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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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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힘으로 '제3의 불'을 피워내다 - ㉔ 이창건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㉔ 한국형 원전 개발 이끈 1세대 원자력공학자 이창건 한국원자력문화진흥원 원장

도전과 성공의 대한민국 원자력 연구개발 역사 60년 90세 현역의 무한한 원자력 사랑

2009년 12월, ‘한국형 원자로’로 처음 중동에 수출된 UAE 바라카 원전은 한국이 원자력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발판이 됐다. 이후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에 수출된 소형 모듈 원자로인 ‘스마트(SMART)’는 세계 원전 시장에서의 한국의 경쟁력을 한층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UAE를 방문했던 문재인 대통령도 제3국 원전사업 진출을 적극 지원하며, 과학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에너지원이 제로였던 대한민국이 원전 수출 역량을 갖추게 되기까지 
아무것도 없었던 허허벌판에서 ‘제3의 불’을 지펴낸 이들이 있다. 그중 1세대 원자력공학자인 이창건 박사는 한국형 원전 개발을 위해 삶을 헌신한 원자력계 대표 과학자로 손꼽힌다.

“1950년대 후반, 전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무엇이든지 해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원자력은 최선이었다.” - 이창건 한국원자력문화진흥원장, 제2기 원자력엘리트스쿨에서 -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엄청난 파괴력을 보였던 원자력은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1950년대에 들어서며 다른 시각이 제기됐다. 1953년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국제연합(UN) 총회에서 ‘평화를 위한 원자력’이라는 연설을 하며 ‘원자력은 에너지원으로 인류에게 큰 이익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우리 정부도 원자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인당 국내총생산이 70달러였던 시절, 나라에서 한 명당 6000달러 이상의 유학비를 지원해 미국과 유럽에 학생들을 보냈다. 이들이 바로 한국의 원자력 1세대들이다.

이창건 박사 역시 유학생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국가 재건에 필요한 기술 중 하나가 바로 원자력’이라는 신념으로 공부에 몰두했다. 이 박사는 미국의 아르곤국립연구소(Argonne National Laboratory) 산하 국제원자력학교에서 8개월 동안 수학한 후, 국가의 연구용 원자로 도입 계획에 따라 미국의 제너럴아토믹(General Atomic) 회사에 파견된다. 그는 한국인 최초 트리가(TRIGA) 원자로운전 면허를 취득해 귀국했다.

1959년 한국은 원자력 연구개발에 착수하기 위해 서울 공릉동에 제너럴아토믹사의 연구용 원자로 TRIGA Mark-Ⅱ*를 착공하지만, 실제 도입 과정은 쉽지 않았다. * 트리가 마크-2는 열출력 100kW(250kW)의 소형 연구로로 1962년 3월 가동을 시작하여 1995년 가동이 중단될 때까지 30여 년 동안 원자력 관련 연구를 활발히 수행했다. 2007년 부속시설 및 주변시설 해체를 완료했으며, 2013년 등록문화재 제577호로 지정되었다.

정부는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이 박사를 미국으로 파견했다. 3,000여 종에 달하는 부품 구매와 농축 우라늄 도입 문제를 해결하라는 지시였다. 그가 혼자 주미 한국대사관에 머물며 매일 수십 종의 부품을 발주한 일화는 원자력 관계자들 사이에서 아직까지 회자되는 유명한 이야기다.

우라늄을 한국에 반입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미국의 원자력법에는 농축 우라늄을 포함해 특수 핵물질은 해외 판매를 금지하는 법이 있었다. 농축우라늄을 사지 못하면 핵연료를 만들 수 없고, 핵연료가 없으면 원자로 가동이 불가능해 사실상 사업 자체가 무산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묘안을 찾아낸 건 이 박사였다. 그는 “농축우라늄을 사지 않고 당분간 임대해 사용하되, 그 기간 동안 사용료를 지불하면 원자력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의 활약으로 농축우라늄은 무사히 한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그는 100kW였던 트리가 마크-2의 출력을 250kW로 증강하는데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원자력을 국산화하는 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당시 매년 외화에서 구입하던 중성자원(Neutron Source)을 재생식(Regenerative)으로 사용할 수 있게 설계해 제작했는데, 이는 원자력 국산화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가 낸 원자력관련 특허들은 현재 세계시장 공략의 발판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 유일의 발전 겸 해수담수화용 중형원자력발전소인 SMART 원자로를 개발했는데, 여기에도 이 박사가 고안한 기술들이 활용됐다.

국내 첫 원전인 고리(古里) 1호기 건설 때는 지도를 들고 전국의 입지를 물색하러 다닌 결과 경남 양산의 고리를 발견하기도 했다. 이 때 그가 사용한 방법은 우리나라 원전 부지 선정의 모델이 되어,
현재까지도 원전 부지 선정에 활용되고 있다.

이 박사는 한국 전력산업기술기준(KEPIC)을 제정하는 데도 헌신했다. 그는 KEPIC 제정을 20여 년간 주도하며 우리나라 전력산업기술의 표준화와 국제화에 이바지했다. KEPIC은 국내 원전, 화력발전에 적용되고 있으며, 현재 KEPIC에 의거한 UAE 바라카 원전 4기가 설계 ·제작·건설 중이다. 
이 기준은 우리나라 원전과 화력발전소 해외진출의 촉매제가 되고 있다.

국내 원자력학계 제1세대 원로로서 이 박사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이제 거의 없다. 그에게 원자력은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도 원자력에 대한 애착을 넘어서지 못했다. “과거의 그때로 돌아가도 다시 원자력을 선택할 겁니다. 기꺼이 미지의 낯선 곳으로 배움의 길을 떠났을 겁니다.”

구순의 나이에도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현장을 누비는 이창건 박사에게 국가는 ‘과학기술유공자’라는 명예를 헌정했다. 국가에 대한 열망으로 젊은 날을 기꺼이 바친 이창건 박사. 이 땅에 원자력이란 싹을 틔워 성숙기에 이르기까지 몸으로 부딪치며 뛰었던 시간들을 그가, 또 우리가 함께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