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스토리 뉴스

스토리 뉴스

기계산업을 주조하고, 전통의 소리를 울리다 - ⑦ 故 염영하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⑦ 종(鍾)의 신비를 밝힌 한국 범종 연구의 대가 故염영하 서울대 명예교수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7 종(鍾)의 신비를 밝힌 한국 범종 연구의 대가 故 염영하 서울대 명예교수 - 기계산업을 주조하고, 전통의 소리를 울리다 - 산업발전을 이끈 실무형 공학자로 공작기계·재료학 연구 - 선도 보신각 새 종, 석굴암 대종, 해인사 종 등 한국 전통 범종 복원

5월 22일 석가탄신일. 세상을 밝히는 색색의 연등이 하늘을 뒤덮고, 장엄하고 청아하면서, 경건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마음을 평안케 한다. 불교에서 범종은 부처의 국토로 인도하기 위한 지혜의 소리를 의미한다. 특히 한국 범종은 독보적인 예술성과 과학성으로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으며, ‘코리안 벨(Korean Bell)’이라는 학명이 있을 정도로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5월 전국 곳곳에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전문지식으로 한국 전통 범종의 신비를 입증한  한 명의 과학자를 떠올린다. 바로 한국 범종 연구의 최고 권위자, 故 염영하 서울대 명예교수다.

염영하 교수는 1919년, 함경남도 이원에서 9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중학교 2학년 때 부친이 작고하시며 집안이 어려워졌지만, 일본인들의 가정교사를 하면서 학비를 벌어 학업을 이어갔고, 전기, 무기재료, 금속공학 등으로 유명한 일본 도호쿠제국대학(東北帝國大學) 공학부에 입학했다.

염 교수가 기계공학을 전공한 이유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였다. “일제 치하 한국인들은 대학 졸업 후 취직하기가 매우 어려웠어요. 좋은 자리는 모두 일본인들 차지였죠. 중학교 시절 돈 많이 벌려고 광산학과를 생각했다가, 자립해서 철공소를 하려고 기계학과로 방향을 바꿨어요.” (월간 «과학과 기술» 1994년 12월호, ‘원로와의 대담’ 中)

염 교수는 1945년 대학 졸업 후 귀국, 경성공업전문학교와 경성대학 이공학부에서 2년 간 강의를 맡았고, 1947년에는 삼화정공주식회사에 입사했다. 그는 회사에서 기술부장, 생산부장, 기술자 양성소장 등을 역임하며 현장에서만 배울 수 있는 탄탄한 실무 능력을 익혔다. 이 경험은 후에 산업체 기술 지도와 자문을 훌륭히 수행하게 하는 밑거름이 됐다.

염 교수는 1949년 3월 서울대 공과대학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다시 강단에 섰고, 1984년 정년퇴임까지 35년 간 공작기계, 금속재료, 주조, 기계공작법 등 기계 산업의 기반이 되는 분야에서 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그는 학생들에게 많은 실용 교과목을 교육시켜 산업체에 배출했고, 이들을 통해 우리나라 기계제품들의 품질이 크게 향상될 수 있었다. 또 중소 핵심 기업은 물론 방위산업체, 철도차량 업체 등 수많은 기업에 기술지도, 협동연구, 자문 등을 수행하며 국가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염 교수는 해방 후 나라의 공학기술이 미비하던 시절, 수많은 연구 활동을 통해 기계재료 기술 분야의 기초를 다지는 역할을 했다. 특히 철강 재료들의 굽힘, 성형 등 가공기술과 관련된 기초 연구, 반복된 충격과 하중 강도에 따른 내구성 변화에 대한 연구에서 뛰어난 결과를 내며 두각을 나타냈는데, 1965년부터 해외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며, 우리나라 초창기 재료강도학 수준을 크게 높였다.

그는 교육에 있어서 새로운 것을 적용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1952년부터 1년간 영국 런던대학교와 미국 미네소타대학교에서 유학한 이유도 기계공학 신학문과 서양식 공학 교육과 연구 방법을 배워 국내 대학에 도입하기 위해서였다. 공학 교육의 발전을 위해 염 교수가 저술한 «공작기계», «금속재료학» 등 많은 교과서는 최근까지도 명저로 평가되며 사용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금속 재료 및 제작 연구의 권위자였던 염 교수가 금속 악기 중 으뜸으로 꼽히는 ‘종(鍾)’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그는 1970년대 초 등산을 다니며 유명 사찰의 종에 호기심을 느꼈다. 작은 종도 한 번 울리면 4km까지 미치고 큰 종은 40km 안에서도 들을 수 있으며, 어떠한 종소리는 한 번의 ‘엉~’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 번 ‘엉~엉~엉’ 이어지기도 한다. 그는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별반 이루어진 게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 연구에 나섰고, 이후 20년간 전국의 산사를 빠짐없이 찾아다니며 종을 관찰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현대 기계 산업에서 문화유산으로 과학적 탐구대상이 바뀐 것이다.

