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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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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의료 선진화의 기틀을 마련하다 - ㉘ 故 윤일선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㉘ 근대 의학 연구의 초석 닦은 대학자 故 윤일선 서울대 명예교수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28 근대 의학 연구의 초석 닦은 대학자 故 윤일선 서울대 명예교수 대한민국 의료 선진화의 기틀을 마련하다. 한국 최초 병리학자로 병리학 탄생과 발전을 주도, 최초의 우리말 학술지인 «조선의보» 창간해 의료대중화에 기여

학문은 그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적인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발전하며, 연구자 집단은 그 관계 속에서 새로운 정보와 이론, 관점을 생산해내는 주체가 된다. 이것을 같은 집단, 혹은 상이한 집단의 학자들과 공유하면서, 학문의 기본 목표를 달성하게 되는데, 학자들은 이런 행위를 학술커뮤니케이션으로 총칭했다. 직접적인 소통이 어려웠던 시기, 학술커뮤니케이션의 매개체는 학술지였다. 전문적인 학술지의 등장은 국가의 근대화를 나타내는 지표가 됐다. 우리나라에선 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에야 최초의 우리말 학술지가 제작됐는데, 그게 바로 최초의 의학 학술지였던 ‘조선의보’였다. ‘조선의보’는 한국인 의학자 집단의 교류를 돕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그 중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병리학자 윤일선 박사가 있었다. 그는 한국 의료 선진화의 기틀을 세우고자 노력했던 시대의 과학자였다.

윤일선 박사는 1896년 일본 도쿄의 한 셋방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소학교를 다니다 1906년 귀국한 그는 우리말이 미숙했다.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던 그는 조부모와 함께 생활하며 우리말을 배우고 익혔다. 윤 박사가 의학자의 꿈을 꾼 것은 이때 즈음이었다. 그는 귀국한 다음 해, 어머니가 병마로 쓰러져 생을 마감하자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지켜주는 의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당시 의사의 사회적 희소가치가 높았던 것도 이유가 됐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과학에 빠져들었다. 자연계 현상과 법칙에 호기심을 가졌던 윤 박사는 뉴턴의 법칙과 다윈의 진화론, 멘델의 법칙 등을 공부하며 자연의 진리를 찾는 데 골몰했다. “새삼 돌이켜 보니 중학교 때부터 물리·화학 등 자연과학 공부에 취미가 있었던 나로선 의학 전공이 우연이 아닌 듯싶다”(「원로과학기술자의 증언-윤일선 박사편 «上»」, 55쪽) 배움을 향한 꿈에 1915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오카야마에서 제6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19년 교토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 윤 박사는 의학부에 입학한 78명 중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교토제국대학 의학부에는 일본의 유명 병리학자였던 후지나미 아키라 교수가 재직하고 있었다. 독일의 저명한 병리학자 루돌프 피르호의 제자이기도 했던 후지나미 교수는 문하생으로 들어온 윤 박사를 많이 아꼈는데, 윤 박사 역시 병리학을 택하는 데 있어 후지나미 교수의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할 정도로 관계가 밀접했다. 돈이 없어 대학원에 갈 수 없었던 그는 대학 졸업 1년 후, 후지나미 교수의 도움으로 등록금을 마련한다. 그는 그때부터 ‘피로와 종양발육과의 관계’, ‘라놀린 사육이 가계육종에 미치는 영향’ 등의 연구를 주도했으며, 이후 ‘임상진단과 병리해부학적 진단의 대비’ 연구로 첫 논문을 발표했다.

후지나미 교수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아 한국인 최초 병리학자가 된 윤 박사. 그러나 그는 심한 설사병 탓에 1925년 9월 자퇴원을 내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약 1년간 요양한 그는 후지나미 교수의 소개로 경성제대 의학부 병리학교실의 부수(副手)로 채용된다. 이곳에서 그는 ‘조선에 있어서의 휠라리아에 인한 상피병’을 연구하여 ‘조선의학회잡지’에 발표한다. 1928년 경성제대 의학부 조교수로 임용된 그는 한국인 최초의 제국대학 교수가 됐다.

1927년부터 세브란스의학연합전문학교(현 연세대 의대 전신)에 출강했던 그는 1929년부터는 아예 자리를 옮겨 세브란스의전의 병리학 교수가 됐다. 독일의 병리학자 루돌프 피르호의 제자 후지나미 교수에게서 교육을 받은 그는 현대 병리학의 기준에서 볼 때 한국 최초의 병리학자라 할 수 있었다. 윤 박사는 학술 분야에서 활약하던 일본인들의 독주를 깨고, 우수한 한국인 대학원생들과 함께 연구를 진행해, 수많은 성과를 이뤄냈다.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병리학을 비롯한 기초의학의 기틀을 정립하는 일이었다. 윤 박사는 우선 연구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며 도서관 정비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당시 그의 도서관 건립 의지는 실로 대단했는데, 모든 비용을 직접 부담하며 미국, 유럽, 일본 등지에서 의학전문 서적을 들여왔을 정도였다. 또한, 동물실험동 신축과 연구실 제도 도입으로 연구 분위기를 향상하는 데 노력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세브란스의전 병리학교실은 의학교육에 본격적인 연구 시스템을 도입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윤 박사 역시 한국인 최초로 실험동물을 이용해 알레르기와 내분비 관계를 연구한 최초의 병리학자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윤 박사는 많은 활동에도 연구를 게을리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주 분야였던 과민증과 악성종양의 연구를 위해 유럽, 중국, 미국의 많은 대학을 방문하며 연구에 대한 동향을 살폈는데, 미국록펠러연구소에서는 유두종 바이러스를 분양받아 실험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의 연구실은 유독 강도 높은 연구 활동으로 유명했는데, 업적 면에서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의 학자적 정직성과 열성, 그리고 노력이 뒷받침된 결과였다.

