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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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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혁신으로 한국을 반도체·통신 강국으로 이끌다 - ㉜ 윤종용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㉜ ‘전자산업의 쌀’을 재배한 ‘반도체 농부’ 윤종용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이사장

메모리 및 TFT LCD 부문 세계 1위로 성장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 수행 미래 경쟁력 강화위해 인재양성 매진…‘해가 지지 않는 연구소’ 운영

‘세계 최고경영인 17인’에 선정(비즈니스 위크) ‘영향력이 큰 아시아 기업인 1위’에 선정(포츈) ‘한국의 기수(Kores’s flag bearer)’(포브스)
메모리반도체와 LCD 부문을 세계 1위로 성장시켜 수출 강국 한국을 만들고, 
자신이 몸담고 있던 기업을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게 한 윤종용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이사장.
그는 변화무쌍한 경영환경에서 시대의 흐름을 꿰뚫으며 삼성전자라는 거함을 이끌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전략가였다. 기술을 파악하고 흐름을 예측하는 능력이 없으면 
경영을 할 수 없는 시대에 윤 이사장은 테크노CEO의 표본이 됐다.
끊임없는 기술혁신으로 초일류 대한민국을 꿈꿨던, 영원한 청년 윤종용.
그가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은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윤종용 이사장은 1944년 경북 영천의 한적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한문에 조예가 깊었던 어머니와 큰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아침마다 한학을 배웠던 그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천자문과 몽선습을 다 뗄 정도로 총명했다. 그는 호기심이 많아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기계를 좋아했던 윤 이사장은 특별활동으로 경북대학 사범대 부속중고등학교 과학반에 다니면서 모터와 광석라디오 같은 것을 만들어보곤 했다. 방과 후의 과학반 모임은 윤 이사장의 활력소였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아는 학생이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선생님의 간섭 없이 자신이 결정한대로 인생을 꾸려나갔다. 대학 진학 당시 전자공학을 선택한 것도 그의 의지였다. 기계과나 물리과를 추천한 선생님의 권유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앞으로 전자시대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1966년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한 뒤에도 그의 호기심과 책임감은 빛났다. 그의 첫 직장은 삼성 계열사였던 한국비료 공장의 건설현장이었다. 윤 이사장은 공장을 건설하고 시운전을 하는 2년 동안 공장의 구조와 시스템 운영 방법 등을 배우며 현장 경험을 쌓았다. 그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어려워도 포기하는 일이 없었다. 자신의 성장을 위해 집중했던 그는 조금씩 능력을 인정받으며 올라갔다. “신입사원일 때였지만 값진 경험이었다. 이후 업종은 달라졌지만
그때 배운 것이 CEO로서 삼성전자를 경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이코노미조선 인터뷰 기사 중)

윤 이사장이 삼성전자와 인연을 맺은 건 입사하고 3년이 지난 후였다. 그는 삼성그룹이 신규사업 개발을 위해 삼성물산 내부에 조직한 ‘개발부’에 합류했다. 신규사업 중 전자 사업 부분에 배치된 그는 일본이나 미국의 제품을 연구하며 구조를 파악하는 데 힘썼다. 선진국의 전자제품을 제대로 모방하는 것조차 어려웠던 그때, 윤 이사장은 이 작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존재감을 입증하기 시작한다.

1970년대 초, 삼성은 반도체와 컴퓨터, TV, VTR 등을 성장동력으로 내세우려 했다. 윤 이사장의 능력을 높이 샀던 이병철 회장은 그에게 TV 설계를 맡겼다. 그러나 기술력은 부족했고, 배울 수 있는 곳도 국내엔 없었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윤 이사장은 온갖 현장을 다니며 귀찮을 정도로 물어보고 배웠다. 친해지기 위해 업무가 끝난 후엔 함께 술을 마시며 감정을 나눴다. 그의 피나는 노력 끝에 삼성은 1975년 처음으로 국산품 흑백TV를 국내에 출시한다. 일본 제품보다 훨씬 가격이 저렴했던 삼성 TV는 잘 팔려나갔다. 당시 품질은 논외의 것이었다.

그는 발명가였다. 무(無)의 맨땅에서 헤딩하는 일이 반복됐다. 고사양인 컬러TV를 만들 때도 그는 혼자였다.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혼자 터득하고 깨달아야 했다. 외국 대학교 도서관을 자기 집처럼 찾아다녔고, 교수들에게도 넉살좋게 다가갔다. 그렇게 개발한 제품들이 나올 때 마다 그 기쁨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흑백TV와 컬러TV를 성공적으로 개발한 그에게 이병철 회장은 ‘이사’의 중책을 맡긴다. 그때 그의 나이 33세였다.

그러나 기술개발의 부침은 그를 지치게 했다. 당시 최첨단 기계에 속하던 VCR의 더딘 성장이 문제였다. 
책임자였던 그는 삼성전자를 그만두고 1986년 네덜란드 필립스 본사로 떠난다. 그가 다시 귀국한 건 이건희 회장이 취임하고 몇 달 뒤였다.
이 회장이 주창하던 ‘제2의 창업’을 위해선 혁신가 윤 이사장이 필요했다.
그는 이 회장의 비호 아래 삼성전자 안에서의 기술 혁신을 주도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1993년 ‘영상산업의 꽃’이라 불리는 TFT LCD 사업에 진출해 세계 최초로 14.2인치 VGA TFT를 개발하는 성과를 이룩한다. 이후 그는 삼성전자 가전 부문 대표이사 부사장(1990년), 삼성전기 사장 (1992년), 삼성전관 사장(1994년)을 맡으며 삼성의 대표 CEO로 인정받는다.

