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학연구소 설립을 제안하고 그 실현을 위해 부단히 노력
한국 최초의 대중적 종합과학잡지 <과학조선>을 장기간 발간
故김용관(金容瓘)
과학지식보급회 전무이사 (1897~1967)
- 학력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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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력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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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925, 1932~
발명학회 전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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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 1967
한국발명협회 상무이사, 부회장
-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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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관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새로운 비전과 활로로 “과학조선 건설”을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해 대중들이 참여하는 거족적인 과학운동을 펼친 과학기술 활동가다.
대중들이 거족적으로 참여한 과학운동을 이끈 선구적 과학활동가
그는 고난의 시기에 태어나 자란 선구적 과학기술인이다. 사실상 최초의 근대 과학기술 교육기관이라 할 관립공업전습소를 거쳐 1918년 경성공업전문학교를 1회로 마쳤다.
이듬해에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며 각계에서는 조선인들의 실력을 키우려는 민족적 자강운동이 활기를 띠었다. 과학기술계에서도 민족의 과학기술 역량을 높이려는 움직임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는 1세대 과학기술인으로서 사명감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이러한 흐름에 합류했다.
1924년 설립한 발명학회는 그의 주도로 경성공전 동문을 규합하여 만든 공업지식 보급 및 발명 장려를 표방한 단체였다. 당시는 과학, 기술, 발명, 공업을 서로 간에 큰 차이를 두지 않고 혼용하고 있을 때였다. 이 전후로 그는 민족의 경제자립을 목표로 한 물산장려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말하자면, 발명을 비롯한 과학기술은 조선의 산업발전을 위해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1928년에는 고려발명협회를 세워 조선인 공업을 더 직접적으로 뒷받침할 기술적 발명에 관심을 기울이고자 했으나 이것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이 과정에서 과학기술을 더 체계적으로 알릴 필요와 이를 위한 사회 저명인사들의 역할 제고를 인식하게 되었다.
신문과 잡지 등에 2백편 가까운 글을 기고해 과학대중화에 앞장
1930년대에 들어 그는 과학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1932년 발명학회를 재건하고 다음 해에는 대중 과학잡지 <과학조선>을 발행했다. 1934년에는 과학데이를 지정하고 그 전후로 과학지식보급회 설치와 함께 대중 과학행사를 대대적으로 펼쳤다. 과학데이를 4월 19일로 정한 이유는 행사를 하기 좋은 계절 중에 마침 세계적 과학자 다윈의 기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요 행사로는 기념식, 강연회, 라디오 방송, 자동차 기행렬, 활동사진 상영, 과학기관 견학, 발명품 전람회, 과학 상담, 좌담회 등이 다채롭게 열렸다. 경성을 필두로 평양, 개성, 강서, 선천, 원산, 함흥, 신천, 김천, 대구, 광주 등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적어도 1940년까지는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과학보급, 기술발명, 연구소 등 과학조선 건설의 비전 제시
이 과학운동이 지니는 가장 큰 가치는 과학기술을 민족 과제로 제시하고 그것의 진흥을 열성적으로 추진했다는 것이다. 바로 “과학조선의 건설”을 내세우며 그 청사진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었다. 우선, 그는 과학조선을 이끌 과학자와 발명가의 중요성을 제기하고 그 양성을 널리 주창했다. 이들이 주되게 활동할 공간으로서 이화학연구소의 설치는 불가피하고 중요했다. 그는 각계 인사들과의 협력과 대중적 지지를 통해 과학기술 연구소를 세우려고 힘썼다. 이때 발간된 종합과학잡지 <과학조선>은 다양한 정보와 논의가 집대성되는 과학기술 보고였다.
그는 해방 후 발명단체 등에 참여하고 과학강연에도 다시 나서며 과학의 날을 재개하려고 애썼다. 한편으로는 발명에도 많은 시간을 들여 주로 온돌과 관련한 특허를 출원해 10건을 등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전에 그는 안타깝게도 적절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가 받은 상은 모두 발명과 관련된 것들로 1959년 발명의 날 수상(상공부), 1965년 발명협회상, 1967년 발명상 공로상(상공부)이 있을 뿐이었다. 사후에도 그는 오랫동안 별다른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뒤늦게 재조명되며 과학기술 유공자로 선정되었다.
이처럼 김용관 선생은 과학기술 불모지에서 과학조선의 비전을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해 분투한 선구적 과학기술 리더였다. 그가 제시한 과학조선 건설은 과학기술입국, 기술드라이브정책, 과학기술중심사회 등으로 면면히 이어지며 현재의 과학 한국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과학 한국의 건설 청사진을 처음으로 대담하게 그려나간 한국 과학기술 설계의 대부라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