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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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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물 연구를 국제적 반열에 올려놓은 대표 여성과학자

천연물 신약 개발을 위한 연구기법 확립 / 국내 자생 및 희귀 천연물 자원의 보존과 개발에 기여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56 천연물 연구를 국제적 반열에 올려놓은 대표 여성과학자 김영중|천연물 신약 개발을 위한 연구기법 확립 / 국내 자생 및 희귀 천연물 자원의 보존과 개발에 기여 학력 | 1968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970 미국 인디애나대학 대학원 석사(생화학) 1976 미국 일리노이대학 대학원 박사(영양학) / 경력 | 1978~2011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교수 1989~2011 서울대학교 약대 약초원장 2009~2010 대한약학회 회장 2004~현재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 포상 | 2001 대한약학회 학술본상 2002 올해의 여성과학기술자상 2003 비추미여성대상 별리상, 로레알 여성생명과학상 2006 아모레퍼시픽 여성과학자상 과학대상 2007 한영 여성과학자 글로벌 리더 “여자가 뭘 할 수 있겠냐는 시선을 받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인생은 남들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가름 나는 것이다. 편견과 한계에 무너졌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우리나라 대표 여성과학자로 불리는 김영중 교수.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는 여성과학자를 향한 편견과 수없이 싸워 이겨야 했다. 여성 과학자로는 처음으로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가 된 그는 
서울대에 부임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평생을 천연물 연구에 매진하며 한국의 약용식물 자원의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알렸다. 현재도 그는 묵묵히 수많은 여성 과학자들이 걸어갈 길을 앞장서 개척해 나가고 있다. 그는 어렸을 적 몸이 약해 병원을 제집처럼 드나들어야 했다. 어린 아이의 눈에 보이는 건 병원 안의 모습뿐이었을 그때, 그는 흰 가운을 입고 자신을 정성껏 진료해주는 의사를 동경하게 된다. 의대를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한 그의 약점은 건강이었다. 약한 체력으로는 의대 과정을 견디기 어려울 거라며 가족은 의대 진학을 반대했다. 차선책으로 선택한 길이 약학대학이었다. 그는 좋은 약을 개발해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고 싶다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1964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에 입학한 그는 새로운 지식의 충전을 갈구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적·사회적 상황으로는 학업에 대한 목마름을 채우기 힘들었다. 더욱이 병약한 몸 때문에 집안으로부터 과보호를 받았던 그는 로망과 다르게 흘러가는 대학 생활에 흥미를 잃고 만다. 홀로서기를 위해 그가 준비한 건 유학이었다. 그는 선진 학문과 자유로운 생활을 위해 유학 시험을 봤고, 합격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그는 집안의 걱정을 뒤로 하고 1968년 미국 인디애나대학(Indiana University) 의과대학으로 떠났다. 유학은 그를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독립할 수 있게 해준 뜻 깊은 경험이 됐다. 젊음의 뜨거운 열정을 오롯이 학문에 쏟았던 시간이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특별한 것 없는 생활이었지만, 그는 그 시간 동안 홀로 설 수 있는 힘을 비축하며 정진해 나갔다. 언어문제, 문화적 충격,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도 초인적인 힘으로 견뎌낼 수 있었다. 우직하게 한 우물을 판 끝에 그는 인디애나대학 의과대학에서 생화학으로 석사학위를, 1976년 일리노이대학(University of Illinois)에서 영양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며 자리를 잡아갔다. 이후 플로리다대학(University of Florida)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한 그는 10년 만에 모교인 서울대 부임을 결정하며 귀국 길에 오른다. 그러나 10년의 세월도 교육 환경을 완전히 바꿔 놓진 못했다. 기대를 안고 돌아간 모교에서 그는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연구비 지원은커녕, 기반 연구시설 조차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연구에 필요한 시약을 구하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일 정도였다. “왜 이렇게 천연물 연구가 부진한 건지, 천연물 연구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뭔지 문제를 파악하려고 했어요.” / 당시 국내 천연물 연구는 그 존재감이 미미해 주목받는 분야가 아니었다. 