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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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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 사료 연구로 한국 축산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동물영양학자

670편의 논문을 쓰며 평생 연구자로 살아간 세계적인 축산학자 / 후학 양성을 위해 선진적 농학 연구와 교육연구 토대를 세운 교육자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55 선진 사료 연구로 한국 축산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동물영양학자 한인규 | 670편의 논문을 쓰며 평생 연구자로 살아간 세계적인 축산학자 / 후학 양성을 위해 선진적 농학 연구와 교육연구 토대를 세운 교육자 학력 | 1956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축산학 농학사 / 1958 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물사료영양학 농학석사 / 1962 미국 유타대학 대학원 영양생화학 이학석사 / 1965 미국 코넬대학교 대학원 영양학 이학박사. 경력 | 1965~2000 서울대학교 교수 / 1982~1985 아세아태평양축산학회(AAAP) 회장 / 1989~1991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학장 / 1993~1998 세계축산학회(WAAP) 회장 / 2001~2004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포상 | 1971 과학기술상(대법원장상)  / 1995 상허대상 학술부문 / 2000 대한민국 녹조훈장 / 2015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 2016 AAAP 축산과학상 [제 인생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가난과 시련을 딛고 굳건한 의지로 꿈을 이룬
한 편의 성공 드라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헐벗고 굶주리던 우리 국민에게 쌀과 고기와 우유와 계란 등을 공급하는 일에 헌신했던 한인규 교수. 다음 생에도 다시 농과대학 교수로 일을 하고 싶다던 그는 70억 명이 넘는 모든 인류가 굶주리지 않게 하고 싶다는 큰 꿈을 꿨던 천생 과학자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으로 ‘가진 자가 베풀어야 한다’는 소신을 몸소 실천했던 그를 후학들은 여전히 기억하고, 또 존경하고 있다. 1934년 10월 경상북도 성주에서 태어난 한인규 교수는 어렸을 적부터 총명한 기질을 발휘하며 주변 어른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던 신동이었다. 그러나 집안의 사정으로 큰아버지 댁에서 자라야 했던 그는 늘 공부를 계속해도 되는지에 대해 자문하고 답했다. 한 번 외운 글은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던 그를 격려한 건 동네 어른들이었다. 그를 높게 평가한 동네 어른들은 그의 부모님에게 공부를 계속 시키라고 권유했고, 그 덕분에 그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어려웠던 가정환경은 그를 더욱 담금질하게 된 계기가 됐다. 고등학교 다닐 무렵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조차 부족해 고생했다. 전깃불이 없어 호롱불 밑에서 공부해야 했지만, 우등상과 개근상을 한 번도 놓치지 않을 정도로 그는 학업에 열심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다시 찾은 학교에서도 그는 공부에 매달렸다. 어수선한 학교 분위기에 집중하지 못한 다른 학생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 덕분에 1952년 그는 서울대 농과대학 입학시험에서 수석합격을 하게 된다. 그가 농과대학을 선택한 이유는 '가난' 때문이었다. 열심히 일하면서도 가난을 면치 못했던 농민들과 나라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그는 일찍부터 농대에 가기로 목표를 정하고 학업에만 정진했다. 그러나 꿈을 이루기 위한 그의 여정은 팍팍하기만 했다. 대학 시절 내내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를 계속 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의 성적은 늘 올 A였다. 서울대 농대 시절 제1회 고등고시 시험에 합격한 그는 농림부에 수습행정관으로 들어가지만, 연구에 대한 열정으로 유학의 뜻을 품게 된다. 수습행정관으로 일하면서도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월급을 저축한 그는 마침내 미국 코넬대학으로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 그는 유학 4년 2개월 동안 '남보다 3시간 더'를 생활 철칙으로 삼으며 끊임없이 학문에만 정진했고, 그 결과 영양학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그가 귀국한 건 1965년이었다. 미국에서 계속 체류도 가능했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국가 재건과 경제 건설에 동참해야겠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던 게 이유였다. 때마침 서울대 조교수 임용이 결정되었고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귀국길에 올랐다. / 꿈에 그리던 모교의 교수로 강단에 서게 된 그는 스스로 지켜나갈 10가지 행동원칙을 정하고 
