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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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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에 도전한 과학자, 우주에 한국의 별 쏘아 올리다 - ⑲ 故 최순달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⑲ 우리나라 최초 인공위성 ‘우리별’의 아버지 故 최순달 KAIST 명예교수

국내 최초의 우주기술벤처 창립 주도로 산업화에 이바지 TDX 교환기 개발로 전화 1천만 대 보급에 기여

1992년 8월 11일. 대한민국 최초 인공위성인 ‘우리별1호’가 우주로 쏘아 올려졌다. 우리별의 발사 성공으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22번째 위성보유국으로 도약하게 됐다. 우주 분야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가 인공위성 보유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우리나라 우주개발을 위해 남은 인생을 걸겠다는 마음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한 한 명의 과학자가 있었다. 당시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웠던 일에 도전한 故 최순달 박사, 그는 조국의 별을 위해 삶을 헌신했던 집념의 과학자였다.

1931년 대구에서 태어난 최 박사는 소년 시절 광석라디오를 접하면서 과학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을 키웠다. 그는 과학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자연스럽게 서울대 전기공학과에 진학했지만, 졸업한 시점인 1954년은 한국전쟁 후 혼란의 시대였기에 전기공학도가 취직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시 갈 곳이 없었던 대학 4학년 졸업생들에게 중학교 2급 교사 자격을 내줬는데, 월급이 적어 야간학교에 강의를 나가야만 최소 생활비를 벌 수 있었다. 한국에서 먹고 살 방도가 없었던 그는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당시 그의 수중에 있던 돈은 530달러가 전부. 항공료에 500달러를 쓰고, 단돈 30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은 혹독했다. 매일 새벽 5시까지 숙제를 하고, 바로 등교하는 일이 반복됐다. 쉬는 시간엔 빈 강의실 의자에 누워 잠을 잤고, 주말에는 접시닦이에 청소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치열하게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장학금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더 악착같아야 했다. 악바리같은 생활력은 아무것도 없던 그에게 유일한 자산이 됐다. 끈질긴 노력 끝에 최 박사는 미국 UC버클리대와 스탠퍼드대에서 각각 석·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미국 NASA 제트추진연구소(JPL)에서 7년간 연구원으로 일했고, 1976년 미국의 안정된 연구환경을 뒤로 하고 한국행을 택했다.

귀국 후 그는 국가 최초 민간기업 연구소였던 금성정밀연구소장으로 부임, 국방 유도무기 레이더 기술을 국산화하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981년 한국전기통신연구소(현 ETRI) 초대 소장에 임명된다. 이곳에서 그는 전전자교환기인 TDX 개발을 시작, 세계에서 10번째로 성공시켰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형 국책과제로 꼽히는 TDX는 '1가구 1전화' 시대를 열며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였고, 핵심 통신장비 시설을 국산 기술로 만들어내며 경험을 쌓은 연구원들은 
이후 우리나라가 ICT 강국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공헌했다.

TDX 개발의 시작은 정부의 요청이었다. 
당시 산업화와 함께 급증하기 시작한 전화 개통 수요로 적체 현상이 심각해지면서, 
정부 차원에서의 대안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1972년 1만3000여 건이던 전화 개통 적체 수가 1978년에는 60만 건에 가깝게 늘어났다. 신규 전화는 신청에서 설치까지 1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이에 정부는 농어촌 전화 현대화 계획을 세워 농어촌지역 시분할 방식 전자교환기 도입 사업을 추진했다. 정부는 당시 최 박사에게 연간 240억 원의 예산을 줄테니 TDX를 개발하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240억 원의 예산 집행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전기통신연구소 1년 예산이 24억 원이었고, 전자교환기 연구비가 1억6000만 원이던 상황에서 TDX라는 단일 과제 개발에 매년 50억 원씩 쏟아 붓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240억 원을 줄 테니 개발하라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연구소가 그런 것 안하면 뭐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거든. 그때 대화는 이런 식이었어요.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니 안 되면 어떻게 하냐고 해서 책임을 지겠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각서를 요구했어요. 실패하면 달게 처벌 받겠다고 쓰라고 해서 썼어요. 그래서 시작이 됐지요.”
- 과학과 기술 2010년 8월호, 과학 원로에게 묻는다 편 -

