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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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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기초생물학의 저변을 넓히다 - ⑬ 조완규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⑬ 한국 기초과학 발전에 공헌한 ‘한국 생물학의 아버지’ 조완규 서울대 명예교수

우리나라 교육 및 과학 행정을 체계적으로 정립하는 데 헌신 최초 국제기구 ‘국제백신연구소’ 유치 및 백신 개발 지원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것들의 탄생 뒤에는 본질적인 현상의 원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기초과학이 있다.
생물학도 ‘생명체는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의문에서 출발하는데, 
여기에서 도출된 여러 지식으로 의학, 농학, 수산학 등의 응용 분야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즉, 생물학은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가장 기초적인 학문인 것이다. 
그러나 당장 먹고 살아갈 것이 급했던 대한민국에서 생물학이라는 학문은, 대접받을 수 있는 분야의 것은 아니었다. 열악한 상황에도 생물학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하고, 학문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 노력했던 한 과학자의 노력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질적으로 성장하는 데 큰 기반이 됐다. 조완규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의 삶은 우리나라 생물학의 역사와 가장 가깝게 맞닿아 있다.

1928년,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 조완규 박사는, 청빈한 부모님 밑에서 근검절약을 생활화하며 자랐다. 
그는 책 읽기를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탐정소설과 과학소설을 탐독했는데, 얼마나 좋아했는지 책에만 너무 몰두하다 중학교 입학시험에 낙방했을 정도였다. 낙담한 양친을 본 조 박사는 소설책 읽기를 중단하고 입학시험에 매달려, 중학교에 겨우 진학할 수 있었다.

조완규 박사는 일찍부터 하고 싶은 공부를 정해 놓은 상태였다. 중학교 때 만난 화학 선생님이 화학을 너무 재미있게 가르쳐 준 덕분이었다. 그러나 경쟁률이 셌다. 서울대 화학과 지망생만 90명에 달했다. 교수도 몇 명 없는 시절, 한 학과에 많은 학생이 몰리는 걸 보고 제대로 배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그는 생물학으로 눈을 돌렸다.
다윈의 진화론, 파브르 곤충기 등의 책을 보며 생물학에서도 매력을 느낀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당시 서울대의 연구 환경은 열악했다. 실험실에는 현미경 3대와 정온기, 전자저울뿐이었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조 박사는 당시 한라산과 지리산을 다니며 곤충 채집을 열심히 했다고 회고했다. 
“대학을 어렵게 다녔지만, 확신은 있었어요. 당시로써는 첨단 분야인 세포학을 배우면서 생물학이 앞으로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봄에 새로 돋아나는 새싹을 골라 사생하며 생명의 힘을 실감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대학 3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는 2년 동안 피난을 갔던 부산에서 공부한 뒤 대학원에 입학했다. 
물론 학위 과정 이수는 쉽지 않았다. 실험 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는 열악한 실험실 환경에서 항생제의 생쥐 백혈구 운동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하고 
그 결과를 종합해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어려움은 계속됐다. 
결국 조 박사는 종이와 연필로만 할 수 있는 연구를 택했고, 출생 성비 연구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이 연구는 그가 발생생물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1957년 서울대학교 생물학과 교수로 임용된 그는 본격적으로 발생생물학 분야, 특별히 포유동물의 난자 성숙과정을 연구했다. 그러나 나라든, 학교든 ‘연구비’라는 것을 지원해주기 어려운 때였다. 
실험용 쥐도 여기저기서 얻어 썼는데, 더는 그렇게 연구를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일본에서 실험에 적합한 계통의 쥐를 얻어다 사육하기 시작했다. 
쥐를 사육하는 데 들었던 상당한 비용은 조 박사의 사비로 충당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연구는 곧 한계를 맞았고, 그는 연구를 계속 진행하기 위해 1964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조 박사는 사육 중인 생쥐의 난소로부터 배란을 유도하는 실험을 계속 진행했고, 
그 연구를 통해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연구비 1만5천 달러를 지원받았다. 
이후 귀국한 조 박사는 연구비로 서울대 문리대학 연구실 내에 실험실을 꾸렸다. 
미국에서 한 연구와 동일한 연구를 국내에서도 진행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는 연구실 학생들과 배양 중인 포유류 난자 및 배아의 발생 과정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계속된 실험 끝에 그는 쥐의 난소에서 축출한 난자가 배양액에서 감수분열이 진행되며 성숙하지만, 배양액 내에 호르몬이나 신경전달물질의 전령으로 작용하는 화합물이 존재할 경우, 
난자 성숙이 가역적으로 억제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 포유동물 난자, 수정란 그리고 배아를 휴대 이동할 수 있는 미세관 배양법(Micro-tube Culture Method)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난자연구에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보통 우리가 배양할 땐 배양접시를 쓰는데 배양접시 가득 파라핀 오일을 채웁니다. 
그런데 파라핀 오일을 쓰던 걸 또 쓸 순 없어요. 
우리같이 가난한 나라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실험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돈 안 들고 할 시험방법이 뭔가 하는 생각으로 개발해 낸 것이 바로 미세관 배양법이었습니다.”

