 고전들에 대한 번역 및 주해 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했고, 국외에서 이루어진 연구성과를 소개하기 위해 번역서인 중국의 천문학을 출판하기도 하는 등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 천문학사 연구에도 선구적 역할을 했다.

한국과학사학자 전상운 전 성신여자대학교 이사장은 
    자신의 책 한국 과학사의 새로운 이해 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조선 초기 과학기술서의 연구에서 가장 훌륭한 성과는 1970년에 들어가면서 수년간의 노력 끝에 이루어진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의 역주 작업이었다. 이 연구는 지금까지의 한국 천문학사 및 문헌 연구에 있어서 최대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유경로 교수 정년퇴임 기념고별강연 당시 찍은 기념사진
    정년퇴임 후에도 그는 한국과학사학회장을 역임하며 학회 발전을 이끌었고, 1989년 이후에는 동양과학사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과 중국의 천문학사를 전수하여 많은 후학을 양성했다.     
    천문학사연구소를 설립하라는 유지에 따라 설립된 소남(召南)천문학사 연구소는 한국천문학사 연구에 중요한 이정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유경로 교수는 우리나라 현대천문학의 기틀을 마련하고, 지구과학 교육을 선도하며, 한국천문학사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연 학자였다.     
    그에게 넘쳐났던 건 학문적 열정이었으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그것을 잃지 않았다. 
    유 교수는 병으로 쇠약해진 후에도 연구와 독서, 집필 활동을 계속했고, 후배 학자들을 끊임없이 독려하며 그들과의 토론을 즐겼다.     
    새로운 것을 공부하고 연구하기를 즐겼던 진정한 학자 유경로. 그는 한국천문학사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연 학문의 초석으로, 과학기술유공자의 이름으로 우리 곁에 길이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