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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과학기술유공자 인터뷰_박상대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작성일
2022-04-28
조회수
2295

한국 분자생물학계의 대부(代父)

첨단 바이오산업의 모태를 구축하다

 

DNA 손상 회복 및 발암성 유전병 연구의 세계적 선두주자

한국 생명과학 연구 및 바이오산업 발전의 근간 구축

과학계 리더로서 국가 과학기술정책의 수립과 개발에 기여

박상대3.JPG 이미지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암과 유전병은 무려 1만 가지 이상에 이른다. 학문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다면 질병을 예방하거나 치료제를 개발하기란 불가능하다. 줄기세포·유전자 치료와 같은 첨단적인 치료법이 개발하는 데 큰 역할을 해온 학문이 분자세포생물학이다. 60년 전, 불모지였던 학문의 싹을 틔우고 마침내 꽃을 피운 인물이 바로 박상대 서울대 명예교수다.

박상대 교수는 한국 생명공학 연구를 선도하고 기초연구 기반을 구축한 분자세포생물학자다. DNA 손상 회복 연구 분야 세계적 선두주자로서 유전체 불안정성으로 인한 암 유발 기전 분자생물학적 기초연구에 주력하며 우리나라 바이오산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다양한 DNA 복제 및 손상회복 관련 유전자를 분리하고 그 특성을 규명하며 생물학계의 거장으로 불릴 만큼 혁혁한 연구 성과와 인재 양성에 평생을 바쳤다.

1960년대 생물학 분야에 첫발을 디딘 박상대 교수. 국내 처음으로 분자생물학 분야 학술서인 <분자세포생물학>을 저술하며 학문의 보급에 앞장섰다. 열악한 연구 환경을 딛고 실험실에서 단안현미경과 씨름하며 혁신적인 연구 성과를 이뤄냈다. 대한민국 최초로 염색체 데이터를 기반으로 선천성 질환인 ‘터너 신드롬’을 진단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는 주요 대학병원에서 염색체 검사를 통한 진단을 활성화한 역사적 계기로 남았다. 또한 DNA를 정량화해서 정상 세포와 암세포의 차이를 연구하는 일에도 매진했다. 이때 DNA 합성을 눈으로 확인하는 방법을 고민하다 ‘방사선자동사진법’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활용하며 주목받았다. 훗날 이 연구는 표적치료제를 만드는 실마리가 되었다. 굵직하고 유의미한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으며 29세의 나이에 서울대 생물학과 최연소 교수로 부임했다.

박상대 교수는 실험실에 머무르지 않고 국제백신연구소 국내 유치,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 설립 등 내 분자·세포생물학 연구 기반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유전공학연구 지원 설계자 역할을 담당했다. 1985년 서울대 유전공학연구소의 초대 소장을 맡아 서울대의 유전공학 연구를 이끌었으며, 교육부 유전공학 심사평가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돌아보건대, 저는 늘 캄캄한 밤길을 뚜벅뚜벅 걸어왔던 것 같아요. 걷다가 불빛이 모인 마을을 발견하고, 다시 또 나아가곤 했지요. 60년 연구 여정은 척박했지만 황무지를 개척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했습니다.”

우리나라 기초과학연구 1세대로 초창기 유전공학을 도입한 박상대 교수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처음’이었다. 한계와 벽을 하나하나 뛰어넘으며 우리나라 분자세포생물학의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나아갔다. 그의 숱한 도전과 시행착오는 오늘날 우리나라가 바이오산업 강국으로 자리매김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학문의 탄탄한 기틀을 마련한 그의 열정과 노력은 후대 학자들이 획기적인 연구 성과들을 창출하는 길목을 틔워주었다.

 

생명과학을 전공으로 선택하신 계기가 있었을까요?

유년 시절부터 과학기술을 배우겠다는 꿈을 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인문학과 영어 과목에 관심이 많았지요. 대학교 진학을 앞두고 고민을 하면서 자연과학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자연의 진리를 깊게 연구고하며 몸소 깨닫고 싶었습니다. 특히 생명의 탄생이 매우 신비롭게 다가왔습니다. 생체 세포가 형성되고 성장하는 과정에 흥미와 관심이 많이 생겼지요. 생물학을 기초로 생명현상의 과정을 공부해보고 싶었습니다.