그렇게 차근차근 기초생물학 분야의 저변을 확대해 나갔던 그는, 학자가 아닌 교육자로서도 학생들의 연구 환경 개선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1974년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초대 학장으로 임명된 후부터 대학의 기틀을 세우고자 노력했고, AID 차관사업 주관, 교수 공채제도 확립, 연구비 중앙관리제 도입, 
자연과학종합연구소 개설 등 기초과학연구중심대학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했다. 
이후 서울대 부총장, 총장 등을 역임하며 대학의 자율성 확보와 학내 안정화에 기여했다.

그는 36년간의 교수 봉직 기간 동안 30명의 석사와 18명의 박사를 배출했고 총 113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조 박사의 제자들은 그의 호인 ‘설랑(雪浪) 문하생’으로 불리며 현재 국내외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발생학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조 박사의 행보는 그대로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사가 됐다. 
그는 1980년대초 유전공학에 대한 지식이 전무할 때, 그 중요성을 미리 알아보고 유전공학학술협의회의 창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협의회를 통해 유전공학 분야 인력양성, 특별연구비 지원, 국제협력 등을 추진했고, 1991년에는 유전공학 지식의 산업화를 이끌 생물(바이오)산업협회를 창립해 향후 바이오산업 발전의 추진체로 역할을 하게끔 했다.

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으로 선임된 이후부터는 과학기술계 단체의 중심축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초대 원장으로 추대된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서는 다양한 학술 활동과 국내외 협력 등을 통해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가장 뿌듯하게 생각하는 일은 후진국 어린이 질병 퇴치를 위한 국제백신연구소(IVI)의 본부를 한국에 유치했던 일이었다. 당시 그는 국가의 국제적 위상이 올라가려면 국제기구 본부가 한국에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귀한 어린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백신연구소가 생긴다는 사실은 그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는 연구소 국제이사, 연구사무총장, 특별고문 등으로 활동하며 우리나라 유일한 국제기구인 연구소의 질병예방용 백신 개발을 지원했다. 
“콜레라 백신 한번 맞으려면 적어도 5만 원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국제백신연구소에서 1500원짜리 백신을 개발한 뒤로는 해마다 100만 명이 이 백신을 맞고 있습니다.”

91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인 그는 최근 하나의 이름표를 더 추가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인유공자회의 회장의 자리다.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자리지만, 그는 설렌다고 했다. 
후배 과학자들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의 눈은 여전히 미래의 대한민국을 향해 있다.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서 성공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 스스로 고민해보는 시간을 통해서 자신만의 활로를 개척해갔으면 좋겠어요.
저는 제 자리에서 후배들이 자부심을 갖고 연구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만드는 데 힘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