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병리학자로서 실험동물을 통해 알레르기와 내분비 관계 연구 근대의학을 국내에 도입, 한국 기초의학의 기틀을 만든 대학자
故 윤일선(尹日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896~1987)
- 학력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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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07
일본 오카야마 제6고등학교 제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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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 1923.06
일본 교토제국대학 의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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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01
일본 교토제국대학 의학박사 취득
- 경력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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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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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의학자이자 병리학자로 한국 병리학 탄생과 발전 주도
윤일선 교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자이자 병리학자로 1920년대 일본에서 병리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한국 병리학 탄생과 발전을 주도했다. 알레르기와 내분비 관계를 연구해 기초의학의 기틀을 닦았고, 연구와 교육을 병행하면서 고등교육체제를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윤일선 교수는 독일의 저명한 병리학 루돌프 피르호의 제자이자 당대 일본의 유명 병리학자인 후지나미 아키라 교수의 문하생으로서 교토대학교에서 연구를 진행했다. 한국인 최초로 경성제국대학 조교수가 되었고, 후에 세브란스의전 교수가 되어 과민증, 즉 아나필락시스와 내분비 특히 호르몬과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연구를 계속하며 병리학을 비롯한 기초의학 연구의 기틀을 정립했다.
일제강점기 윤일선의 연구 분야는 크게 과민증과 악성종양으로, 이 분야는 요즘에도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그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은 1930년부터 1937년경까지 대단히 강도 높은 연구 활동을 벌여 세브란스의전 병리학교실은 업적 면에서 최고 전성기를 맞이했고 그의 말처럼 “우리나라 최초로 의학교육에 본격적인 연구 시스템을 도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는 그의 학자적 정직성과 열성, 세브란스의전 병리학교실의 우수하고 풍부한 인적 자원, 동물실을 포함한 연구시설, 연구비의 확보 등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루질 수 있었다.
한국인의 암에 관한 통계를 국제학회에 처음 발표하는 한편, 한국인 의사단체인 조선의사협회를 결성하고 최초의 우리말 학술지인 조선의보를 창간해 의료대중화 기여
윤일선 교수는 1927년부터 1945년까지 관련 논문을 53편 발표했는데 이 논문은 일어, 영어, 한국어로 일본병리학회지, 일본미생물병리학회지, Acta Medicinalia in Keijo, The China Medical Journal, 조선의보 등에 게재되었다. 그는 한국인에게 발생하는 기생충병인 휠라리아증(상피병)과 악성종양을 연구하면서 병리학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고, 1949년 한국인 최초로 영문 유수 국제학술지인 Cancer Research에 한국인 암에 관한 통계를 발표, 국제 의학계에 우리나라를 처음 알렸다.
같은 시기에 한국인 조선의사협회 등 의사단체 결성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최초의 우리말 학술지인 조선의보 창간에도 크게 기여했다. 순수 한국어 학술지인 조선의보의 첫 편집인이 되어 1938년 손기정 선수의 혈액검사 결과를 게재했다는 이유로 폐간될 때까지 일제 강점기 한국학자들의 주요 활동과 친목 모임을 주관했다. 또 한국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조선의보에 우리말로 된 논문을 게재하는 기록도 세웠다.
해방 후에는 경성대학 의학부장,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서울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 고등교육 체제 정립을 주도했다. 1946년 초대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에 임명되었고, 경성대학이 9개 전문학교와 병합해 국립서울대학교로 바뀌기까지 거의 매일 문교부와 보건후생부의 각종 위원회에 참석했다. 당시 그는 미군정청 학무국 조선교육위원회를 비롯해 의무교육심사위원, 보건후생부 고문, 문교부 고등교육위원을 맡아 초기 의학교육뿐만 아니라 대학교육 전반에 크게 공헌했다. 그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으로 국내 최초로 자연과학 분야에 이어 인문사회 분야에서도 학위를 배출했다.
1946년 10월에는 대한병리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고, 1948년에는 대한의학협회(지금의 대한의사협회) 회장을 맡아 봉사했으며 학술원 초대 회장, 원자력원 초대 원장, 한국과학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과학 전반의 발전에도 이바지했다.
사회봉사활동과 교육 행정 업무에도 불구하고 병리학 발전에 전력을 다했고 대한병리학회를 창립하는 등 학자로서의 자세를 견지했다. 우수한 문하생들을 많이 배출해 이들이 모두 한국 의학 각 분야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어 활동했다. 1961년 정년퇴임 때까지 본인이 직접 펴낸 논문이 58편, 지도논문이 256편이었고, 그가 배출한 의학박사는 132명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