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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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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나이팅게일, 50년간 이웃을 보듬다 - ④ 故 김수지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④ 우리나라 간호 현장의 기틀을 잡은 국내 간호학 박사 1호 故 김수지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4-우리나라 간호 현장의 기틀을 잡은 국내 간호학 박사 1호 故 김수지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한국의 나이팅게일, 50년간 이웃을 보듬다. 세계적 간호이론 사람돌봄 이론 개발, 국내 최초 정신보건간호사 훈련과정 개설, 학력사항:1963년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간호학과 졸업, 1969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간호학과 이학석사, 1978년 보스턴대학교(Boston University) 간호학 박사, 경력사항:1984∼2006년 이화여자대학교 간호대학 교수, 2006∼2010년 서울사이버대학교 총장, 2011∼2015년 대양간호대학(아프리카 말라위 소재) 교장, 포상:2002년 국제간호대상(International Achievement Award) 수상, 2007년 플로렌스 나이킹게일 기장(The Florence Nightingale Medal), 2015년 한국여성지도자 대상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느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습니다. 손에 촛불을 든 백의천사(白衣天使)들의 경건한 맹세가 울려 퍼진다. 나이팅게일 선서식은 간호학도들이 임상실험을 나가기 전, 봉사와 희생 정신으로 이웃을 따뜻하게 돌보겠다는 간호 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자리다. 4월말이면 각 간호대학에서 나이팅게일 선서식이 열린다. 그 자리에는 교수, 선배, 가족들이 참석해 그들의 발걸음을 응원한다. 대한민국 간호계의 거목, 故김수지 박사 역시 어디선가 그들을 응원하고 있지 않을까.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 현장. 지역을 침탈한 반란군들은 주민들을 불러내 운동장에 줄지어 세웠다. 땅, 땅, 땅, 땅 자비 없는 총소리에 운동장이 적색으로 물들었다. 이데올로기를 이유로 집단 학살이 벌어진 비극의 현장. 생존의 위협 앞에 이웃은 무의미한 단어였다.

피난처에 조용히 숨어있던 사람들 무리로, 총살의 위기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청년이 실려왔다. 공포에 사로 잡힌 사람들이 그를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말할 때, 한 젊은 부인이 쓰러진 그를 밤새 정성스럽게 돌보았다. 청년이 가까스로 살아나자, 옆에서 줄곧 지켜보던 7살 소녀가 용기를 내어 부인에게 다가갔다. 아주머니, 뭐 하시는 분이에요? 응, 나는 간호원이야.

어린 소녀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었던 순간은 어느 간호사로 인해 박애와 기적의 기억으로 바뀌었고, 그날 이후 김수지 박사는 ‘이웃을 돌보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평생에 걸쳐 실현하게 된다. 2년 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김수지 박사는 9살 어린 나이에도 학교를 마치면 후송병원에 가서 카트도 밀고, 담배 심부름도 하고, 위문편지 대필을 하며 봉사했다.

1942년 전남 여수에서 7남매의 장녀로 태어난 김수지 박사는, 어머니가 두부와 콩나물을 길러 시장에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했다. 오직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학교 등록금을 제 때에 내기도 힘들었던 순간이 많았지만, 그 때마다 지인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성적이 우수해서 학교에서는 다른 학과를 추천했지만, 그는 무조건 간호학과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학시절엔 간호학을 배우는 것이 몹시 재미있어서, 집에 돌아오면 어린 동생들을 앉혀놓고 그날 배운 내용을 설명하고 실습하는 것이 일과였다. 실습시간마다 간호사복을 입고 병실에 들어가면 에너지가 넘쳤고,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심하게 살피고 돌보는 일에 행복감을 느꼈다.

그러나 곧 고민이 생겼다. 1960년대, 당시 사람들은 심하게 아파야 병원에 왔다. 병원에 왔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인 경우가 많았다. 당시 의료문화는 환자에게 병명을 알리지 않는 분위기였다. 환자는 “내가 어디가 아픈거냐” 묻지만, 주치의나 가족은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 환자들이 불안을 느낄 때 어떻게 간호해야 할 지 지침이 없었다. 특히 정신과에 근무할 때는, 간호사들의 역할이 약을 주고 지키는 것이 전부라는 것에 문제의식을 가졌다. 그가 정신간호학을 전공하고, 호스피스 케어(hospice care)*에 대해 공부하게 된 계기다. *호스피스케어: 임종기에 있는 노인이나 죽음이 임박한 환자에게 병고를 덜어주고 안락을 베푸는 치료를 행하는 것.

