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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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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약학(藥學)의 독립을 이루다 - ㉚ 故 한구동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㉚ 한국 현대 약학의 창시자 故 한구동 서울대 명예교수

환경 및 식품 위생 연구로 약학 근대화의 기반 조성 초창기 약학 교육의 기틀 마련…영양학적 연구 활성화 기여

과거와 다르게 21세기의 약학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진화하고 있다. 신약개발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가 신약기술을 수출하는 경지에까지 도달한 지금, 제약산업은 장차 우리나라의 주력 먹거리 산업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나날이 성장 중이다. 분명한 목표를 지향하는 만큼, 연구의 수준도 높아지고 있다.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은 오래전부터 세계 약학대학 중 많은 수의 논문을 발표하는 대학으로 좋은 평가를 받아왔다. 또한, 많은 SCI급 논문을 보유하며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거엔 어땠을까. 모든 학문의 처음이 그러하듯, 약학의 존재감은 아주 미미했다. 한구동 박사는 약학이라는 학문의 존재를 우리나라에 각인시켰던 첫 번째 과학자였다. 그는 우리나라 약학 근대화의 기반을 구축하고, 약학교육의 기틀을 마련해 학문이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대한민국 약학의 아버지, 한구동 박사는 선구자이자 창시자였다.

한구동 박사는 1908년 서울 종로구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던 그는 고등보통학교(일제강점기의 중등교육기관)를 졸업하고도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일본 관비 유학까지 포기했던 속 깊은 아들이었다. 하지만 학업에 대한 열정을 꺾기란 그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박사는 선뜻 학비를 지원하겠다는 친척 어르신의 권유로 학업의 뜻을 이어가기로 마음먹고, 이후 조선약학교(현재 서울대 약대)에 입학한다. 입학 시일이 너무 지난 탓에 들어갈 수 있었던 학교가 조선약학교 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 박사와 약학의 관계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조선약학교에 들어간 그는 한동안 운동에 빠져 살았다. 특히 야구를 좋아했던 한 박사는 선수로 뛰며 여러 번 우승의 감격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졸업 후 어려웠던 집안 살림을 도맡아야 했던 그는 학업을 계속 이어갈 수 없었다. 결국 한 박사는 공부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는 조선총독부위생시험소에 취직하게 된다. 위생시험소는 순수한 연구기관이라기보다 행정 기관의 성격에 더 가까운 곳이었다. 입소 1년간 그가 했던 업무는 약품제조허가를 내주는 데 필요한 약품 검사와 나병 환자 치료제로 쓰였던 약을 만들어 소록도로 보내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위생시험소장으로 있던 일본인은 무척이나 학구적이었다. 그는 틈만 나면 행정 업무가 아닌 본격적인 연구를 해보자고 직원들을 격려했고, 당시 방 한 칸에 불과했던 시험소를 확장해 제대로 된 연구소를 마련하는 데도 힘썼다. 연구 의욕이 왕성했던 한 박사는 이러한 변화가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우리 민족의 식생활과 위생문제를 다루는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상황에서 한국인의 위생과 영양에 대해 조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학문을 위한 그의 열정은 대단했다. 영양 관계 연구는 전국을 조사했을 정도였는데, 실제 부엌에 들어가 요리를 해서 먹어보는 등 우리나라 영양학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155종에 달하는 국식품과 161종에 달하는 야생식용식물의 영양학적 성분을 연구해 영양 가치를 밝힌 연구 논문은 우리나라 식품영양학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한반도에 있는 총 41개소에 달하는 온천의 함유성분을 규명한 연구는 각 온천의 화학적 성질과 치료적 이용의 척도가 될 수 있는 효능을 밝혀낸 매우 귀중한 연구로 손꼽히고 있다. 한 박사는 이 조사를 위해 전국에 있는 온천을 모두 답사하며, 우리 몸에 미치는 효과를 하나씩 꼼꼼하게 검토하며 연구를 진행했다. 이밖에도 한국인 1,088명을 대상으로 한 미맹의 분포에 관한 연구를 비롯, 20여 편에 달하는 식품 및 환경 위생분야에 대한 조사연구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당시 매우 열악했던 국민보건 향상에 크게 이바지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던 그의 연구는 광복 이후 한국 약학 발전의 기초가 됐고, 그는 일본인 위주의 약학계에서 독보적 연구 성과를 낸 유일한 한국인 학자가 됐다.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은 한 박사는 해방을 맞은 후 위생시험소를 인계받아 소장이 됐고, 시험소는 보건후생부 산하의 국립화학연구소로 개칭하게 된다. 당시 위생 분야에서 화학을 주로 맡아 하게 된 것이 개칭의 이유였다. 한 박사는 연구소의 초대 회장으로 부임했지만, 이듬해 모교인 경성약전(조선약학교 후신)이 서울약학대학으로 승격되자 교수로 자리를 옮겼고, 이후 1950년 국립서울대 약대로 개편되면서 자연스럽게 초대학장으로 취임해 11년간 학장으로 재직하게 된다.

