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스토리 뉴스

스토리 뉴스

일상을 이롭게 하는 연구에 헌신하다 - ⑭ 故 김동일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⑭ 인견을 국산화한 한국 화학섬유계의 선구자 故 김동일 서울대 교수

서울대 공대 기틀 잡는 등 과학기술 진흥 공헌 현장 기술 경험과 연구 경력을 바탕으로 산학협력 토대 마련

끈적하고 후덥지근한 날씨에 불쾌지수가 높아지는 여름,더위를 쫓아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는데,그 중 하나가 ‘냉장고 섬유’라고 불리는 ‘인견’이다.
인견, 혹은 인조견은 목재펄프에서 추출한 천연섬유로 나무의 성질을 그대로 담고 있어 얇고 가벼우며 부드러우면서도 살에 달라붙지 않아 여름철에 특히 인기가 많다. 
이러한 인조견을 처음 국산화한 과학자는 故 김동일 전 서울대 교수. 우리나라 화학섬유공학의 발전을 이끌었던 그는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선구자 였다.

김동일 박사는 나라가 혼란스러웠던 구한말 1908년, 평안남도 강서군 작은 마을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80여 가구가 자리한 작은 마을의 자작농이었던 부친은 각별한 교육열을 갖고 있었고, 그 덕에 그는 어릴 때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평양의 상수보통학교를 거쳐 평양공립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김 박사가 화학자의 꿈을 갖게 된 건 고등보통학교 시절 화학 참고서의 서문을 읽고 나서부터다. “화학이란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 학문이다. 
예컨대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할 때 비누와 치약이 필요하다. 창문에는 유리를 끼워야 한다. 집 짓는 데는 시멘트가 있어야 한다.”일상을 편리하게 기술에 감화된 그는 1926년 꿈을 이루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사가고등학교 이공계열을 거쳐 동경제국대학 공학부 응용화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최초이자 유일한 한국인 졸업생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취직은 쉽지 않았다. 일본 최고 대학이라는 동경제대를 졸업하고도 
한국인인 그에게 기회는 오지 않았고, 1년간 무보수 조교 생활을 한 끝에 1934년 도쿄 소재의 이와키 주식회사에 연구주임으로 입사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안전유리 제조기술의 개선을 위한 연구를 담당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그 결과, 동양에서는 처음으로 초산섬유소의 피막을 사용하여 안전유리를 만드는 데 성공하는 등 새로운 연구와 공정 개발로 생산원가를 절감해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달러박스’라고 불리며 사장의 총애를 받았다.

경력을 인정받은 그는 이후 인견사를 생산하는 가네보 화학공업주식회사로 옮기게 된다. 
회사의 평양 공장에서 연구부장을 맡은 그는 삼작산 섬유소를 원료로 인견사를 만드는 새로운 제조법을 개발해냈는데, 당시 그의 제조법은 세계 최초의 시도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컸다. 
‘가네라리아’라고 불린 이 인견사는 회사의 주력 상품 중 하나가 됐고,
그는 언론에서 주목받는 기술자가 됐다. 
이후에도 그는 꾸준히 연구개발에 전념하며 일본 정부의 특허를 7건 획득했다.

그는 1942년 경성방직을 이끌고 있던 김연수의 제안에 따라 다시 한 번 이직했다. 
이전 직장보다 월급은 훨씬 적었지만, 민족경제 자립이라는 뜻으로 세워진 회사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겐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경성방직의 영등포 공장장으로 일하며 
공정 개선 및 경영의 합리화를 도모해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일본계 방직회사를 앞지를 수 있었다. 그의 활약상은 상처받은 민족적 자존심 회복에 큰 도움이 됐다.

해방 이후 경성대 교수로 부임한 그는 새롭게 창립된 국립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교수 부족으로 인해 그는 자신의 전공인 섬유화학 뿐만 아니라,
공업화학개론, 유리공업, 화약학, 제지학 등 다양한 과목을 가르쳐야 했다. 
그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초대 학장으로 교수진 확보에 노력했으며, 좌우 이념 대립으로 인한 학생들의 갈등과 국대안 파동에도 의연하게 대처해 서울대 공과대학이 자리를 잡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그는 여학생들의 공대 입학 문턱을 낮춰 여성들이 기술자가 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했다.

