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석유 합성, 아산화질소 상업화 등 국내 화학공학 발전 주도
한국에 최초로 구미식 화학공학 교육 도입, 전후 화공엔지니어 양성에 기여
故 이재성(李載聖)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24~2016)
- 학력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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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10 ~ 1945.03
동경제국대학 응용화학과 (수학중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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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2 ~ 1946.07
경성대학교 응용화학과 (공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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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09 ~ 1952.02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공학석사 (화학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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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09 ~ 1968.02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공학박사 (화학공학)
- 경력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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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05 ~ 1989.08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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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01 ~ 1969.12
한국화학공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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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01 ~ 1979.12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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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01 ~ 1979.12
동남아시아 공학교육협회(AEESEA)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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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01 ~ 1983.05
제3회 태평양 화학공학회의(PACHEC Ⅲ) 대회장
-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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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10
서울대학교 40년 근속공로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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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학공업 발전 주도한 국내 화학공학 선구자
이재성 교수는 한국에 구미식 화학공학 교육과정을 최초로 도입한 선구자로 학계에서 널리 존경받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4일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화학공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이재성 교수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부산에 피난중인 서울대로 복귀했다.
‘화학공학’은 20세기 중반에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했는데 해방 후 우리나라는 주로 일본의 학문을 답습한 ‘응용화학’을 중심으로 교육이 이뤄졌다. 이런 시기에 이재성 교수는 서울대로 돌아와 국내 최초로 서구식 화학공학 강의를 시작하며 향후 중화학공업 발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재를 육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의 노력으로 전후 복구사업에서 꼭 필요했던 비료, 시멘트, 판유리 등을 생산하는 화학공장을 설계하고 건설 및 운전할 수 있는 화공엔지니어들이 양성되었다. 이후 화공인력들의 활약으로 정유 및 석유화학공업이 중화학공업의 중심산업이 되었고, 한국 수출의 20%를 차지하는 효자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석탄, 정유, 원자력, 태양열 등 신재생 에너지 연구성과로 경제성장에 기여
이재성 교수는 화학공학 지식의 유용성을 실증하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1959년 국산 무연탄을 원료로 하여 인조석유를 합성하는데 성공,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으며 큰 화제를 모았다. 1964년에는 의료용 마취제인 아산화질소의 합성 및 분해 특성을 규명하고 한국화공기술연구소에 기술을 이전, 아산화질소의 대량 생산에 성공함으로써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화공엔지니어로서의 면모를 널리 과시했다. 이러한 기술력이 바탕이 되어 현재 아산화질소는 전량 국내에서 자급 생산하고 있다. 1972년에는 알칼리 금속증기의 열전도도 측정에 관한 연구결과가 원자력발전의 냉각에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과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서울시 문화상(학술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선진 화학공학 교육 도입, 화공엔지니어 양성해 중화학공업 발전에 기여
이재성 교수는 1962년 한국화학공학회 창설을 주도해 화학공학자와 산업체 기술인력의 학술활동 및 산학협동을 위한 구심체를 마련했다. 1983년에는 아시아-태평양 화학공학회의(PACHEC)를 한국에 유치, 대회장을 맡아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국제화를 선도했다.
그는 43년간 서울대 화학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교육과 연구시설 현대화를 통해 공학교육 환경을 개선하는데 앞장섰다. 1976년부터 4년간 서울대 공과대학 학장을 역임하며 700만 달러에 해당하는 정부의 지원금을 확보해 교육 및 연구기자재를 현대화하고 하드웨어 측면에서 서울대 공과대학의 연구여건을 세계적 수준으로 크게 향상시켰다.
또한 동남아시아 공학교육협회(AEESEA) 사무국을 한국에 유치하고 회장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해 수차례에 걸친 국제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동남아 지역의 공학교육 여건 개선에도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