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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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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용 엔진과 변속기의 독자 개발을 선도한 자동차공학의 최고기술책임자

알파엔진을 비롯한 세타엔진, 타우엔진 등 세계 일류기술 개발
하이브리드차, 수소차와 IT기술, 자율주행 등 신기술 트렌드 선도

 

차량용 엔진과 변속기의 독자 개발을 선도한 자동차공학의 최고기술책임자
이현순
알파엔진을 비롯한 세타엔진, 타우엔진 등 세계 일류기술 개발
하이브리드차, 수소차와 IT기술, 자율주행 등 신기술 트렌드 선도 학력
1973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 졸업
1979 미국 뉴욕주립대학(스토니부룩) 대학원 기계공학 석사
1982 미국 뉴욕주립대학(스토니부룩) 대학원 기계공학 박사

경력
1997~2005 현대자동차 울산/ 남양/ 파워트레인 연구소장
2005~2011 현대자동차 연구개발총괄본부 사장, 부회장
2014~ 두산 경영혁신부문 부회장
2014~ 한국뉴욕주립대학 기계공학과 석좌교수
2015~ 제6대 울산과학기술원 이사장

포상
2005 금탑산업훈장
2007 제17회 상허대상
2008 최고기술책임자부문 기술경영인상(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2009 한국공학한림원 대상
2009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 “우리만의 엔진을 만들어보자.”