그는 학생들의 든든한 울타리였다. 대학 교수로서 우리나라 약학 교육이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도왔다. 해방 이후 사상이 분열됐던 시절 휘둘리지 않고 교육과 연구에 헌신했고, 6.25 전쟁 중에도 대학을 지키며 방황하는 학생들을 이끌었다. 특히 그는 문제에 대한 본질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강의법으로 학생들의 공부를 지원했다.

“선생님 강의논법은 참 특이했어요. 쭉 설명을 한 뒤 꼭 ‘이건 왜 이런 것일까’하면서 본질적인 문제를 되묻곤 했지요.”(한덕룡 중앙대 명예교수, 중앙일보 인터뷰 기사 중)
“강의에 도취하신 분 같았어요. 제자들과 나누는 토론이라면 하루종일 좋아하셨고요. 밥벌어 먹으려고 강의하신게 아니라 학문이 즐거움이자 인생 그 자체였던 분이셨어요.”(한병훈 서울대 명예교수, 중앙일보 인터뷰 기사 중)

그는 강의 틈틈이 좋아하는 연구를 계속했다. 특히 혈압강하, 항염증 효능이 탁월한 ‘희첨’의 성분 연구는 그의 대표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 한 박사는 1963에 ‘희첨의 디텔페노이드 성분에 관한 연구’로 서울대에서 약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68년엔 연구 내용의 학술적 가치를 높게 평가받아 미국생약학회 제9차 연례학술대회에 초청되어 강연하기도 했다.

이때 그의 발표를 눈여겨본 이탈리아 밀라노대학교 약리학연구소 소장 Tarabucchi 교수가 유기화학연구소에 한 박사를 초청했고, 이후 일류 연구진과 협력해 공동연구를 수행하기도 했다. 연구 결과는 영국의 권위 있는 학술지에 발표됐으며, 그는 이 연구를 집대성해 1971년 대한민국학술원 저작상을 수상했다.

한 박사의 연구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는 서울대 약대학장과 서울대 천연물과학연구소의 전신인 생약연구소장을 겸직했을 때였다. 그는 한국특산 식물인 신나무 잎의 타닌(Tannin)에 관한 연구를 포함, 10여 편에 달하는 연구논문을 발표하며 왕성한 연구력을 내보였다. 특히 신나무 잎의 타닌 중 한 박사가 구조를 규명해낸 Polygagallin은 영국과 일본의 약학전문가도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던 물질이었다. 한 박사의 ‘Acerginnala Max에서 분리한 신 Tannin Polygagallin의 화학구조’ 논문은 학계에서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그는 약학계의 거두로 자리잡게 된다.

또한, 그는 대한약학회 재건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했다. 1930년대 말 유일한 약학 단체로 발족했던 조선약학회는 회장을 비롯한 간부진 모두 일본인이었다.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한 박사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해방과 동시에 극렬한 사상 충돌로 학회의 기능이 무실해지면서 이름만 면면히 이어왔던 상황이었다. 한 박사는 학회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52년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대한약학회를 재건한다. 초대 회장으로 추대된 그는 이후로도 15년간 회장직을 맡아 학회를 이끌었다.

이외에도 그는 학계의 주요 보직을 거치며 약학 분야 발전에 이바지했다. 세 차례의 약대학장과 다섯 차례의 대한약사회장 재임을 비롯해 대한민국학술원 평생회원으로도 위촉됐으며, 이밖에도 건복지부, 국방부, 교육부, 총무처 및 서울특별시 등의 심의 위원을 맡아 전방위적으로 활동했다.
또한, 황조소성훈장, 8·15 해방 기념 학술문화훈장, 제3회 과학기술상, 대한민국 학술원상, 약학회 우수논문상 등을 수상하며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기도 했다.

대장암과 싸우면서도 삶의 전부였던 학문을 곁에서 놓지 않았던 그는, 2010년 10월 20일 9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한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약학자로 기록되고 있는 한구동 박사. 대한약학회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2003년 ‘녹암학술상’을 제정했으며, 정부도 그를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해 공적을 기리고 있다. 위선최락(爲善最樂)의 신념으로 연구와 교육에 헌신한 녹암 한구동 박사. 학문을 향한 한결같은 마음은 그가 떠난 뒤에도 후학들에게 전해져 오고 있다.“과학자들의 발견은 순수한 영감에서 나온다.
금전이나 명예를 탐하면 학문적 순수성을 가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