한 번 파고든 건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렸던 그에게 시련은 곧 도전으로 다가왔다. 일단 우수한 학생들에게는 해외 유학을 권했고, 그 역시 시간이 날 때마다 미국 연구실로 가 연구를 하다 돌아오곤 했다. 돌아올 때 그의 가방에는 연구시약과 연구재료가 가득 담겨 있었다.  모든 걸 사비로 충당해야 했지만, 미국의 연구 환경은 그만한 투자를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실험기구들 때문에 보따리장수로 오해받기 일쑤였다. 세관에서 짐을 풀어 확인할 때마다 애써 얻어온 시약이나 연구 용품들이 오염되어 결국 쓰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1986년 물질특허가 도입된 후, 다행히 연구비가 조금씩 늘면서 국내에서도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게 됐다. 보따리장수 행세를 10년이나 한 후였다. 그가 천연물 연구에 매달린 이유는 많은 의약품들의 원료가 천연물에서 나오기 때문이었다. 버드나무 껍질에서 개발된 ‘아스피린’이 가장 유명한 예다. 그는 질병 치료에 사용해온 식물자원으로부터 신약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한다면 국제 경쟁에서도 비교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는 그간 우리나라에서 진행된 천연물 연구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고, 적절한 연구 방법이 부재하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는 세포생물학이나 분자생물학적 방법을 천연물 연구에 도입했다. 천연물의 활성과 그 작용기전을 규명하기 위해 실험동물이 아닌, 세포수준에서 천연물 소재의 생리활성을 검색하는 방법을 확립한 것이다. 이를 통해 비교적 짧은 시간에 미량의 천연물 시료로도 활성 검색이 가능해졌고, 동물실험에 비해 재현성과 일관성을 확보하기가 용이해졌다. 이 검색법을 활용해 국내 자생식물로부터 다양한 신약 후보물질을 분리할 수 있었으며, 그 화학적 구조와 작용기전을 규명할 수 있었다. 미국국립보건원은 1998년 그에게 5년간 200만 달러의 연구비를 지원하며 연구의 수월성과 독창성을 인정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국내외 천연물 관련 분야의 연구 기반을 확립할 수 있었고, 국가주도 천연물 신약개발 연구프로젝트를 조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었다. 또한 그녀는 천연물 연구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천연물 추출물 은행 및 천연화합물 라이브러리를 구축하고 많은 연구자들이 이를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가치를 극대화시키고자 애썼다. 그는 국내 자생 및 희귀 천연물 자원의 보전을 위해서도 꾸준히 노력했다. 이제는 그의 일부이기도 한 ‘서울대학교 부속 약초원’이 그 초석이 됐다. 김 교수는 천연물 자원의 지속 가능한 연구개발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경기도 일산, 시흥, 파주 일대에 85,000여 평에 이르는 국내 천연물 약초원 및 수목원을 조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현재 13,000여 평 규모로 확대돼 운영되고 있는 약초원은 한국 특산 자생식물과 천연약초의 보고이자 ‘자연 그대로의 실험실’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공들여 쌓은 탑은 견고해졌다. 약초원이 구축되고 나서부터 수많은 연구 성과가 탄생했다.
그는 연구 결과를 토대로 논문 250여 편을 국내외에 발표하고, 특허 30건 등록 및 2건 기술이전을 통해 국내 천연물 연구를 선도하며 산업화에 기여했다. 또한 후학 양성에도 힘써 21명의 박사와 55명의 석사를 배출하여 국내 천연물 연구 및 신약개발 연구가 도약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대한약학회 회장, 한국생약학회 회장 및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대한민국학술원 회원과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그는 서울대 1호 약학대학 여성 교수이자 대한약학회장으로 
여성과학자 지원 활동에 앞장섰다.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한국과학재단의 올해의 여성과학기술자상을 비롯해 제1회 아모레퍼시픽 여성과학자상 과학대상과 비추미여성대상 별리상을 수상하고 한영 여성과학자 글로벌 리더로 선정되기도 했다. “좋은 약을 개발해 아픈 사람들을 낫게 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 병약했기에, 그 누구보다 질병으로 인한 아픔을 잘 알고 있었던 김영중 교수. 공감과 이해는 그가 명실공이 한국의 대표 여성과학자로 명성을 쌓게 된 마중물이 됐다. 천연물에 대한 남다른 접근으로 새로운 연구의 길을 제시한 글로벌 과학자, 김영중.그는 편견과 한계에 무너지지 않고, 자신이 세운 신념 위에 길을 낸 인내와 투지의 본보기였다. 과학기술유공자의 명예 역시 그가 앞으로 이룰 수많은 업적을 위한 토대가 될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김영중 교수의 과학세계는 여전히 확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