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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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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C녹십자를 국제적 기업으로 도약시킨 바이오제약 경영인

B형 간염백신 등 의약품 개발로 국민보건 증진에 기여 /
국내 첫 민간연구법인 설립으로 생명과학 연구기반 조성 허영섭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43 / B형 간염백신 등 의약품 개발로 국민보건 증진에 기여 / 국내 첫 민간연구법인 설립으로 생명과학 연구기반 조성 허영섭
 GC녹십자를 국제적 기업으로 도약시킨 바이오제약 경영인

-학력: 1964 서울대학교 공학사(금속공학), 1968 독일 아헨공과대학 금속공학과 디플롬(야금학), 1970 독일 아헨공과대학 박사과정 수료   
    -경력: 1980 ~ 2009 GC녹십자 대표이사 사장, 회장, 1987 ~ 1994 한국유전공학연구조합 이사장, 1991 ~ 1997 한국생물산업협회 초대 이사장, 1997 ~ 1999 한국제약협회 회장, 2001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포상: 1984 은탑산업훈장, 1992 국민훈장 모란장, 2000 인도네시아 정부 사트리아 바크티 수하다 카르티카상, 2009 과학기술훈장 창조장

만들기 힘든, 그러나 꼭 있어야 될 필수의약품 개발 허영섭 회장의 꿈은 인류가 발명한 3대 의약품으로 손꼽는 모르핀, 페니실린, 아스피린에 버금가는 신약을 개발하는 데 있었다. 
    그는 돈이 되는 치료제 개발보다 국민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신약 개발에 온 힘을 기울였던 필수의약품 국산화의 선구자였다.     
    GC녹십자의 도전은 의약품의 불모지에서 시작해 대한민국 제약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시작점은 GC녹십자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명확하게 제시했던 그의 리더십에 있었다.

허영섭 회장은 경기도 개풍군 북면에서 태어났다. 
    초가집만 총총히 자리 잡은 전형적인 시골마을에서 그는 11세까지 살았다. 
    그는 종종 고향에 대한 추억을 표현하며 그곳을 그리워했다. 산에 오르면 머루나 다래 같은 산열매를 딸 수 있는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아기자기한 마을이었는데 그곳에서 11살까지 살았다는 것이 나에게는 행운이었지요. 고향은 언제 생각해도 좋은 곳입니다.

청년 시절 그의 꿈은 과학자였다.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1964년 서울대 공과대학을 졸업한 뒤,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유학은 계속될 수 없었다. 1968년 독일의 아헨공과대학 금속공학과(디프롬)를 마친 허 회장은 동 대학에서 박사 학위 과정을 밟던 중, 유학생이라도 입영을 연기할 수 없도록 법이 바뀌는 바람에 갑자기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 그는 부친이 대주주로 있던 방위산업체 극동제약(GC녹십자 전신)에 입사했다. 
    사실 허 회장에게 극동제약은 의무복무 기간만 채우려고 들어간 의미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주어진 일에 늘 최선을 다했던 그가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허 회장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사명을 바꾼 것도 그의 생각이었다. 
    허 회장은 제약회사로서 크게 한 번 웅비의 나래를 펴자는 의미를 담아 1971년 회사 이름을 녹십자(綠十字)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이때부터 허 회장과 녹십자는 뗄 수 없는 인연의 고리로 묶이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중대한 결정에 관여하게 된 그는 회사에서 점차 빠져나올 수 없는 존재가 된다. 
    허 회장이 공무부장으로 입사한 때부터 GC녹십자는 흑자경영을 이어가게 되는데, 그 뒤에는 다른 세계로의 문을 열고 들어간 허 회장의 도전 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1971년 국내 최초이자 세계 여섯 번째로 혈액제제 공장을 건설하며 GC녹십자의 존재감을 국내외에 각인시킨 그는 2년 뒤인 1973년 고부가가치 의약품인 혈전용해제 유로키나제를 국내 최초로 개발하여 해외 수출도 본격화시켰다. / 혈액제제 공장 준공 기념 동판과 재떨이 사진

허 회장은 성과를 인정받아 공무부장, 관리부장, 기획실장을 거쳐 총무담당 상무, 전무이사를 역임한 후 1980년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독일 유학시절 한국의 보건 환경에 안타까움을 느꼈던 그가 대표이사 취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필수의약품의 국산화를 GC녹십자의 비전으로 삼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 길은 아무도 공감해주지 않는 외로운 길이었다.