2년의 학장직 임기를 마치고 교수직에 전념하던 중 한국전쟁은 발발했고, 그와 동시에 공과대학 2대 학장에 취임했던 이승기 박사가 월북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사람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그는, 도처에 흩어진 교수와 학생들을 모아 부산 동대신동에 학교를 재건했다. 
그는 그곳에서 학생들이 이론과 실무를 체득할 수 있도록 힘썼다. 
김 박사는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거의 맨몸으로 우리나라 과학기술 두뇌들의 산실을 만든 선각적 교육자였다.
직무를 마무리 짓고 교수로 복귀한 그해, 김 박사는 대한민국 학술원 개원과 동시에 회원으로 선출돼 타계한 1998년 7월까지 우리나라 학술 발전에 이바지했다.

한국 화학이 국제적으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것도 김 박사 덕분이었다. 
1956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개최된 제9회 국제순수및응용화학연합회(IUPAC) 총회에 대표로 참석한 그는 이후 소련의 반대를 무마해가며 IUPAC 입회를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우리나라는 1963년 런던의 제22차 총회에서 입회 승인을 얻어낼 수 있었다. 
한국 화학계의 대들보였던 그는 1951년부터 1972년까지 총 6번이나 대한화학회 회장을 맡아 학회 발전에 초석을 다졌으며 1966년부터는 화학회관 건립위원장으로 활동해 1971년 화학회관 건립을 이뤄냈다.

1959년 14년간의 공대 학장 및 교수 생활을 마감한 그는 이후 과학기술계 전반에서 더 광범위한 활약으로 헌신한다. 평소 에너지 자원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한국원자력원 초대 상임원자력위원으로 활동하며 제1차 원자력 학술회의를 치르고 대학에서 핵화학공업 개론을 가르치는 등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1962년에는 상공부 산하의 공업표준심의회의 초대 회장직을 맡아 2년 동안 우리나라 공업표준규격의 제정 등에 공헌하기도 했다. 
같은 해 그는 한국 화학섬유공업 발전의 도화선이 됐던 홍한화학섬유주식회사의 부사장에 임명됐는데, 일제 치하에서 화학공장 재직시 쌓은 경험을 살려 국내 최초로 비스코스 인견사 공장을 성공적으로 건설해내는 성과를 거뒀다.

그는 늘 과학기술의 혁신이 곧 국가 발전이라는 신념을 전파해왔다. 이런 그의 신념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의 창설에 기반이 됐다. 김 박사는 1966년 9월 과학기술 관련 단체를 통폐합한 후 전국과학기술자대회를 개최하여 과총을 설립했다. 
이후 과총 초대 부회장으로 추대된 그는 「과학기술진흥법」 제정, 과학기술 전담부서 설치, 
「과학기술인의 신조」 제정 등 한국의 과학기술 진흥을 위해 봉사했다.

국가에 필요한 일이라면 사재(私財)를 털어 투자했다. 
1960년대 후반, 한국 연안의 대륙붕에서 석유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보고됨에 따라 정부는 한국석유산업개발센터를 설립할 계획을 세운다. 평소 에너지 자원에 관심이 많았던 김 박사가 이사장직을 맡게 됐는데, 부족한 예산을 충당하기 위해 사재를 직접 출연하며 의욕을 보였다. 그는 석유산업 관련 최신정보 수집 창구 역할을 하며 우리나라 석유산업의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액화천연가스(LNG)의 도입을 누구보다 가장 먼저 주장하기도 했다.

1986년 과총 산하의 원로과학기술자문단 초대 단장으로 추대된 그는 퇴직한 고급 과학기술인력의 활용을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후 한국과학기술자문봉사단으로 개칭된 이 기관은 지금도 많은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그는 위에 열거한 단체 외에도, 40여 개에 이르는 각종 위원회의 위원과 정부기관 자문역을 맡아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산학협동과 국제협력에 기여했다. 
그의 빛나는 업적은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에 촉매제가 됐으며, 이에 정부는 국민훈장 모란장과 무궁화장을 수여하며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완수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고 평생을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에 헌신했던, 시대의 과학자였다. 또 같은 시대의 과학자들이 상아탑 속에서 스스로 높은 성벽을 쌓고 있을 때, 그는 산업과 학술간의 벽을 허물어 융합시키는 데 전력을 다했다. 한국화학섬유계의 선구자이며 과학기술 역사의 산증인인 김동일 박사. 
그의 올곧았던 외길 인생은 1998년 막을 내렸지만, 그의 업적은 과학기술유공자의 이름과 함께 국가의 역사로 예우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