 

생명과학 중 특히 분자세포학에 집중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생명의 신비를 가장 가까이에서 접근할 수 있는 학문이 생명과학이었습니다. 자연스레 세포의 구조와 기능을 연구하는 분자세포생물학을 선택하게 되었죠. 분자세포생물학은 화학과 물리학, 생물학이 접하는 지점에 놓인 학문으로 DNA의 복제와 회복에 대한 기전을 연구합니다. 미개척 분야이기에 오히려 더 뛰어들어 알아가고 싶었습니다.

 

당시 불모지였던 학문 분야였기에 학습 환경이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대학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1946년이었어요. 당시 서울대학교 생물학과 건물이 청량리에 있었는데, 6·25 전쟁 폭격을 맞아 전부 사라졌어요. 동숭동 문리대 목조 건물로 옮긴 후 합동연구실에서 연구를 해야 했지요. 큰 공간에 실험 기자재 하나 없었습니다.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밖에 나가서 동식물을 채집한 후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생태학적으로 결론을 내는 것밖에요. 단안현미경 한 대도 귀한 시절, 현실은 답답했지만 저는 학문의 답을 찾아 나서야 했습니다.

 

대학생 때 직접 만드신 ‘전국대학생 생물학 심포지엄’이 64년째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학생 학술활동의 효시로서 의미가 깊은데요. 심포지엄을 개최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당시 친구가 길을 지나다가 <방사선과 생명>이라는 포켓북을 구입하곤 제게 건네주었습니다. 1945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인한 방사선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어요. 방사선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부터 시작해서 방사선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방법, 유전적인 현상은 어떻게 지배되는지에 대한 내용이 그 작은 책에 모두 실려있었지요. 그야말로 별천지의 지식이었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다른 학생들과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대학교 3학년 때 6개 대학 9명을 초청해 ‘방사선과 생물’이라는 주제로 ‘제1회 전국대학생 생물학 심포지엄’을 개최했어요. 당시 <한국일보>에서 심포지엄 현장을 취재해 대서특필했습니다. 지금과 달리 학문적 교류가 활발하지 않았던 시대이기에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학문을 교류하는 모습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현재까지 후배들이 심포지엄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배움과 연구를 이어나가셨습니다. 불모지로 알려져 있던 학문 연구를 꽃피우실 수 있었던 자양분은 무엇이었나요?

제가 가진 건 열정밖에 없었습니다. 공부에 대한 열망 하나로 나아갔습니다. 5년 동안 실험실에서 숙식하며 밤낮없이 연구하던 시절도 있었어요. 이때 고도의 기술을 많이 시도했습니다. 차곡차곡 쌓은 지식을 정리해 <분자세포생물학>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고요. 20대에 가장 정열적으로 몰입해서 양질의 논문을 쓸 수 있었습니다.

 

1970년 미국 유학길에 오르셨습니다. 당시 한국 분자세포학 분야의 위치는 어떠했으며, 유학을 통해 느끼신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학문에 대한 갈증이 더욱 깊어졌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때는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었어요. 아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1960년대 말에는 한국이 미국보다 과학기술로 500등 정도 뒤처져 있었을 거예요. 내가 알지 못하면 아는 사람에게 숙이고서라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죠. 알게 된 후에라야 비로소 자신의 연구를 스스로 할 수 있으니까요. 미국에서도 연구에 푹 빠졌습니다. 데이터를 보는 재미로 살았어요. 눈이 확 트였달까요. 더 넓은 세상을 만난 것 같았지요. 배운 것을 토대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DNA 복제와 회복은 별개가 아니라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는 큰 깨달음도 얻었습니다.

 

오랜 시간 국내 분자생물학 및 유전공학의 흐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셨을 텐데요. 세계적 수준에서 현재 한국의 위치는 어느 정도인가요?