뛰어난 성과 덕분에 그의 연구생들은 전문 의학자로서의 입지를 닦을 수 있었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렸던 故 이영춘 박사도 그의 제자다. 그는 1935년 우리나라에서 수행한 연구로 교토제국대학의 학위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었는데, 당시 신문에 보도될 만큼 화제가 됐었다. 이밖에도 1961년 정년퇴임 전까지 그의 밑에서 수학한 제자들만 130여 명에 달했으며, 그가 지도한 논문도 260여 편이나 됐다.

인적 자원의 중요성을 일찍 파악했던 그가 조선의사협회 창립을 주도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윤 박사는 이 단체에서 기관지였던 순수 한국어 학술지 ‘조선의보’의 첫 편집인으로 활약했다.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 종합학술지였던 조선의보는 국내는 물론 세계 각국의 대학과 의학 단체에 보내졌는데, 해외로 보내진 것만 따져도 50여 곳이 넘었다.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해산된 조선의사협회는 1947년 5월 창립된 조선의학협회의 모태가 됐다. 윤 박사는 1948년 조선의학협회 제2대 회장으로 취임하여 어려운 시기의 조선의학협회(현 대한의사협회)를 이끌었다.

한국인 최초로 우리말 논문을 조선의보에 게재하기도 했던 그는 국내에서 발표된 논문을 해외에 알리고 외국 학자들의 연구논문을 소개하는 등 의학 연구 발전을 위해 힘썼다. 윤 박사 역시 1927년부터 1945년까지 53편에 달하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의 논문은 영어, 일어, 한국어로 일본병리학회지, 일본미생물병리학회지, Acta Medicinalia in Keijo, The China Medical Journal, 조선의보 등에 게재됐다. 또한, 1947년엔 국제암학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는데, 당시 ‘한국인 癌에 관한 통계학적 연구’와 ‘안드라퀴논을 투여하여 발생한 토끼의 위암’을 발표하며 주목받았다. 이중 한국인 암에 관한 논문은 1948년 미국의 유명학술지인 ‘Cancer Research’에 게재됐는데, 이는 국제 의학계에 우리나라 의학을 처음 알린 첨병이 됐다. 윤 박사의 대내외적인 활동으로 근대의학이 우리나라에 안착할 수 있었다.

해방 후에는 경성대학 의학부장,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서울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하며 우리나라 초기 의학교육뿐만 아니라 대학 교육 전반의 체제 정립을 주도했다. 1956년 서울대 6대 총장에 임명된 그는 1961년까지 5년 3개월간 일하며, 최장수 재직 기간을 달성한다. 그의 기록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특히 윤 박사는 1954년엔 조교수 이상의 투표로 서울대 부총장에, 1956년엔 교수 200명 중 181명이 찬성하여 서울대 총장에 취임했는데, 이는 곧 교수와 학생들이 직접 선출한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의 서울대 정상화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중 미국의 미네소타대학교와의 협력을 통해 추진한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한국 의료 선진화의 기틀을 마련한 ‘신의 한 수’가 됐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한국전쟁 후 미국이 진행한 서울대 재건 프로그램 중 하나로, 1954년 협정을 체결하여 이듬해 1955년부터 1962년까지 진행됐다. 7년간 서울대 교직원 226명이 미네소타주립대에서 연수를 받았고, 이를 통해 서울대 의대 및 한국 의학계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낼 수 있었다.

윤 박사는 과학 발전에도 관심이 많았다. 해방 직후, 과학성의 설치를 제안한 것도 그였다. 그는 대한민국학술원 초대 원장, 한국과학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과학 전반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이밖에도 그는 국내에 원자력 의학이 처음 도입될 때 원자력병원의 초대 원장으로 임명되며, 우리나라 방사선 치료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1964년과 196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된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에는 두 차례나 한국 대표로 참석하며 원자력 의학의 저변 확대를 위해 힘썼다.

총장 재직 시절에도 강의를 쉬지 않았던 그는 교육자이자 학자로서 삶을 살아내고자 했던 시대의 참스승이었다. 수많은 정치권의 영입 제의도 뿌리치며,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던 윤 박사는 1987년 6월 22일 향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타계하는 날까지 과학 발전을 위해 애썼던 그의 업적을 인정해 과학기술유공자의 명예를 헌정했다. 다소의 재능보다 사람됨을 중시했던 대학자, 윤일선. 그가 평소 강조했던 교육이념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과학자들에게 지침이 되고 있다. “인격이 결여된 자는 학문을 할 자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