염 교수는 종 연구를 하며 곤욕을 치렀던 적도 많았다. 진주 삼선암과 진도 쌍계사는 사찰 측이 외부노출을 꺼려 한사코 종의 공개를 마다했으나 삼고초려 끝에 실물을 영접할 수 있었고, 또 해남 대흥사 경내의 표충사 유물전시관에 소장되어 있는 종을 탐사하러 갔을 때는, 한밤중 현지에 도착해 구멍가게에서 건빵 등을 사 여관에 들었는데, 간첩으로 신고 되어 파출소에 끌려간 적도 있었다.

몸과 마음 모두 고생이었지만, 종 연구와 관련해서는 일체의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했다. 당시 과학기술은 경제발전의 수단으로 종속돼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연구에만 투자가 집중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염 교수는 적지 않은 사재를 털어 넣기도 했다. 그는 이 점에 대해 “내가 좋아서 한 일이고 성과도 있었으니 아무런 후회도 없다”고 말했다.

종에 대한 호기심은 연구를 지속하게 한 촉매제였다. 그는 종의 아름다움에 빠져 독보적 연구를 써 내려갔다. 1984년 8월 말 서울대를 정년퇴임한 뒤에도 줄곧 연구실에 출근, 하루 8시간씩 종 연구에 매달려온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의욕을 보였다. 특히 우리나라 대표적 문화재인 성덕대왕 신종(일명 봉덕사종 또는 에밀레종)과 상원사종 등 신라시대의 종은 물론 고려시대의 종, 조선시대의 종의 특성을 파악하여 우리나라 종이 서양 종, 중국 종, 일본 종에 비해 예술적, 과학적으로 매우 뛰어난 종임을 입증했다.

“우리나라 종은 소리와 미에 있어서 세계 최고의 수준이다. 특히 우리 종은 다른 나라 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음통과 일정한 배열의 유두(乳頭) 등 음향학적 설비를 갖추고 있어 조상들의 슬기를 엿볼 수 있다.” (동아일보, 1991년 10월 1일자 인터뷰 기사 中) 염 교수가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은 이처럼 우수한 우리의 종이 고려말 중국 종의 영향으로 전통 음과 미가 훼손된 것, 그리고 조선시대 불교가 국가의 배척을 받게 되면서 걸작품의 맥과 기술이 끊기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염 교수는 종 연구를 통해 우리나라 전통과학기술의 우수성을 알리고자 했다. 1991년까지 범종 연구에 관한 논문 및 연구보고 52편을 저술하였고, 그 후에도 한국범종연구회 회장을 장기간 역임하면서 범종 연구의 기틀을 다졌다. 같은 해 자신의 연구를 집대성한 «한국의 종»과 «한국 종 연구» 등 다수의 명저를 출판하여 한국 범종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널리 알렸다.

염 교수는 한국 범종에 대한 답사와 과학적 연구만을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종의 설계, 제작 및 총괄 감리를 하여 수많은 국내의 대종들을 주조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보신각 새 종, 석굴암 대종, 해인사 종 등 8구의 범종과 독립기념관 통일의 종을 직접 제작 지휘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전통 기술을 복원하고 그것을 실제로 구현한 디자이너이며 제작자였다.

염 교수는 1995년 6월 14일 한국 범종 답사 출장 중 별세했다. 종의 신비에 마음을 빼앗겼던 그의 마지막도 종과 함께였다. 50여 년간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발전에 헌신한 故 염영하 교수. 그는 우리 조상의 과학기술과 독창적 예술성이 담긴 한국 범종의 신비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자랑스러운 한국의 과학자였다. ‘과학기술유공자’라는 이름표가 추가된 지금, 그의 업적은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은은한 종소리의 잔향처럼 그가 걸어온 발자취 역시 우리 곁에서 조용히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