기술의 불모지에서 독자적인 기술력을 확보하려면 그야말로 뼈를 깎는 노력이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사람과 예산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외국 기술에만 의존하고 있었던 자동차 기술의 핵심 엔진 기술을 순수 국산 기술로 대체하고자 결심했을 때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맨땅에 헤딩을 하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우려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그러나 가만히 멈춰서 있을 수는 없었다. ‘회사에 헛된 희망을 품게 하는 사기꾼’이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개발을 시작한 지 7년 만인 1991년, 최초의 국산 엔진인 ‘알파 엔진’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며 탄생했다. 그 중심엔 국산 자동차 엔진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현순 두산그룹 고문이 있었다. 
가솔린과 디젤을 포함한 차량용 엔진과 변속기의 자체 개발을 선도하고 미래 기술 트렌드를 앞장서서 제시한 그는 지금까지 한국 자동차 공학의 최고기술책임자로 존경받고 있다. 이현순 부회장은 1950년 한국전쟁 중 태어났다. 
나무와 쇠 등으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그가 공학의 길을 걷게 된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더욱이 공학을 전공한 아버지와 형제들 덕분에 물리와 수학, 화학에 대한 즐거움을 일찍 알게 된 그는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입학하며 자신의 호기심을 채워나갔다. 에너지를 생성하는 엔진과 터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 기계에 대한 관심은 군대로까지 이어졌다. 대학 졸업 후 공군사관학교 기계과 교관으로 입대한 그는 4년간 기관 실험실을 맡아 비행기 프로펠러 엔진과 제트엔진 등을 분해·조립하고 실험하며 생도들을 대상으로 강의했다. 
전역 후엔 미국행을 선택했다. 1982년 뉴욕주립대학(스토니부룩) 대학원에서 비행기 엔진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 부회장은 세계 최고의 자동차회사 제너럴모터스(GM) 자동차연구소에 입사하여 엔진개발실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현대그룹은 뒤늦게 출발한 자동차산업에 역점을 두며 이를 주도할 인재를 찾고 있었다.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그를 신엔진 개발 계획을 진두지휘할 리더로 낙점하고 러브콜을 보냈다. 당시 GM과 현대자동차의 연구개발 환경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의 계속되는 설득에 그는 마침내 현대자동차로 출근을 결심하게 된다. 1984년 4월, 첫 출근한 그에게 정주영 회장은 다섯 명의 직원을 소개하며, “어서 엔진 개발을 시작하게”라고 말했다. 독자엔진 개발을 위한 극비 프로젝트, '알파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그가 내세운 전략은 다른 곳보다 먼저 앞선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마북리 연구소를 세우고 연구인력을 확보해 엔진 개발을 추진했다. 그러나 연구 불모지에서의 도전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았다. 실린더·피스톤과 같은 부품은 물론 엔진 제작에 사용될 소재까지 새로 만들어야 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장애물은 당시 현대차에 엔진기술을 공급했던 일본의 미쓰비시였다. 현대차에 기술이전을 꺼리던 미쓰비시에게 그는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구보 도미오(久保富夫·1908~1990) 미쓰비시자동차 상담역(전 회장)은 정 회장에게 “엔진 개발을 포기하면 로열티를 반으로 깎아주겠다”고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구보 회장의 당근책은 오히려 정 회장에게 확신을 심었다. 정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그는 1991년 1.5ℓ급 알파엔진을 개발해낼 수 있었다. 전자분사식으로 출력과 연비 향상을 이루며 엑센트 수출에 크게 기여한 알파엔진은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이 기술 자립 터전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그는 소형용 뉴알파엔진(1994), 베타엔진(1995), 입실론엔진(1997), 중형용 델타엔진(1998), 시그마엔진(1998), 대형용 오메가엔진(1999) 등을 연달아 개발하며 승용차 가솔린엔진 전체 라인업에 대한 독자모델 체제 구축에 기여했다. 한국 엔진의 위상을 다시 한 번 높인 건 2002년 개발된 세타엔진이었다. ‘월드엔진’으로 불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세타엔진은 2004년 다임러크라이슬러와 미쓰비시가 로열티를 내고 사갈 정도로 그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이후에도 현대차는 차량용 엔진과 변속기 개발에서 특출난 성취를 거뒀다. 엔진 부분 최고 권위 상인 워즈오토(WardsAuto) 10대 엔진상을 3년 연속 수상한 타우엔진(2009, 2010, 2011)을 비롯, 디젤엔진 개발 부분에서도 잇따라 성과를 올리며 현대차는 명실상부 한국 자동차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각인됐다. 그는 뛰어난 선구안으로 자동차 산업의 트렌드를 이끌었다. 친환경 자동차 개발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여기에서도 알파엔진을 개발했던 전략을 고수해 신기술을 확보하고자 했다. 다른 것보다 먼저 앞선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는 그의 전략으로 한국의 강점인 IT 기술을 자동차에 접목시킨 현대차는 주요 부품을 국산화한 하이브리드 차를 양산하고, 뒤이어는 수소 연료전지 차를 앞장서서 개발하며 트렌드를 주도해 나갔다. 수소차의 경우 워낙 새로운 개념이었기에 현대차에게도 도전일 수밖에 없었다. 1999년부터 개발을 시작했지만, 속도는 지지부진했다. 그러나 그는 수소차가 미래를 바꿀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았다. 그의 확신을 기반으로 현대차는 2030년 수소차 대량보급을 목표로 프로젝트를 속행했다. 2005년에는 이를 종합적으로 선도해 나갈 환경기술연구소를 세계 최초로 설립했다. 그는 기업의 연구 기반과 문화 구축에서도 남다른 역량을 발휘했다. ‘사람이 곧 기술력’이라는 생각으로 연구 환경을 조성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던 그는 현대자동차 남양기술연구소를 뛰어난 기술력과 연구 인력을 갖춘 세계적인 연구소로 만들었다. 또한, 전 세계 주요 생산거점에 연구개발센터를 설치해 현지 시장 맞춤의 글로벌 R&D 네트워크를 갖추는 데 앞장섰다. 열정과 도전정신을 바탕으로 연구원들이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고자 힘썼다. 연구에만 몰두해 온 그에게 영예도 뒤따랐다. IR52장영실상(1991)을 비롯, 전국발명대회 대통령 표창(1996), 금탑산업훈장(2005), IMI 기술경영인상 대상(2006),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기술경영인상(2008), 한국공학한림원 대상(2009),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2009), 대한민국 100대 기술과 주역(2010),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2006), 자동차공학대상(2018) 등 다양한 곳에서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또한, 한국자동차공학회 회장, 한국뉴욕주립대학 기계공학과 석좌교수, 울산과학기술원 이사장,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 국가과학기술위원, 국민경제자문위원 등 중책을 맡으며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난 2011년 27년간 몸담아왔던 현대자동차를 퇴임하고 두산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경영혁신부문 부회장의 역할을 맡아 또 다른 혁신 활동을 펼치고 있다. 더 크고 다양한 엔진을 만들기 위해 신기술 확보에 나서는 등 그의 기술적 도전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후배들이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첫 국산 엔진을 개발했다는 걸 기억했으면 한다. 실패를 두려워 말고 끈질기게 도전하고 덤벼들라. 젊은 엔지니어들이 나라의 기둥인 만큼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 한다.”

알파엔진 개발 완료 기자회견 다음 날 입이 돌아갔다는 이 부회장. 현대자동차 입사 이래 쉬는 날 없이 일에 몰두한 탓에 과로가 쌓여 벌어진 일이었다. 월드베스트를 만들어내기 위해 사생활을 포기하고 연구에 몰두한 이현순 부회장의 열정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런 그가 여전히 현장의 과학자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이유는 ‘앞선 기술’을 위해 지금도 쉬지 않고 진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놀라운 성취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기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