당시 많은 제약회사들은 해외 제약사의 약품을 복제해 판매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그는 만들기는 힘들지만 반드시 필요한 필수의약품을 개발해 국민 보건 증진에 기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외 의약품 복제도 힘에 부쳤던 국내 상황에서 그의 행보는 이례적이었다.     
    허 회장은 독자적인 신약 개발에 도전했고, ‘국산화’의 꿈을 위해 당시 영업이익의 두 배가 넘는 약 2,600만 원을 투자해 경기 용인시 기흥구 신갈에 공장을 지었다. 
    그는 우직하게 한 길만 걸으며 GC녹십자를 백신 전문 제약사로 일으켜 세웠다.

결정적으로 GC녹십자가 도약하게 된 계기는 1983년에 찾아왔다. 
    B형 간염백신인 헤파박스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12년 연구 끝에 개발된 백신으로 당시 국내 전체 인구의 13%에 달하던 B형 간염 보균율이 선진국 수준인 2~3%로 떨어지는 쾌거를 달성하게 된다. 또한, 한국은 미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백신 개발에 성공한 국가가 됐다. 
    GC녹십자는 헤파박스로 인해 연간 매출이 두 배 이상 증가했으며, B형 간염환자들은 수입가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저렴한 값에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됐다. / 세계 3번째 B형 간염 백신 헤파박스 B

매출이 늘어나자 녹십자 내부에선 의견이 분분해졌다. 
    사업을 다각화해 수익을 극대화시키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제동을 건 사람은 바로 허 회장이었다. 그는 민간연구재단을 세워 사회에 환원하고, 생명공학 연구기반을 마련해 국내 과학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먼지가 쌓여도 이 땅에 쌓이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연구소가 바로 재단법인으로 설립된 목암생명공학연구소(현재 목암생명과학연구소)다.

과학기술처의 승인을 받아 설립된 제1호 순수 민간연구법인인 목암생명공학연구소는 그의 바람대로 유전공학 등 첨단 생명기술에 기반해 각종 질병의 예방과 진단 및 치료방법을 개발하여 국내 생명과학 연구기반의 조성과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이후에도 GC녹십자는 최초의 기록을 연달아 세우며 성공 신화를 이어갔다. 
    - 세계 최초 유행성 출혈열 백신 한타박스 개발 - 세계에서 두 번째 헌터증후군 치료제 개발 - 국내 최초 수두 백신 개발 - 국내 최초 독감 백신 개발 - 일본뇌염 백신, DPT(디프테리아, 파상풍, 백일해) 백신 개발

허 회장의 선구안은 결국 GC녹십자의 자체 기술력을 높이는 결과로 나타났다. 
    2009년 신종플루 팬데믹(Pandemic: WHO의 최고 경보단계)으로 전 세계가 패닉상태에 빠졌을 당시 수개월 만에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WHO가 인정한 백신을 개발하고 적시에 공급해 신종플루 진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곳도 다름 아닌 GC녹십자였다. 
    GC녹십자가 개발한 신종플루 백신은 외화 절감, 의료서비스 비용 절감은 물론, 국가적 혼란으로 생길 수 있는 사회적 비용까지 감안하면 단순한 금전적 측면을 넘어 몇 십 배의 사회경제적 가치가 있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화제가 됐던 건 그의 배포였다. 
    GC녹십자의 입장에서는 세계적으로 백신 공급이 부족해 국제 백신 가격이 치솟던 그때, 수출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허 회장은 눈에 보이는 수익보다 국내에 부족한 백신을 우선 공급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웠고, 그의 결정으로 국가의 보건 안보가 지켜질 수 있었다.

국내 혈우병 환우를 위해 설립한 한국혈우재단 사진 / 사회공헌에서도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적극 실천하며 앞장섰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혈우재단이다. 그는 1990년 열악한 환경에서 고통받는 혈우병 환자들에게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치료와 재활이 이뤄질 수 있도록 사회복지법인 한국혈우재단을 설립했다.
    많은 환자들이 이 재단을 통해 진료비 지원을 받으며 경제적 부담에서 벗어나게 됐다.     
    이밖에도 허 회장은 고리회(혈우병 단체 ‘한국코헴회’의 전신)와 ‘코헴의 집(수술한 혈우병 환자들의 쉼터)’을 수시로 방문하며 혈우병 환자들과 직접 소통했다.

허영섭 회장은 탁월한 바이오제약 경영자이면서도 항상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존경받는 기업인이었다. 2009년 68세로 타계한 그는 자신의 주식과 유산 3분의 2를 
    장학재단과 연구재단에 기부함으로써 마지막까지 사회적 모범을 보여주었다. 
    정부는 그의 업적을 인정해 과학기술유공자의 명예를 헌정했다.     
    나라와 인류 건강에 기여해야 한다는 비전 하나로 필수의약품 분야를 우직하게 개척해 나간 허영섭 회장. 그의 내면에서 발화된 에너지들이 오늘날 GC녹십자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