당시 정치권과 시민단체는 '무모한 국책사업에 돈을 쓰느니 차라리 한강 다리를 하나 더 놓으라'며 TDX 개발을 반대했다. 10억 원이 넘는 프로젝트는 방산 분야를 제외하고 거의 전무했으니 개발에 반대하는 것은 당연했다. 정부에 확신을 줘야 했던 최 박사는 오늘날 과학계에서 ‘TDX 혈서’라고 불리는 각서를 정부에 보낸다. '연구원 일동은 신명을 바쳐 TDX 개발에 최선을 다하되 실패하면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배수진의 각서였다. 각서를 전달한 후, 최 박사와 연구팀은 3년 만에 TDX 개발에 성공해 교환기 부족에 따른 전화 적체를 말끔히 해소했다. 
이로써 한국은 통신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의 업적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국내 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 발사다. 최 박사는 한국과학기술대학(후에 KAIST로 통합) 초대 학장 등을 거쳐 1989년부터 KAIST 교수로 재직했는데, 이때 우리나라의 첫 인공위성 개발의 산실인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가 설립됐다. 최 박사는 초대 소장으로 재직하며 우리나라의 인공위성을 만들기 위해 힘썼다. 인공위성 제작을 위해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우수 인력 양성이었다. 최 박사는 당시 인공위성 기술 분야에서 가장 앞서있던 
영국의 서리(Surrey)대학과 협의해 학생들을 유학 보냈다. 기초를 튼튼히 쌓고 연구를 시작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때 뽑힌 유학생들은 현재까지도 최 박사의 말을 잊지 못한다.

그의 말에 큰 울림을 받은 유학생들은 그때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인공위성 제작기술을 익혔다. 나사 하나를 닦고 돌리는 것조차 쉬이 넘어가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최 박사는 그들에게

최 박사는 우리별이 발사될 당시의 떨림을 잊지 못했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그때의 심경을 토해내기도 했다.
“1992년 8월 11일 프랑스령 기아나 쿠루 우주기지센터. 어둠이 가시지 않은 하늘에 환상적인 은빛 꼬리를 흘리며 날아오르던 발사 로켓은 수십 초 뒤 구름을 뚫고 사라졌다. 
숨 막히는 침묵과 기다림은 3단 로켓이 분리될 때까지 이어졌다. 마침내 미션콘트롤룸 안의 사람들이 환호와 함께 술렁였다. 한국의 우리별 1호 위성이 로켓에서 순조롭게 분리됐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는데 내 삶에서 가장 빛나는 기억이다.”

우리나라는 우리별 1호의 발사 이후 지속적인 연구개발을 통해 우리별 2호와 3호의 발사를 성공시켰다. 또 과학기술위성, 다목적위성, 통신위성인 무궁화 위성, 해양 및 기상관측 위성인 천리안 위성까지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위성 개발은 지금까지도 끊임없는 발전을 해오고 있다.
최 박사는 이후에도 인공위성센터 명예소장으로 일하며 연구원들과 함께 우리별 3호(1999년) 발사 성공까지 이뤄냈다. 우리별 발사 성공으로 우리나라는 인공위성 수출국으로도 발돋움하게 됐다. 위성기술의 불모지에서 위성수출국으로 성장, 발전하게 된 배경에는 최 박사의 우주개발에 대한 지대한 공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인공위성 개발 성공도 잠시, 1997년 시작된 외환 위기로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도 통폐합의 위기에 처하게 됐다. 초창기 인공위성 개발을 주도한 KAIST가 한국항공우주연구원과 통합될 위기에 놓이면서 인공위성 개발 주역들이 센터를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소형 위성 분야에서 독자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느낀 최 박사와 제자들은 인공위성연구센터를 퇴직한 후, 우리별을 쏘아 올리며 축적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국내 최초 인공위성 벤처기업인 ‘쎄트렉아이’를 설립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지만, 해외에서는 이미 우리별 위성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덕분에 쎄트렉아이는 회사 설립 이후 1년 만에 말레이시아에서 첫 위성 사업을 수주했으며, 싱가포르·터키·아랍에미리트(UAE)·스페인에도 잇따라 인공위성을 수출했다. 쎄트렉아이는 영국 서리대가 세운 ‘SSTL’, 유럽연합의 ‘에어버스’와 함께 세계 3대 소형 위성 제작 업체에 이름을 올리며 그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

“인간이 살아온 길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는 여정이다.” (최순달 자서전 중) 늘 새로운 것에 목말라 했던 그의 인생은 늘 한국 과학기술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았던 삶에서 그는 과학기술 불모지에서 대한민국을 인공위성과 정보통신 강국으로 만들어낸 과학자이자 지도자였고, 추진해야 하는 일 앞에선 망설이지 않고 결단을 내렸던 행정가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별을 쏘아 올린 인공위성의 아버지, 최순달. 그의 영전에 정부는 대한민국과학기술유공자의 이름을 헌정하며, 업적을 기렸다. 우주로 향했던 그의 꿈을 이제는 후학들이 이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