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인공위성과 통신 강국으로 이끈 선구자 우리별 1~3호 개발의 주역, TDX 전자교환기도 개발해 '1가구 1전화'시대 열어
故 최순달(崔順達)
KAIST 명예교수 (1931~2014)
- 학력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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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09 ~ 1954.09
서울대학교 전기공학 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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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09 ~ 1960.06
미국 Univ. of California at Berkeley 전기공학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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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09 ~ 1969.09
미국 Stanford Univ. 전기공학 박사
- 경력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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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05 ~ 1983.10
체신부 제32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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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09 ~ 1996.08
KAIST 전기및전자공학과 교수, 인공위성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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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1 ~ 2006.12
㈜쎄트렉아이 회장
-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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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의 아버지
최순달 교수는 과학기술 불모지에서 대한민국을 인공위성과 통신 강국으로 이끌어낸 선구자다. 우리나라 최초로 인공위성 우리별 1~3호 발사를 성공시키고 TDX 개발을 주도해 '1가구 1전화'시대를 여는 등 대한민국을 과학기술 불모지에서 인공위성과 통신 선진 강국으로 이끌었다. 특히 ‘우리별 1호’는 우리나라가 우주로 쏘아올린 최초의 인공위성으로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는 소형 위성분야에서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우주개발에 선구자적 공헌을 하였고, 우주기술 산업화에 이바지하여 국가의 위상을 크게 높임으로써 '대한민국 우주개발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우리별 1∼3호 발사와 최초의 우주기술벤처 창립 주도
1992년 우리별 1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되었을 때,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22번째 위성보유국이 되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후, 위성기술 분야에서 대한민국은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고, 이제는 인공위성을 세계 여러 나라에 수출하는 국제적 위상까지 갖추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나라가 위성기술의 불모지에서 위성수출국으로 성장, 발전하게 된 데는 최순달 교수의 우주개발에 대한 지대한 공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서울대 전기공학과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버클리대에서 석사학위를, 스탠포드대에서 전기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1969년 7월부터 1976년 1월까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부설 연구소인 NASA 제트추진연구소(JPL, Jet Propulsion Laboratory)에서 우주선 통신장치 개발책임자로 근무하다 '유치과학자'로 고국에 돌아왔다. 당시 안정된 연구환경과 많은 과학자들이 있는 미국에서 평생을 보낼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귀국을 선택했다.
1976년 귀국해 금성사 중앙연구소 초대 소장을 맡아 자주국방 실현을 위한 유도무기 국산화에 힘을 쏟았으며, 1979년 동양나이론 전자사업부 상무를 맡아 전자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한국전기통신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TDX 교환기 개발해 전화 1천만대 보급에 기여
이후 1981년 정부로부터 ETRI 전신인 한국전기통신연구소 초대 소장을 발령받아 TDX(시분할 전자교환기) 개발에 성공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ICT 강국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공헌한 개발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TDX 개발을 국내 최초이자 세계에서 10번째로 성공시켜 '1가구 1전화'시대를 열었다. 이는 우리나라 통신산업을 육성하고 정보화 사회로의 초석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85년에는 영재교육기관으로 출범한 한국과학기술대학(KIT) 초대 학장을 맡은 뒤 서울에 있던 석박사 과정생들을 모아 지금의 KAIST를 만들었다. 체신부 장관,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한 후 1989년 KAIST에 복귀해 인공위성연구센터를 설립했다. 그러나 ‘인공위성’이란 이름도 낯선 불모지에서 국내 개발이 힘들다고 판단한 그는 외국 유학을 통해 기술개발에 나서기로 하고 영국에 있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KAIST 졸업생들을 영국 서리대학교에 유학보냈다. 영국으로 떠난 연구진들은 성공하지 못하면 도버해협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배워 1992년 8월 11일 프랑스령 기아나 쿠루 우주기지센터에서 우리별 1호를 쏘아 올리는데 성공했다. 우리별 1호는 영국 서리대학교의 도움으로 제작된 소형위성에 불과했지만 인공위성 개발기술의 불모지인 우리나라가 처음 쏘아 올린 최초의 위성으로 기록됐으며 자국 기술로 우리별 2, 3호를 쏘아 올리는 기반을 마련했다. 선진국들에 비해 40여년 늦게 시작됐지만 1992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적 위성인 우리별 1호에 이어, 1993년에 우리별 2호를, 1999년에 우리별 3호를 연거푸 성공적으로 발사시켰다.
대한민국 우주개발과 인공위성 역사의 선구자
최순달 교수를 비롯해 제자와 직원들은 인공위성 개발 사업 중심이 한국항공우주연구원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독자 연구를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 벤처기업인 ‘쎄트렉아이’를 창업했다. 우리별 시리즈를 쏘아 올리며 기술력을 축적한 그들이었기에 쎄트렉아이 벤처 창업 후에도 말레이시아와 맺은 200억 원 규모의 라자크새트 공급 계약 등 적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 쎄트렉아이는 우주시스템 개발 경험을 기반으로 인공위성 본체, 전자광학카메라, 위성영상수신처리 지상국 개발을 위한 핵심기술을 확보하는 등 내실을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