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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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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식품과학의 체계를 구축한 과학자

한국인의 영양 불균형 문제 해결과 양질의 쌀 보급에 기여 / 한국식품연구원 설립해 식품과학의 세계화 연구기반 마련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50 한국 식품과학의 체계를 구축한 과학자 권태완  |  한국인의 영양 불균형 문제 해결과 양질의 쌀 보급에 기여 / 한국식품연구원 설립해 식품과학의 세계화 연구기반 마련
    학력 1950∼1959 서울대학교 화학과 이학사 1959∼1961 서울대학교 대학원 화학과 이학석사 1961∼1963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 대학원 이학박사 / 경력 1963 미국 UC Berkeley IMR 연구원 1966 미국 아이오와대학 조교수 1967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 부소장 1988 한국식품개발연구원 원장, 고문 1992 인제대학교 교수 / 포상 1952 화랑무공훈장 1976 국민훈장 목련장 1993 대산농촌문화상
    [내가 권박사님을 존경하는 이유는 한 사람이 일생을 바쳐 한길로 곧게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애써 박사님이 가시고자 했던 그 길을 계속 가야겠다.] (문갑순 인제대 교수) 
    권태완 박사는 올곧게 뻗은 나무와 같은 사람이었다. 한 번 뿌리내리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못하는 나무처럼, 그는 한 눈 팔 새도 없이 학문을 향해서만 내달렸던 시대의 대학자였다.  한 길만 걸었던 권 박사의 모습은 후학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다.  지금도 그가 걸었던 길을 후학들은 걸어가고 있다. 권태완 박사는 1932년 2월 16일 경기도 광주군(현 성남시)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향을 떠나온 그는 서울의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6월 19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화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서의 첫 수업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6월 26일이었다. 그러나 전날 발발한 전쟁 때문에 수업은 제대로 이어질 수 없었다. 이 까닭으로 그의 대학생활은 단 하루도 채우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이후 육군종합학교 간부 후보생으로 군에 들어간 그는 그 뒤로 장장 10년간 종군(從軍)하게 된다. 군에서의 경험은 그가 식품을 전공으로 택하게 된 계기가 됐다. 아무리 무기가 좋아도 배가 고프면 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중대장으로 부임한 후부터 중대원들이 영양적으로 균형 잡힌 식사를 할 수 있게끔 
    급양(給養) 제일의 방침을 시행하며 사기를 끌어올렸다. 휴전 후 대학 복귀를 위한 제대 발령으로 다시 학생이 된 전우들이 많았지만, 유독 그에겐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막사에 늘 화학책을 두고 읽을 정도로 학문에 대한 열망이 컸던 그는 국방과학연구소에서 군인의 신분으로 근무하며 1957년 봄 7년만에 모교에 복학도 하게 된다. 낮에는 대학에서 강의를 듣고, 밤에는 연구팀의 프로젝트를 거드는 일이 계속됐다. 고된 생활이었지만 학문을 향한 그의 마음은 더 뜨거워져만 갔다.2년간의 이중생활 끝에 그는 졸업장을 품에 안는다. 9년만의 졸업이었다.여전히 군인신분이었던 그는 육군대위의 계급장을 단 채 대학원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2년 뒤, 생화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유학을 결정한다. 당시 외국으로의 유학은 합법적으로 제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는 유학을 위한 제대 신청서를 내고 10년 8개월여 동안 입었던 군복을 벗었다. 1961년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Florida State University)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한 그는 2년 만인 1963년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이후 미국 UC버클리 IMR 연구원과 아이오와대학주립대학 조교수로 활동한 권 박사는 한국 식품연구자로는 최초로 세계적인 과학저널 『네이처(Nature))』(1966년 4월호)에 
