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반응에 양자역학을 처음 도입한 ‘쌍극자 능률계산’에 관한 논문 발표 헨리 아이링 교수와 공동으로 발표한 논문 ‘비뉴턴 유동이론’으로 세계적 명성 얻어
故 이태규(李泰圭)
KAIST 명예교수 (1902~1992)
- 학력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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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 1924
일본 광도고등사업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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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 ~ 1927
일본 교토제국대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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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 ~ 1931
일본 교토제국대학교 박사
- 경력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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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 ~ 1945
일본 교토제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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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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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이론화학자로 ‘비뉴턴 유동이론’을 발표하고, 화학 분야에 양자역학 처음 도입
이태규 교수는 뛰어난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아 1960년대 노벨상 후보에 올랐던 세계적 화학자다. 일제강점기였던 1931년 일본에서 차별과 경제적 어려움을 이겨내고 ‘환원 니켈을 이용한 일산화탄소의 분해’라는 논문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아 화제가 되었다.
해방 직전 리승기, 정의택과 함께 천재 과학삼총사로 불리던 그는 교토제국대학 교수 시절, 양자화학을 일본에 소개하고 확산시키는데 기여했다. 교토제국대학 교수로 정식 임명받았지만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당대 최고 석학들이 모여 있는 미국 프린스턴대로 건너갔다.
프린스턴대에서 만난 헨리 아이링 교수와 함께 발표한 '쌍극자 능률계산'에 관한 논문은 화학반응에 양자역학을 도입한 첫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액체가 흐를 때 경계부분에 있는 분자들의 움직임에 관한 이론인 ‘수송현상의 완화원리’도 헨리 아이링 교수와 같이 발표했다.
해방 직후에는 일본에서 잠시 귀국해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대 이공학부장,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장을 역임하고 조선화학회(대한화학회)를 설립해 초대회장으로 활동하며 한상준, 전무식, 최상업, 이용태, 장세헌, 권숙일, 김각중, 김완규, 이광표 등 후학을 양성했다.
한국 화학의 초석 다진 공 인정받아 과학자 최초로 국립현충원에 안장
이태규 교수는 미국에서 태평양과학협회 이사(1974년), 이론물리센터 소장(1975년) 등으로 활동하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로 초빙되어 박사 12명, 석사 24명 등 후진을 양성했다. 그는 한국 현대 화학의 기반을 구축하고 한국 화학의 초석을 다진 공을 인정받아 과학자로는 처음으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한국 최초의 화학박사로 화학 연구와 교육 기반 구축에 기여
1948년 미국 유타대 교수로 부임해 반응속도론, 액체이론 등에 관한 우수한 논문을 발표하며 촉망받는 화학자로 발돋움한 뒤, 1955년 헨리 아이링 교수와 공동으로 발표한 논문 ‘비뉴턴 유동이론’, 일명 ‘리-아이링 이론’(Ree-Eyring Theory)으로 국제학계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비뉴턴 유동이론은 물체의 변형속도가 외부작용(stress)에 비례하지 않는 비뉴턴 유동에서 점도(viscosity)의 변화를 이론으로 설명한 것으로 그동안 이론적 접근이 어려웠던 비뉴턴 유동현상을 다루는 일반 공식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이 연구업적은 두 교수의 이름을 딴 ‘리-아이링 이론’(Ree-Eyring Theory)으로 불리며 국제학계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이러한 학문적 수월성과 연구업적에 힘입어 이태규 교수는 1965년 노벨상 추천위원으로 위촉된데 이어 4년 뒤 노벨상 후보로 추천되어 한국인의 위상을 높였다.
이태규 교수는 미국에서 태평양과학협회 이사(1974년), 이론물리센터 소장(1975년) 등으로 활동하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로 초빙되어 박사 12명, 석사 24명 등 후진을 양성했다.
그는 한국 현대 화학의 기반을 구축하고 한국 화학의 초석을 다진 공을 인정받아 과학자로는 처음으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