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스토리 뉴스

스토리 뉴스

한국의 파브르, 나비 연구로 민족의 자긍심을 깨우다 - ⑤ 故 석주명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⑤ 한국산 나비에 대한 분류학을 정립한 생물학자 故 석주명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 연구부장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5:한국산 나비에 대한 분류학을 정립한 생물학자 故석주명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 연구부장 - 한국의 파브르, 나비 연구로 민족의 자긍심을 깨우다 - 75만 개체에 대한 표본 조사…통계 기반 생물분류학으로 기존 이론 뒤집어 우리나라 근대 생물학 정립에 기여한 세계적인 나비학자, 학력(1926: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졸업,1929:일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농학과 졸업),경력(1931:송도고등보통학교 박물교사,1943:경성제대 부설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 소장,1945:수원 농사시험장 병리곤충부장,1946:과학박물관 동물학 연구부장)

만물이 생동하는 봄. 봄의 전령으로 불리는 나비는 우아한 날갯짓으로 이곳 저곳을 날아다니며 봄을 안내한다. 그런데 혹시 알고 있는가? 이토록 아름다운 나비들이 이름도 없이 허공을 맴돌았다는 사실을. 아무 말 없이 나풀거리며 날아다니는 작은 곤충에게 사랑을 쏟았던 나비박사 故석주명 선생은 한국의 나비들에게 우리 이름을 붙여준 첫 번째 과학자였다.

1908년 평양에서 태어난 석주명 선생은 집 안보다 집 밖에서 노는 걸 더 좋아하던 개구쟁이였다. 그런 그가 마음을 다잡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입학 후 처음으로 받아 본 꼴찌 성적표. 충격을 받은 석 선생은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책을 읽고 공부했다. 그의 끈기와 집념은 이때부터 발동되고 있었다.

그가 곤충학에 눈을 뜬 것은 일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유학 시절이었다. 일본 곤충학계 실력자 오카시마 긴지(岡島銀次) 선생은 학생들과 함께 한 곤충채집에서 석 선생만이 하루살이를 잔뜩 잡아오자, 그에게 훌륭한 곤충학자가 될 것 같다고 칭찬했다. 이후 그를 줄곧 눈 여겨 보고 있던 오카시마 선생은 졸업을 앞둔 석 선생에게 한반도에 사는 나비를 연구해보라고 조언했다.

학교 졸업 후 모교인 송도중학교 생물교사로 부임한 무렵, 석 선생의 나비 사랑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는 나비연구를 위해 10여 년 간 전국 채집여행을 다니며 무려 75만 마리에 이르는 나비를 채집했고, 형질을 일일이 측정, 비슷한 것끼리 묶어 분류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수집한 표본 목록과 일본 나비학자들이 낸 곤충도감을 비교하던 석 선생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일본 학자들은 한국 나비의 종을 지나치게 많이 분류하고 있었고, 그들이 서로 다른 종이라고 구분했던 것은 사실 한 가지 종에 여러 개의 다른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했다.

석주명 선생은 채집한 표본의 앞날개 길이, 뱀눈무늬의 수와 위치를 측정하고 개체변이의 정규분포 곡선을 작성해서 변이 범위에 포함된 기존 학명들을 동종이명(同種異名, synonym)으로 판명하여 학계에서 퇴출시켰다. 석 선생은 20여 년 동안 일본과 조선의 전문학술지에 120여 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의 연구를 통해 한국산 나비의 동종이명 844개가 제거됐다. 통계학적 지식을 생물분류학에 본격적으로 적용시킨 논의는 서구 학계에서도 1930년대 후반부터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석 선생의 연구방법은 단순하기는 했지만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이에 영국의 왕립 아시아학회 한국지회(The Royal Asiatic Society-Korea Branch: RASKB)는 그에게 한국산 나비에 대한 연구를 총정리한 논문의 집필을 요청했고, 1940년 영문 단행본 조선산 나비 총목록(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이 발표됐다. 식민지시기에 한국인 학자가 과학 분야에서 영문으로 된 연구서를 펴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석주명 선생은 ‘나비박사’라는 별명과 함께 우리 민족의 과학적 우수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과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조선산 나비 총목록을 통해 한국 나비는 248종으로 최종 분류됐고 한국산 나비의 새로운 분류학 시대가 열렸다. 또한 그의 연구 결과는 일본의 저명한 학자들의 잘못된 연구를 바로잡았다는 점에서 민족의 자긍심을 크게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분류학 연구를 일단락 지은 석 선생은 자신의 채집 결과를 바탕으로 한국산 나비 각각의 종에 대한 분포연구로 나아갔다. 그는 이 연구를 바탕으로 형태에만 치중하는 분류학이 아닌, 환경과 분포의 관계까지 밝혀내는 곤충학을 추구하려 노력했다.

우리말에 대해 관심과 애정이 많았던 그는 한국의 나비에게 우리말로 이름을 직접 지어주기도 했다. 각시멧노랑나비, 떠들썩팔랑나비, 무늬박이제비나비, 청띠신선나비 등 아름다운 우리말로 만들어진 나비이름들이 그렇게 탄생했다.

조선에 많은 까치나 맹꽁이는 미국에도 소련에도 없고, 조선 사람이 늘 먹는 쌀도 미국이나 소련에서는 그리 많이 먹지 않는다. 그러니 자연 과학에서는 생물학만큼 향토색이 농후한 것도 없어서 조선적 생물학 또는 조선 생물학이라는 학문도 성립될 수가 있다. - 석주명 -

석 선생은 자신의 연구 대상을 철저하게 한국의 나비로 한정했다. 한국 생물의 독특한 모습을 밝히는 것이 한국학적 생물학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인 연구자들이 과학에 대한 꿈을 조금이라도 이루려면 일본인보다 한국인들이 더 잘 알고 있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조선적 생물학자 라고 칭했던 그는 나비 연구를 조선학으로 해석하고 민족적 가치를 부여했다.

그러나 때는 역사의 격동기였다. 그는 6.25 전쟁 와중에도 나비 연구에만 몰두했다. 전쟁통에도 피난을 가지 않고 나비 표본을 지켰지만, 서울 시내 폭격으로 국립과학관이 불타버렸고, 그가 20여 년간 수집했던 나비 표본은 모두 재로 변해버렸다.

나비들이 모두 불탄 열흘 뒤(1950년 10월 6일), 과학관 재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가던 그는 인민군으로 오인 받아 불의의 총격을 받고 숨졌다.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총구를 겨눈 이들에게 그가 외친 최후의 한마디였다. 그는 마치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듯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일제 치하 혼란에서 조선의 나비들에게 이름을 찾아주려 일생을 헌신한 석주명 선생. 한국학적 생물학으로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고, 세계에 한국 과학의 위대함을 보여준 그에게 정부는 과학기술유공자 명예를 헌정했다. 한국의 파브르, 석주명 선생. 그가 사랑했던 한국의 나비들은 여전히 아름다운 날갯짓을 뽐내며 대한민국 산하를 날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