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상급 소립자 이론물리학자로 고에너지 물리학 끊임없이 개척
그의 연구업적 토대로 7명 노벨상 수상자 나와
故 이휘소(李輝昭)
페르미가속기연구소 초대 이론물리부장
(1935~1977)
- 학력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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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미국 오하이오주 마이애미대 졸업(물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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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졸업(물리학 박사)
- 경력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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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 1966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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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 1962
미국 프린스턴고등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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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 1977
미국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 이론물리학부장
-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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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오펜하이머’로 불리는 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
이휘소 박사는 세계 정상급 소립자 이론물리학자로 우리나라 출생 물리학자 중 가장 업적이 뛰어나고 노벨물리학상 수상에 가장 근접한 학자다.
미국 이름 ‘Benjamin W. Lee’로 알려진 이휘소 박사는 우리나라가 배출한 가장 유명한 이론 물리학자로 고에너지 물리학을 끊임없이 개척한 세계 정상급의 이론가였다. 그의 가장 큰 학문적 업적은 게이지 이론(Gauge Theory)의 재규격화 정립과 참(Charm) 입자의 탐색에 관한 연구다. 이 연구업적을 토대로 훗날 7명의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불의의 사고로 42세의 아까운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는 1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그 중 60여 편만으로도 1만회가 넘게 인용될 정도로 주목받았다.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이론과 참(charm) 쿼크 탐색방법 제시
이휘소 박사가 제시한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는 소립자 물리학의 표준모형을 확립시켰으며, 그의 연구결과는 다른 여러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와인버그, 살람, 글래쇼(1979년), 트후프트, 벨트만(1999년), 그로스, 윌첵, 폴리처(2004년) 등이 노벨상을 수상하게 됐다.
핵의 베타 붕괴 같은 소립자의 약상호작용에 관한 페르미(Fermi) 이론은 1950년대 후반 공간 반전 대칭의 깨짐이 알려져 큰 변혁을 가져왔다. 그 후 전자기작용과 약상호작용을 통합하려는 이론들이 생겨났지만 약작용과 관련되는 게이지장의 재규격화가 큰 걸림돌이었다. 이휘소 박사는 게이지 대칭이라는 이론을 이용해 자연계의 네 가지 상호작용 중 전자기적 상호작용과 약한 상호작용을 통합하여 기술하려는 전자기약작용 이론에서 문제화되었던 재규격화의 해결책을 제시해 소립자 물리학의 표준모형을 확립했다. 그가 사망한 뒤 게이지 이론은 표준이론이 되어 ‘전기’와 ‘자기’ 현상을 통합 설명하는 Maxwell 이론에 버금가는 물리학 이론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휘소 박사의 업적으로 인해 와인버그, 살람, 글래쇼의 이론이 학계의 인정을 받아 이들이 1979년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했고, 트후프트-벨트만 팀 역시 1999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만약 이휘소 박사가 살아있었다면 1999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을 것으로 학계에서는 예상했다.
140여 편의 논문 발표, 그 중 60여 편만으로 1만회가 넘게 인용
이휘소 박사는 1974년 참(Charm) 쿼크의 존재와 관련해 ‘참 입자의 탐색(Search for Charm)’이라는 획기적 논문을 발표, 참 쿼크가 존재할 경우 이들이 결합할 때 나타나는 입자들의 성질을 규명했고 몇 달 뒤인 그해 11월 참 입자인 J(제이)/ψ(프사이)입자가 발견됐다. 이 입자를 발견한 리히터와 샘 팅은 1976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 뒤 ‘참 입자의 탐색’과 같은 그의 현상론적 논문은 실험물리 학자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됐다. 그는 1968년부터 이러한 참 입자가 있어야 한다고 예언했으며, 그 성질을 상세히 예상했다. 참 입자에 관한 그의 논문은 고에너지 물리학계의 전설이 되었고, 지금은 고전으로 널리 알려져 많이 읽히고 있다. 이휘소 박사는 생전에 무수히 많은 학회의 주제 발표자가 되어 세계 이론물리학계를 선도했다.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의 오펜하이머’로서 동료, 후배 물리학자들의 훌륭한 멘토 역할을 담당했다. 물리학자 돕는 물리학자로 '어렵고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이휘소 교수와 상의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평이 나있었다.
이휘소 박사는 우리나라 기초과학 연구 진흥에 매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1974년 미국 AID 차관자금에 의한 서울대학교의 이공계 교육 증진 계획을 적극 지원했고, 이를 통해 국내 대학교육용 기자재를 구입하고 실험시설을 확충해 1980년대 우리나라 대학원 수준을 향상시켰다. 또한 실험물리학의 중요성을 강조해 우리나라가 고에너지 국제공동연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했다. 그는 1972년부터 3년 동안은 재미 한국과학기술자협회 부회장을 지내면서 한국이 공업화하는 시기에 과학기술 분야에서 재미 한인 동포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또 이보다 앞서 이휘소 사후 추모심포지엄에 참석한 살람과 레더만 교수는 당시 교육부 장관에게 강력히 건의해 기초과학연구소를 통한 연구지원이 결실을 맺도록 지원해 한국 기초과학 연구의 발전에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