학생들 앞에서 다짐하기도 했다. 그가 가장 중요시 여겼던 원칙 중 하나는 논문을 많이 쓰는 것이었다. 유학 시절 그의 지도교수였던 코넬대 토머스 리스 교수가 당부한 말 때문이었다. [여기서 배운 것은 다 잊어버려도 좋다. 그러나 학자는 논문을 계속 발표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을 명심해라.] / 그는 교수 생활을 하며 그 말을 잊지 않고 실천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매년 10편 이상의 단독 혹은 공동 논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했고, 그 결과 670편에 달하는 학술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다. 이는 한국 축산학계에서 이룬 그의 독보적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논문 주제는 한국의 가축에 사용되는 사료의 가치 평가부터 사료 개발과 생산까지 대단히 넓은 범위에 걸쳐 있었다. 한국형 사료성분표 및 사양표준 제정을 위한 기초연구를 지속하면서 그는 한국 동물영양학 및 사료공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의 연구 성과는 국제적인 SCI급 학술지에 138편이나 발표될 만큼 양적인 부분만큼이나 질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최신 연구 결과를 축산현장에 직접 반영하기 위해 산학협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그런 그의 활동은 우리나라 동물생명공학 연구그룹이 전진할 수 있는 견인차가 됐다.  그는 농과대학의 연구와 교육 선진화의 기틀을 세운 교육자였다. 대학 교재가 부실했던 시절 교재 집필에 힘을 기울였던 그는 단독 50권을 포함해 무려 113권의 책을 편찬했다. 민선 초대 학장으로 취임한 뒤에는 1989년 재단법인 농과대학 교육연구재단을 창립했고, 1991년 '상록농업생명과학연구대상'을 신설했다. 이 상은 그가 5억 원의 사재를 투입하여 신설한 상으로, 당시 대학의 연구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1982년에는 연구시설의 첨단화를 위해 IBRD 교육차관을 도입해 ‘전국농업과학공동기기센터(NICEM)’를 설치하고 초대 센터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한국 농학을 선진화된 제도 속에서 발전할 수 있도록 그 기반을 닦는 데 힘을 쏟았다. 그는 국내외 축산 관련 학회의 중추적인 학자로 활동하며 한국 축산학계의 위상을 세계에 알린 리더였다. 국내에서는 한국축산학회, 한국영양학회, 한국영양사료학회의 회장을 역임했고, 국제적으로는 아세아태평양축산학회(AAAP)와 세계축산학회(WAAP)의 회장의 자리에 올랐다. 특히 AAAP의 창립을 주도함과 동시에, 1985년 국내 축산학계에서는 처음으로 
국제학회인 AAAP 학술대회를 서울에서 열도록 했으며, 1988년 영문 국제저널 Asian-Australasian Journal of Animal Sciences를 창간하여 초대 편집장으로 해당 학술지를 SCI급 저널로 등재시키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2001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에 취임하며, 그의 열정은 더욱 진가를 발휘하였다. [한림원 건물 신축, 중장기발전계획 수립, 국제 한림원과의 교류] 등을 추진하며 초창기 한림원 발전의 기반을 다졌다. 회관 준공식에는 6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초청해 대국민 과학기술 홍보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 [한림원 회원은 국가와 사회가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기 전에 먼저 우리들이 국가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해 무한 봉사해야 한다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과학기술 발전의 요체는 인재라는 신념하에 그는 후학 양성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서울대 총 138명의 석ㆍ박사와 중국농업대학교(中國農業大學) 대학원생 28명 등 총 176명에 이르는 대학원생의 논문을 지도하였으며, 1,200여 명이 넘는 학부생들을 교육시켜 우리나라 영양사료학 분야의 학문연구와 사료산업의 발전 및 해외 시장 개척에 종사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했다. 서울대 정년퇴임 후에는 사재 8억 원을 기부해 목운문화재단을 설립, 각종 장학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어렸을 적,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단할 뻔 했을 때, '두뇌가 명석한 학생이 학비가 없어서 공부를 중단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그는 장학 사업을 통해 우수한 학생들이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일하기 위해 태어난 학자로 기억할 것 같아요.] / 오로지 연구와 강의에만 몰두해온 삶을 살았던 한인규 교수. 그는 과학자로서 열정을 불태웠고, 교육자로서 우수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헌신했으며, 나아가 한국 축산학계의 지평을 전 세계로 확장시킨 한국 축산학의 대부였다. 그의 열정은 '국민 모두가 쌀과 고기와 우유와 계란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풍요로운 나라'로 발전시킨 원동력이 됐다. / 70억 인구를 먹여 살리고 싶다는 그의 꿈은 그를 기억하고 존경하는 후학들에 의해 영글어가고 있다. 끊임없는 도전과 탁월한 기획력, 강력한 추진력으로 교육과 연구, 그리고 사회봉사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한인규 교수의 가르침이 후학들의 앞길에 아로 새겨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