그가 사장으로 취임한 1994년 당시만해도 삼성전관(현 삼성SDI)은 매우 안정적인 매출 구조를 자랑하고 있었다. 세계 1위의 브라운관 덕분이었다. 그러나 시장은 점점 새로운 것을 원하고 있었다. 혁신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그 때, 삼성전관은 상황에 안주하며 변화를 멀리하고 있었다. 세계 1위라는 타성에 젖어있던 삼성전관의 업무 흐름은 비효율적으로 느슨해져 있었다. 그는 공학도의 눈으로 프로세스를 들여다봤다. 일단 업무 흐름에 누수가 많았다. 윤 이사장은 업무 흐름상의 비효율 요인을 제거하는 PI(Process- Innovation)에 집중했다. 빠른 프로세스만이 답이었다.

윤 이사장은 PI 정착을 위해 선진기업들이 사용하는 ‘SAP R/3’를 도입했다. ‘SAP R/3’는 독일 SAP사가 개발한 소프트웨어로, 미국 초일류 기업들이 도입해 사용하고 있던 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정보를 실시간으로 연결하면서 중복 입력을 차단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을 도입하려면 우선 업무 전반의 표준화가 진행돼야 했다. 그는 제품 코드에서 회계 과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업무 요소를 표준화했다. 그 결과, 보통 60일 정도 소요됐던 주문에서 출고까지의 과정이 9일로 줄어들었고,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부가가치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혁신은 반발을 불러오게 마련이었다. 회장의 뜻도 거대한 조직을 변화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는 1995년 말 삼성 일본본사 사장으로 이동했다. 회사의 주류에서 멀어졌다는 섭섭함도 있었지만, 위기를 기회로 삼고자 했다. 더 넓은 일본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가 삼성전자로 다시 돌아간 때는 IMF로 삼성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을 때였다.
이 회장의 부름에 윤 이사장은 1996년 삼성전자 총괄사장으로 복귀했고, 가장 우선 혁신을 주도했다. 특히 그는 반도체, 휴대전화, 첨단 디지털 가전을 3대 축으로 내세우며, 삼성을 바꿔나갔다.

혁신을 위한 노력의 결과는 2년 만에 구체적인 수치로 나타났다. 13조 원이었던 차입금이 6조 원으로 줄었고, 연간 2조 원 가량의 비용이 절감됐다. 반도체, 휴대전화, 첨단 디지털 가전의 삼각편대를 완벽하게 꾸려 성장동력을 키워간 삼성전자는 2000년 매출 43조5,278억 원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재기했다. 또한, 그는 고부가가치 디스플레이 시장을 선점하며 세계를 휘어잡았다. 2001년 당시 TFT LCD 기술의 한계로 알려졌던 30인치를 극복하고, HDTV 대응 40인치 WIDE-XGA를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후발업체에 불과했던 삼성전자가 8년 만에 세계 최고 성과를 이루면서, 국내 기술의 수준은 한 단계 더 올라서게 됐다.
기술 개발을 통해 삼성전자를 메모리분야 세계 1위 및 TFT LCD 부문 세계 1위로 성장시킨 그는 명실상부 삼성의 히트맨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는 표준화와 관련해 체계적이고 강력한 정책을 실행해 나간 리더였다. 표준화 추진 조직을 신설해 전략 방향을 제시하고, 신규 표준화를 조기 발굴해 주도적 대응이 가능한 프로세스로 정착시켰다. 또한, 표준화 단체 활동 및 국제회의 유치 등을 통해 국가 이미지 및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전략을 바탕으로 삼성전자는 ‘국제기술 표준화 연구회’를 구성해 체계적인 표준화 활동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MPEG-4, MPEG-7, DVD 분야에서 40건의 기술이 국제표준으로 채택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외에도 국내 업체로는 유일하게 MPEG LA(Licensing Administrator)에 가입해 수조 원의 로열티 수입도 받았다.

윤 이사장은 삼성전자 시절 권한위임형 CEO로 통했다. 수평적 프로세스로 책임과 권한을 부여하고, 자율적인 관리와 경영이 이뤄질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변화는 의사결정의 유연한 대처를 가능케 했다. 그의 혁신은 삼성의 우수 인력들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 평소 ‘사람 ’을 중요한 자원으로 생각했던 윤 이사장은 인재 양성을 위해 국내외 9개 연구소를 설치하고 ‘해가 지지 않는 연구소’로 운영했다. 우수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체제로 삼성의 미래를 보장하고자 노력했던 그의 선구안은 삼성전자가 우수한 인적자원을 보유하게 된 밑거름이 됐다.

삼성전자 부회장,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 회장, 전자부품연구원이사장, 한국공학한림원 회장, 국가지식재산위원회 민간위원장,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이사장 등 그가 지나온 길은 화려하지만 올곧았다. 엔지니어 출신 CEO의 표본답게 기술과 지식을 바탕으로 신화를 일궈왔고, 오늘날의 대한민국 과학기술을 성장케 했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변화를 위해 물러설 줄 아는 진정한 리더, 윤종용. 정부는 그가 과학기술계 발전에 이바지한 업적을 기려 과학기술유공자의 명예를 공헌했다. 끊임없는 혁신으로 기업의 발전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했던 그의 발걸음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