대개 과학의 발전은 학문적 연구가 선행된 후, 이해하기 쉽도록 이론이 정리되면서 널리 전파되기 마련입니다. 196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유전공학 연구가 이어지면서 그 중요성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유전공학 열풍이 일어났어요. 유전공학 관련학과 지원자 수가 급증했습니다. 바이오산업이 발전하면 개개인의 삶은 물론 사회·경제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줄 것이라며 온 나라가 기대에 찼지요. 시대의 변화를 느끼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던 시기였습니다. 1984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 생명공학연구소가, 1985년 서울대학교에 유전공학연구소가 설립되었어요. 유전공학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발령받아 1989년까지 역임하면서 국내 생명공학의 발전과 바이오 연구를 시도할 수 있음에 기뻤습니다. 지난 60년 동안 급격한 발전을 이루면서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섰습니다. 후학들이 양질의 연구 성과를 내는 모습을 보면 대견하고 고마운 마음이 큽니다.

 

국내 최초로 UN 지원기관인 국제백신연구소를 유치하는 데 적극적으로 주도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국제백신연구소는 개발도상국 어린이들이 유전병으로 사망하거나 장애를 겪는 것을 막기 위해 설립된 국제기구입니다. 우리나라에 국제백신연구소를 유치할 생각으로 직접 신청했습니다. 연구소가 세워지면 세계 1급 학자들이 한국을 방문해 국내 학자들과 공동연구를 진행하는 좋은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실사단과 함께 발로 뛰며 대한민국의 백신 연구 실적을 보여준 결과 국제백신연구소 유치에 성공할 수 있었어요.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준비하는 일 또한 연구자의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생 한 분야에 매진하며 수많은 도전을 거듭하셨습니다. 학문 발전과 후학 양성까지, 60년 동안 한 길을 걸어온 원동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지식을 함께 나누고, 새로운 것을 즐겁게 배우는 자세가 저를 여기까지 이끈 것 같습니다. 동료들과 윤독회를 통해 학문의 즐거움과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모르는 것을 인정하면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신념 아래 늘 낮은 자세로 깨우치곤 했습니다. 배우는 일에 싫증을 내지 말고 가르치는 일에 게으르지 말라는 의미의 ‘학이불염 회인불권(學而不厭 誨人不倦)’을 마음 깊이 품었습니다.

 

앞으로 이루고 싶으신 꿈이나 목표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모르는 가운데 공부를 시작했기에 더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평생을 쏟아부은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논문집을 완성하려 합니다. 저에게는 학문적 기록이,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자료로 남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제 논문집이 학문 발전의 레퍼런스로 활용되길 바랍니다. 아직은 구상 단계이지만 논문집을 꼭 완성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되신 소감을 말씀해주세요.

제가 선택한 길을 게을리하지 않고 열심히 한 것뿐인데,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되어서 기쁩니다. 국가에 작게라도 이바지했다는 것으로 자부심과 보람을 느낍니다. 제가 걸어온 길이 후대에게 길잡이가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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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대 교수는 초창기 유전공학을 도입한 연구 정착과 한국 생명과학연구 발전에 굳건한 초석을 만들고, 장기적인 기초연구 진흥 기반을 마련했다. 1960년 서울대 동물학과를 졸업한 후, 1974년 미국 세인트존스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UC San Francisco에서 연구 활동을 지속했다. 1960년대에는 선천성이성질환에서 이질염색질 및 염색체의 이상과 DNA 합성 이상을 최초로 보고하고, 암세포염색체의 방사선감수성과 DNA 합성 양상에 대해 발표했다. 미국에서 귀국한 후 1980년대 초반까지 피부암세포주를 재료로 자외선에 의한 복제억제 및 회복과 절제회복에 대해 연구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20여 종의 DNA복제 및 회복관련 유전자를 분리해 그 특성을 밝혔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세포신호에 따른 유도발현유전자의 조절기전, 그리고 여러 생명현상의 플랫폼 역할을 담당하는 이질염색질의 유전자발현과 제어의 상호연관성을 규명하는 작업을 이어갔다.

1967년부터 2002년까지 서울대 교수로 활동하면서 국내 분자세포생물학 및 유전공학분야 교육의 시대를 열었다. 석·박사 122명을 지도해 한국 분자생물학계의 우수한 신진 연구자들을 대거 양성했다. 기초과학연구 활성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국제학회의 설립·지원·육성을 통해 한국 생명과학회의 발전과 세계화에 이바지했다.

부단한 노력의 결과, 1987년 제1회 한국과학상 생명과학 분야 대통령상, 1998년 대한민국학술원상, 한국과학기술한림원상을 수상했다. 국민훈장 녹조근정훈장, 과학기술훈장 창조장 등을 수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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