    논문을 게재하며 명성을 쌓는다. 그는 1967년 유치과학자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이하 KIST)에 부임했다. 권 박사는 KIST에서 식품화학과 영양분야에서 한국 식품연구의 수준을 국제적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미국에서 돌아온 권 박사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식생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장섰다. 그는 국민이 단백질과 지방의 부족으로 영양 불균형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을 깨닫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데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권 박사가 주목한 것은 [콩]이었다. 우리나라를 원산지로 두고 있는 콩에는 질 좋은 단백질과 지방은 물론, 다양한 질병을 예방하고 개선하는 생리활성기능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콩을 많이 섭취하여 영양불균형 문제를 해결하도록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이를 통해 [콩박사]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또한, 그가 가장 주목한 건 식량의 국내 자급화였다. 권 박사는 이를 위해선 곡물과 과실의 수확 후 손실량을 최소화하는 
    저장기술의 보급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탄생한 [개량곳간]은 한국 농가에 혁신을 가져왔다. 수확 후 손실을 줄임과 동시에 품질저하를 방지하기 위하여 수확한 벼의 계량부터 건조, 가공, 포장까지 일괄적으로 처리되는 미곡종합처리장(Rice Processing Complex, 이하 RPC)을 보급함으로 쌀의 국내자급화를 완성했다. 권 박사는 한국 농업의 선진적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 했다. 이를 위해 한국식품개발연구원(현 한국식품연구원)의 설립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국민의 건강과 식품산업 발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한국식품개발연구원의 설립안]을 마련해 이를 추진했다. 1988년 연구원의 초대원장으로 임명된 그는 연구소의 주요 역할을 한국 식품의 세계적 경쟁력 확보, 국가 식품산업의 방향 제시, 대학원을 통한 전문인력 양성, 세계적인 과학자들과의 대외 협력 등으로 삼았다. 덕분에 현재 한국식품연구원은 한국 식품연구의 중추로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성과를 내는 국제적인 연구소로서의 위상을 갖추게 됐다. 또한, 그는 [콩세계과학관] 건립의 주역이기도 했다. RPC의 성과를 발표하기 위해 독일 출장길에 올랐다가 빵박물관을 견학한 그는 독일에 빵뿐만 아니라 맥주, 감자, 아스파라거스 등 단일품목으로 이루어진 박물관이 10여 군데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콩 문화의 종주국인 우리나라에 콩을 테마로 한 박물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콩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해 박물관 건립에 앞장서게 된다. 그의 열성에 힘입어 2001년 5월 26일 콩박물관 건립추진을 위한 첫 모임이 개최됐고, 그로부터 15년 후인 2015년 경상북도 영주시에 세워진 콩세계과학관이 문을 열었다. 과학관 건립에 5억 원을 쾌척한 그는 콩 관련 전문서적 100여 권을 기증하며 과학관을 기반으로 한국의 콩 산업 발전을 기원하기도 했다. 그가 후학들의 존경을 받은 건 수많은 업적 외에도 끊임없이 열중했던 학구열 때문이었다. KIST 재임 시절인 1982년 7월 19일, 권 박사는 아칸소대학의 객원교수로 다시 한 번 유학길에 올랐다. 우물 안 개구리로 남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 지천명의 노학자는 예정된 10개월의 시간 동안 대학원생들과 함께 생활하고 실험하며 배움의 즐거움에 빠져들었다. [차분한 마음으로 공부에 취미가 붙기 시작하니 나 자신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내 욕심에 비하면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매일 무엇인가 더 알게 되고 더 얻게 되는 느낌이어서 나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권태완 박사는 콩 연구로 국민 영양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고 과학적인 쌀의 관리 방법을 개발해 식품연구의 가치를 끌어올린 대표적인 과학자였다. 그의 성과로 한국인은 건강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됐고, 양질의 쌀을 지급할 수 있는 국가로 올라서게 됐다. 그의 식품과학 진흥 노력은 한국 식품 연구개발의 성장과 발전의 토대가 됐다. 정부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과학기술유공자의 명예를 헌정했다. / 학문을 향한 진정성 있는 태도로 국가에 필요한 가치를 과학기술에서 찾고자 노력했던 권태완 박사.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던 그의 헌신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