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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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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일류의 공업한국을 꿈꾼 불소화학의 세계적인 권위자

기적의 유기화합물로 불린 프레온과 테플론 공동개발
유기화학의 반응을 설명하는 ‘박의 카바니온 이론’ 수립
국산 프레온 ‘코프론-12’ 개발을 위해 기술 노하우 제공

#1.(표지) 세계 일류의 공업한국을 꿈꾼 불소화학의 세계적인 권위자 故 박달조 기적의 유기화합물로 불린 프레온과 테플론 공동개발 유기화학의 반응을 설명하는 ‘박의 카바니온 이론’ 수립 국산 프레온 ‘코프론-12’ 개발을 위해 기술 노하우 제공 #2. 학력 1956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 졸업 1958 뮌헨공과대학 대학원 기계공학 석사 1961 뮌헨공과대학 대학원 기계공학 박사 경력 1967∼1972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제1연구부장 겸 특수기재연구실장 1972∼1973 국방과학연구소(ADD) 부소장 1973∼1974 상공부 초대 중공업차관보 1974∼1975 국립공업표준시험소 소장 1975∼1980 한국표준연구소(KRISS) 초대 및 제2대 소장 포상 1971 동탑산업훈장 1998 5.16민족상 2001 과학기술훈장 혁신장 #3. 하와이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미국과 한국의 불소화학 공업 발전 최전선에서 활약한 과학자가 있다. 박달조 박사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지막으로 태울 수 있는 인생의 불꽃을 한국 과학기술 발전에 모두 헌신한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4. 박달조 박사는 1906년 하와이주 호놀룰루 카운티 와이파후에서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학비가 저렴한 학교를 다니며 공부했고 그는 대학도 장학금을 지원받을 수 있는 곳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선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새로운 첨단 분야로 떠오르고 있던 화학공학을 선택한 그는 대학 재학 동안 최상위 성적을 받으며 여러 상을 휩쓸었고, 복싱으로 체력을 기르는 등 심신을 단단하게 다지며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갔다. #5. 1929년 대학을 졸업한 박 박사는 프리지데어사(Frigidaire Corp.)의 연구원으로 취직해 토마스 미즐리(Thomas Midgley Jr.)가 이끄는 팀에 들어갔다. 이 팀은 ’프레온 가스(freon gas)’를 처음 개발한 팀으로, 당시 팀장이었던 미즐리는 당시 과학계와 산업계가 주목하는 가장 핫한 리더이자 과학자였다. 프레온의 응용과 생산을 고민할 때 합류하게 된 그는 이곳에서 프레온-12, 프레온-11를 개발하는 등 많은 성과를 일궈냈다. #6. 이후 그는 연구자로서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박사과정 진학을 결정했다. 미래를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오하이오주립대학 화학과에 진학한 그는 탄수화물 화학의 권위자인 윌리엄 에반스(William L. Evans)의 지도를 받아 「아라비노스 아세테이트의 광학 회전과 이성질체의 상관관계 연구(A study in the correlation of optical rotation and isomerism of the acetates of arabinose)」에 대한 논문을 제출했다. 이 논문으로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화학박사인 이태규 박사에 이어 두 번째 화학박사가 됐다. #7. 학위 취득 후 그는 듀폰 잭슨 연구소의 연구원이 됐다. 이곳에서 그는 10년간 근무하며 다양한 재료의 코팅제로 쓰이는 테플론과 에어로졸 추진제 등을 개발했다. 1941년 첫 특허를 출원한 데 이어 약 35건의 미국 특허를 내며 듀폰의 발전에 기여한 결과, 연구소에 들어간 지 8년만인 1944년 연구감독관으로 승진하기도 했다. #8.  산업계에서 연구 경력을 쌓은 그는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학문과 연구에 대한 갈증이 주된 이유였다. 마침 세계대전 후 과학 분야 교수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면서 그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산업계에서 연구 경력을 쌓은 그는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학문과 연구에 대한 갈증이 주된 이유였다. 마침 세계대전 후 과학 분야 교수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면서 그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9. 그는 남다른 실행력으로 학과의 발전을 견인했다. 그가 세운 유기불소화학훈련센터(Organic Fluorine Chemistry Training Center)는 120만 달러 이상의 연방정부 연구비를 지원받는 쾌거를 달성하며 미국 최대 규모 훈련센터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유기화학의 반응을 설명하는 ‘박의 카바니온 이론’을 수립하며 학문 발전에도 기여했다. 유기불소화학 분야에서 115명의 박사, 24명의 석사를 배출하고, 13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후학양성과 연구에 전력을 다했다. #10. 그의 활발한 활동은 학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산업계와의 인연도 꾸준히 이어갔는데, 몸담았던 듀폰을 비롯해 세계 20여 개의 기업과 연을 맺으며 고문으로 활약했다. 이러한 업적들을 인정받아 대학의 ‘저명 동문상’, 미국화학회의 ‘콜로라도의 연례지역상’, ‘미국화학회 플루오린상’ 등 각종 상을 휩쓴 그는 불소화학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으며 1972년 정년퇴직했다. #11. 미국에서 줄곧 활동했지만, 그는 한국을 잊은 적 없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한국에 대한 그리움은 가슴 한켠에 늘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64년 대한화학회의 초청을 받아 내한하게 된 그는 주요 대학과 산업체를 시찰하며 한국에 많이 매장되어 있는 광물인 형석을 이용해 프레온 생산 공장을 세우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프레온 국내 생산에 대한 가능성을 제일 먼저 시사한 셈이다. #12. 프레온의 국내 생산은 그가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해외 한국인 과학기술자 유치 사업에 따라 내한한 1969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박 박사가 제공한 프레온 생산 공장의 설계 및 건설에 대한 기초자료를 토대로 연구개발에서 시제품 생산까지 가능한 시험공장 건설이 진행됐다. 당시 한국의 산업 및 기술 상황을 생각해볼 때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연구원으로 참여했던 안영옥 KIST 박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13.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지만 그때 우리나라는 아직도 간단한 밸브도 제작을 못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가 고생하는 데도 박 박사님은 그것을 모르는 체하시는 것 같았다. 설계를 다하여 보여드리면 그저 그만하면 되겠다고 확인만 하여 주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겐 큰 힘이 되었고 확실한 보험이었다.” #14. 시험공장은 2년 6개월만인 1972년 완공됐다. 이 공장에서 생산되는 프레온은 한국의 프레온이라는 뜻으로 ‘코프론-12(Korfron-12)’으로 명명됐다. 이후 코프론-12의 공업소유권을 한국불화공업(현재의 울산화학)에 매각한 KIST는 새로운 냉매 개발에 나서며 한국 불소공업 발전의 물꼬를 텄다. 안영옥 박사는 회고를 통해 이 모두가 박 박사가 뿌려 놓은 씨앗에서 비롯됐다고 평하기도 했다. #15. #16. 그는 한국의 불소화학 공업발전에 기여한 공헌을 인정받아 1970년 과학기술처 장관 표창, 1972년 3·1문화상 기술상을 수상했다. 이후 1975년 미국으로 돌아가 콜로라도대학 명예교수로 활동하다 1982년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했다. 박달조 박사는 미국과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한 세계적인 화학자였다. 세계 일류의 공업 한국을 소망하며 조국의 미래를 염원했던 그의 신념은 공업한국의 신호탄이 됐다. ‘가능하면 여생을 고국을 위해 바치고 싶다’는 뜻을 줄곧 내비치며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한국 과학기술 발전에 힘을 보탰던 그의 헌신을 우리는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