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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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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신성인 정신으로 한국 화학공학의 길을 열다 - ㉒ 故 이재성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㉒ 구미식 화학공학 교육을 최초로 도입한 선구자 故 이재성 서울대 명예교수

인조 석유 합성, 아산화질소 상업화 등 국내 화학공학 발전 주도 정유, 원자력, 태양열 등 신재생 에너지 연구성과로 경제성장 기여

우리나라 화학공학의 발전은 해방 이후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화학공학에 대한 개념은 20세기 초부터 알려졌지만, 식민 지배 영향 아래에 있던 우리나라가 고도의 화학기술을 수용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일본의 학문을 답습해 ‘응용화학’을 중심으로 교육받은 우리나라의 과학자들이 할 수 있는 연구 활동이란 국내 자원의 조사와 간단한 응용연구뿐이었다. 광복과 함께 채택된 구미식 교육제도는 한국 화학공학 발전의 마중물이 됐다. 미국식 교육제도로 운영된 서울대 공과대학의 화학공학과 발족으로 인재들이 양성됐고, 그들은 우리나라 경제개발계획의 선두에서 발전을 이끌었다. 故 이재성 교수는 국내 최초로 서구식 화학공학 강의를 시작했던, 
학계의 대표적인 선구자이자 널리 존경받았던 큰 스승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4일 전.
이재성 교수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로 향하고 있었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화학공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이 교수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급거 귀국한다. 지식인으로서 조국의 비극을 모른척 할 수 없었던 그는 부산에 임시교사를 설치해 운영중이던 서울대로 복귀했다.

조국에 돌아온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서구식 화학공학의 교육을 전파하는 일이었다. 국내 최초로 진행된 그의 구미식 화학공학 강의는 우리나라 중화학공업 발전에 필요한 인재를 육성하는 데 기반이 됐다. 
그의 노력으로 전후 복구사업에 필요한 화학공학 엔지니어들이 양성됐는데, 이들의 활약으로 정유 및 석유화학공업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이 교수 역시 한국 최초의 정유 공장인 대한석유공사(현 SK이노베이션)와 충주 및 나주에 세워졌던 비료 공장의 건설에 참여하며 국가 기간산업의 발전을 지원했다.

이 교수의 제자 사랑은 지극했다. 그는 43년간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제자들의 교육 환경 개선을 위해 
늘 적극적으로 나섰다. 또한, 4년간 공과대학 학장을 역임하면서 700만 달러에 해당하는 
정부 지원금을 확보해 서울대 공과대학 연구 환경을 세계적 수준으로 높이는 데 성공했다.
이외에도 한국화학공학회 창설을 주도하며 ‘산학협동’을 위한 구심체를 마련했고, 1983년에는 아시아-태평양 화학공학회의(PACHEC)를 한국에 유치, 대회장을 맡아 개최하며 우리나라 화학공학의 국제화를 선도했다.

조국의 화학공학 교육을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했던 이 교수. 천생 교육자였던 그는 연구에 대한 욕심도 남달랐다. 
당시 이 교수는 화학공학 지식을 실증하는 데 관심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국산 무연탄을 원료로 인조석유를 합성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에도 그는 의료용 마취제인 아산화질소의 합성 및 분해 특성을 규명해 한국화공기술연구소에 기술을 이전하며 아산화질소의 대량 생산을 가능케 했다. 그의 기술력 덕분에 아산화질소의 전량 자급 생산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972년에는 원자력발전의 냉각에 활용될 수 있는 알칼리 금속증기의 열전도도 측정에 관한 연구결과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서울시 문화상(학술부문)을 수상했다.

신재생에너지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석탄, 정유, 원자력, 태양열 등과 관련된 연구성과로 경제성장에 이바지했다. 이 교수는 몸담아왔던 학교를 정년퇴임하기 전까지 태양열 이용과 에너지의 저장법, 열펌프 역삼투막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또한 제어계측공학과와 컴퓨터공학과, 토목공학과의 도시공학 전공을 신설, 미래의 공학교육 다변화에 대비하며 오늘날의 공학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조국의 화학공학 기틀이 어느 정도 다져지자 그는 다시 유학을 떠났다. 화학공학을 좀 더 공부하고 싶다는 일념이 강했기 때문이다.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그의 자세는 학계의 본이 됐다. 제자들은 여전히 그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나라 발전에 앞장서고 있다. 외면할 수 있었음에도 온몸으로 조국의 비극을 껴안은 이 교수의 살신성인에 정부는 대한민국과학기술유공자의 명예를 헌정했다. 조국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삶을 헌신한 그의 마음가짐은 현재까지도 후배 과학자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