이후 남편의 유학으로 함께 떠나게 된 미국. 처음엔 미국에서 간호조무사, 간호사로 일했지만, 선진간호교육을 경험하고 싶은 열정은 보스턴대학교 대학원 진학으로 이어졌다. 영어도 익숙지 않고 생소한 용어가 많았지만, 가족들이 깨지 않도록 화장실에서 밤새 변기에 앉아 공부한 결과, 1978년, 그는 200명의 대학원 졸업생들 중 유일하게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학 박사학위였다.

귀국 후 김 박사는 국내 간호 지도자 양성 및 간호교육 발전에 매진한다. 연세대학교 간호대학에 국내 최초 간호학 박사과정을 설립하는 데 일조했고, 국내에 호스피스 케어를 소개했다. 김 박사는 정신 환자 간호 분야에서 좋은 논문을 다수 발표했는데, 그의 연구와 교육은 실험실이나 강의실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뇌암 말기 환자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직접 휠체어에 태워 종로 극장을 가서 보고 싶은 영화를 보여주기도 했고, 정신병원을 퇴원하고 적응하지 못하는 환자에게 4개월 간 개인면담을 해줬다. 김 박사의 가장 큰 공적으로 꼽히는 사람돌봄이론(Interpersonal Caring Theory, ICT)은 여기서 비롯된 것.

1983년부터 6년간 13명의 조현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매주 토요일마다 정신 상담을 펼쳐왔던 김 박사는, 1989년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정신과 환자 재활에 관한 이론인 ‘사람돌봄이론’을 세계 최초로 발표했다. 지역사회에 방치되어 있는 만성정신질환자의 회복 및 사회적응을 위한 간호재활 프로그램이었다. 사람돌봄이론의 10가지 핵심개념:알아봐줌,동참함,공유함,경청함,동행함,칭찬함,안위함,희망을 불어넣음,용서함,용납함

김수지 박사는 이를 바탕으로 정신질환자의 사회재활을 촉진할 수 있는 간호방법을 담아 1990년, 국내 최초로 정신보건간호사 훈련과정을 개설했고,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유엔개발(UNDP)의 지원으로 사람돌봄이론 간호재활프로그램의 효과검증실험을 진행했다. 연구결과, 사람돌봄을 받은 환자들의 재입원 기간은 연간 231일에서 13일로 감소했다. 이는 국내의 정신보건정책과 지원, 정신보건사업에서 큰 개혁을 불러일으켰고, 수 년 동안 세계 각지의 학회와 세미나에서 화제가 됐다. 2001년 그 업적을 인정받아 김수지 박사는 간호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국제간호대상(International Achievement Award)을 한국인 최초로 받았다.

세상에 완벽히 건강한 사람은 없어요. 정서∙심리적으로 약한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수치가 다를 뿐이에요. 타고나면서부터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약한 사람들이 있다면, 환경을 그 사람에게 맞춰줘야 해요. 체온처럼요. 36.5도에 면역력이 가장 강하기 때문에 날씨가 추워지면 옷을 껴입고 몸을 따뜻하게 보호하지요.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따뜻한 환경으로 맞춰주는 것처럼 정서∙심리적으로 약해진 우리 모두를 위해 가정, 학교, 직장, 사회에서 따뜻한 환경을 만들어야 해요.

만성정신질환자의 회복과 정신장애인의 삶의 질에 공헌한 김수지 박사는, 퇴직 후에도 간호사로 살았다. 환자들을 더 잘 돌보기 위해 사회복지학을 공부했고,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교육과 조직을 체계화했다. 호스피스센터와 요양원, 정신사회재활센터를 건립해 환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늙어가겠다는 꿈을 위해 2009년 노인공동생활 시설인 요양센터를 개원했다.

나는 50년을 간호사로 일했지만 다시 태어나도 간호사로 공부하여 환자를 위해 헌신하겠어요 평생을 간호사로 살며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겼던 그는 급성 백혈병으로 생명의 불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남은 이들을 걱정했다. 진정한 나눔을 위해 시신까지 기증하고 떠난 대한민국 첫 간호학 박사, 김수지. 국가는 그에게 ‘과학기술유공자’의 명예를 헌정했다. 김수지 박사가 남긴 따뜻한 사랑과 헌신의 마음은 국가의 자산으로 후손들에게 영원히 전파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