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발 앞선 비전과 연구로 반도체 및 디지털 기기 기술개발에 기여
문제해결 중심의 연구풍토 조성과 엔지니어 육성으로 효과적인 산학협력 정착
김충기(金忠基)
KAIST 명예교수 (1942~)
- 학력사항
-
- 경력사항
-
-
1970 ~ 1975
Fairchild R&D Lab., Member of Technical Staff
-
1975 ~ 2008
한국과학기술원 전기 및 전자공학과 교수
-
- 포상
-
문제해결형 연구와 교육으로 기술개발을 견인한 반도체산업의 대부
김충기 교수는 첨단 반도체 연구를 국내에 정착시키고 반도체 산업기술 개발을 이끈 1, 2세대 주역들을 키워낸 한국 반도체의 대부다.
1942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문제 해결을 중시하는 엔지니어 정신이 충만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생으로서 경성방직의 섬유 엔지니어였던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 전자공학과에서 반도체 이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그는 학구적이고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첫 직장이었던 페어차일드에서의 연구 경험이 어린 시절 익숙했던 엔지니어 정신을 일깨웠다.
그는 1970년에 미국 최고의 반도체 기업 중 하나인 페어차일드에 입사했다. 당시는 반도체 핵심 소자인 전하결합소자(CCD)가 처음 개발된 직후였다. CCD는 빛을 전기신호로 바꾸는 부품인데 이를 이용하면 빛 정보를 화면에 표현하여 이미지를 구현할 수 있다. 그는 입사하자 곧 당시 최첨단 기술이었던 CCD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CCD 기초연구와 CCD 영상감지소자 기술을 기반으로 1973년에 세계 최초로 500 화소 CCD 선형 영상감지소자를 개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기술은 상품화되었다. 그는 동료들에게 “CCD 교수”로 불릴 정도로 전문성을 인정받았다. 또한 그는 페어차일드에서 항상 기술의 실제 문제를 염두에 두는 엔지니어의 연구태도와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고 토론하는 소통기술을 경험했다.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반도체산업 1-2세대 주역들을 키운 교육자
1975년 그는 잘 나가던 페어차일드에서의 연구를 접고 귀국하여 신생 한국과학원(후에 한국과학기술원으로 개편)의 전기 및 전자공학과 교수가 되었다. 이 결정 뒤에는 개인적인 이유 외에 한국의 반도체 산업에 기여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다. 1970년대 초 한국 정부는 반도체 공업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는 발광 다이오드 제작, 실리콘 적층 연구, 집적회로 제작 실험 등의 연구가 수행되었다. 그러나 반도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나 교육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였다. 한국과학원에서 그는 3년에 걸쳐 반도체 집적회로 제작 설비를 설치했다. 덕분에 이론과 실습이 균형을 이룬 첨단 반도체 연구와 교육이 가능해졌다.
1980년대를 통해 그의 연구실은 사실상 국내 반도체 기술 연구의 중심이 되었고 우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첫째, 반도체는 첨단 전자산업의 핵심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둘째, 그의 연구실은 늘어난 정부와 기업의 반도체 연구 지원을 감당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춘 거의 유일한 대학 조직이었다. 셋째, 여기에 그의 전문성과 우수 학생들의 열의가 더해져 우수한 연구 성과가 나왔다. 예를 들어, 국내 대학원생들이 외국 유명 학술지에 게재될 정도의 우수 논문을 썼다. 그의 제자들은 졸업 후 국내 주요 반도체 기업에 진출하여 1980년대에 본격 시작된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빠른 속도로 본궤도에 오르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0년대에 그의 연구실에서는 연구 주제를 다각화하고 특히 미래를 준비하는 새로운 문제에 도전했다. 산업현장의 당면과제에 대한 연구는 기업 연구소에서 충분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냉각식 적외선 영상감지 소자를 개발하여 국방용 적외선 영상 카메라를 국산화했다. 또한 이 시기에 그의 지도로 박막 트랜지스터(TFT)나 액정 디스플레이(LCD) 같이 새로운 주제에 도전했던 제자들은 한국 기업이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디지털 전자기기, 영상기기의 핵심 반도체 소자 개발의 선구자
한국 반도체 산업의 역사에서 김충기 교수는 연구자로서, 교육자로서 해야 할 일들을 정확한 타이밍에 효과적으로 해낸 인물이다.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에도 이렇다 할 전문가가 없던 시기에 첨단 연구 경력을 가지고 귀국했다.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그의 제자들은 반도체 산업 초기부터 기업에서 실질적인 기술개발의 주역이 되었다. 1975년부터 2010년까지 그는 72명의 석사와 38명의 박사를 지도했는데, 이들은 특히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성장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1997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2000년대 한국 경제에서 메모리 반도체와 반도체 소자를 핵심부품으로 쓰는 디지털 기기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반도체 산업 초기에 꼭 필요한 연구를 수행하고 인력을 키운 그의 역할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다. 이것이 그를 한국 반도체의 대부라고 부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