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에게 가장 친숙한 과학저술가이자 과학평론가
한국 물리학자와 과학저술인 공동체 형성의 주역
故 김정흠(金貞欽)
고려대학교 교수 (1927~2005)
- 학력사항
-
-
1951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이학사(물리학)
-
1951 ~ 1953
서울대학교 대학원 이학석사(물리학)
-
1957 ~ 1961
미국 로체스터대학 이학박사(물리학)
- 경력사항
-
-
-
1982 ~ 1988
한국과학저술인연합회 회장
-
-
1989 ~ 2003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 회장
- 포상
-
과학연구 진흥과 과학문화 확산에 이바지한 과학 대중화의 선도자
김정흠 교수는 물리학 연구자로서 뿐만 아니라 저술가이자 강연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통해 과학연구 진흥과 과학문화 확산에 이바지한 과학 대중화의 선도자이다.
그는 1951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1953년 같은 대학원에서 이학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석사 졸업 후 고려대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중 1957년 유학길에 올라 4년만에 미국 로체스터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평생 고려대에서 교수로 활동하며 이론물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대중을 위한 과학 저술 및 강연 활동을 활발히 벌여 당시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한국의 과학 대중화 분야를 이끌었다.
급격한 경제 발전과 사회 변화를 겪고 있던 1960-70년대의 한국사회에서는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도 급격히 높아졌지만, 선진국에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던 첨단 과학기술의 내용을 쉽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전문가가 부족했기에 이에 대한 대중의 갈증도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흠 교수는 사명감을 갖고 왕성한 저술 및 강연 활동을 벌여, 한국의 과학 대중화를 상징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그는 1960년대부터 꾸준히, 40여 년에 걸쳐 매년 20-30여 회의 대중 매체 기고를 통해 첨단 과학기술을 쉽게 풀이하여 대중의 과학 이해를 도왔다. 그의 저술 활동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 1980년대에는 연 평균 200자 원고지 4,000~6,000매, 많은 해에는 8,300매에 이르는 과학 기사를 쓰는 왕성한 활동량을 과시했다. 그가 저술한 저서는 '미래의 세계', '기술의 발달', '자연과학개론' 등을 포함하여 무려 40여 권에 달했다. 그는 1977년 한국과학기술저작인연합회 창립을 주도했고, 연합회의 초대 부회장(1977~1982)과 제2대 회장(1982~1988)을 역임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 그는 대중에게 과학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졌고, 이는 방송 출연으로 이어졌다. 1970~80년대 KBS TV와 교육방송 라디오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고정 패널로 출연하여 학생과 시민들에게 과학의 발전상을 해설했다. 각지에서 강연 요청도 쇄도하여, 1980~90년대에는 연간 평균 100여 회의 강연을 다니기도 했다.
한국과학저술인연합회의 활동은 지적재산권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졌다. 김정흠 교수는 사단법인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의 창립 부회장(1984-1989)과 회장(1989-2003)을 역임하면서 지적재산권 제도를 한국에 받아들이는 데에도 기여했다. 김정흠 교수의 과학 대중화를 위한 노력은 강연과 저술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여러 정부위원회에 참여하여 과학문화 진흥과 확산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는 데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다. 일례로, 그는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심의위원회 위원으로서 초중고 교과과정에 컴퓨터를 포함시킬 것을 주장했고, 문교부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오늘날 한국의 정보통신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과학 대중화를 위한 그의 헌신은 국가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1972년에는 대한민국과학기술상(국무총리상)을, 1983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으며, 2002년에는 대한민국과학기술훈장(혁신장)을 받았다. 그는 연구자로서도 업적이 많다. 한국의 대학에 본격적인 연구활동이 뿌리 내리기 전인 1960-70년대에도 꾸준히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했다. 또한 한국물리학회에서도 창립 이래 다양한 사업을 책임지면서 한국 물리학계의 정착과 발전에 기여했다. 1967년에는 물리학회 편집위원장으로서 영문 학술지인 Journal of Korean Physics Society의 창간을 단행했고, 1972년부터 1982년까지는 10년 동안 학회 산하 물리학 용어 심의위원장을 맡아 『물리학용어집』의 간행을 주도했다. 그리고 1985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물리학회 제11대 회장으로 봉직하며 학회의 운영을 개선하고 물리학 실험교재를 편찬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