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된 우리나라 산업기술 성장 토대 마련, 유지(油脂) 및 공업용수 분야에서 수많은 연구성과 창출 ... 상공부 장관시절, 3F정책 추진해 현대공업의 기반 마련
故 안동혁(安東赫)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1906~2004)
- 학력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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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04 ~ 1926.03
경성고등공업학교 응용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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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04 ~ 1929.03
일본 규슈제국대학 응용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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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09 ~ 1949.06
프린스턴대학교 응용화학
- 경력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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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04 ~ 1946.09
경성공업전문학교 교수 및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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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09 ~ 2004
조선요업협회(현 대한요업총협회) 초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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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04 ~ 1976.03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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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03 ~ 2004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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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09 ~ 2004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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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01 ~ 2004
재단법인 한국화학회관 이사장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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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01 ~ 2004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이사
-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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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우리나라 산업기술의 기반을 닦은 대표적 화학공학자
안동혁 교수는 해방 직후 우리나라 산업기술의 기반을 닦는 데 앞장선 대표적 화학공학자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화학공학계 지도자이자 학자로서 대한민국 초기 과학기술 기반을 다지는데 크게 공헌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유지(油脂) 연구와 공업용수 조사에서 많은 연구 성과를 냈으며, 해방 후에는 중앙공업연구소 소장으로서 산업기술의 재건과 발전을 위해 크게 힘썼다. 일제 강점기에도 1926년 ‘조선醬油의 연구’(日文, 경성고등졸업논문), 1929년 ‘유지의 암모니아 검화’(요지 일분 조선화학협회), 1933년 ‘조선과 공업자원’(日文, 상공조사월보) 등을 발표했고 특히 1943년 ‘유지에스테르 교환연구’(日文, 연료대책연구회 보고), 1946년 ‘油脂로부터 폴리아미드系’ (중앙공업연구소 연보) 등의 논문을 발표하며 지방산계 폴리아마이드의 합성연구 결과를 널리 알렸다. 그가 주도했던 지방산 유도체 분야, 지방산 에스텔(연료, 윤활유), 지방산 아마이드와 아민(세제), 지방산 유도체 분야, 지방산계 폴리아마이드의 합성연구는 훗날 대한민국 산업과 직접 연계되어 우리나라 화학 및 공학 산업의 초석이 되었다.
안동혁 교수는 광복 후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재건하고 중앙공업연구소를 재편성하는 등 혼란기에 우리나라 과학기술 교육의 초석을 닦는데 크게 기여했다. 1954년 서울대를 비롯해 수도권 주요 대학의 강사로 활동을 시작, 1958년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로 부임해 2004년 작고할 때까지 일평생을 교육자로 지내며 후학양성에 큰 공을 세웠고 왕성한 저술활동과 연구를 진행했다. 학생들을 위한 기초 과학학문 전파를 위해 1971년 ‘자연과학개론(공저)’(한양대출판부)와 1971년 ‘과학과 경제발전(감수)’(한양대출판부)를 저서로 남겼고 연구결과를 1946년 ‘과학기술의 건설’(제일출판사), 1947년 ‘과학신화’ (조선공업도서출판사), 1947년 ‘화학공업개론(편저)’(문운당) 등의 저서로 남겼다.
광복 후 대한화학회, 대한요업총협회, 한국식품 과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학술 활동에도 크게 공헌했고 학술원 초대 회원 및 부회장을 거쳐 한국과학회 이사회의 1, 2대 이사장 등 여러 학회의 회장을 역임하며 대한민국 화학공합 학술 활동의 기틀을 다지고 한국과학원의 초창기 발전에 기여했다.
1950년대 상공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자금(Fund), 에너지(Force & Fuel), 비료(Fertilizer)로 대표되는 3F 산업정책을 추진해 한국 경제발전의 토대 마련
1953년에는 상공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전쟁 중 국가가 당면한 건재 복구 물자 생산, 기간산업 건설 착수에 힘쓰는 한편 삼척, 마산, 당인리 발전소 건설, 문경시멘트, 인천판유리 공장, 충주요소비료공장 건설 착수 등 기반시설 확립 및 건설을 통해 대한민국 산업화 초기 기간사업의 큰 틀을 마련했다.
안동혁 교수는 대한민국의 수질과 수원에 궁금증을 가지고 이에 대해 오랜 시간 연구한 학자로 특히 북한 수원지에 대한 심층적 연구를 진행해 대한민국 전역의 수원 및 수질, 공업용수 등에 있어 탁월한 연구 실적을 쌓았다.
이와 관련해 1941년 ‘조선의 水質’(日文, 조선화학회지), 1944년 9월에는 ‘북한의 수질 및 수원’에 대한 논문을 조선화학협회지에 게재했고, 한국전쟁 직전에는 남북한 전역에 걸쳐 공업용수를 조사·연구하며 1948년 ‘공업용수 조사 원산지역’(중앙공업연구소 보고), 1949년 ‘북조선의 공업용수’(중앙공업연구소) 등 관련 논문을 13회나 중앙공업연구보고에 발표하면서 우리나라의 수원 및 공업용수 분야 연구의 기틀을 제공했다.
그는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서울국제사이언스클럽, 한국화학회관 등을 설립·운영하는데 크게 기여했고 국제과학연맹 이사회 한국대표, 미국화학회 위원 등을 맡아 국가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데 공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