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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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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수학의 위상을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수학자

‘해석적 부동점 원리 통일화’와 ‘추상블록공간 이론’ 정립 / 교육과 후진양성, 대중저술로 한국 수학계의 기틀 마련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57 한국 수학의 위상을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수학자 박세희 | ‘해석적 부동점 원리 통일화’와 ‘추상블록공간 이론’ 정립 교육과 후진양성, 대중저술로 한국 수학계의 기틀 마련 학력 | 1959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이학사(수학) 1961 서울대학교 대학원 이학석사(수학) 1975 미국 인디애나대학 대학원 이학박사(수학) / 경력 | 1964~1991 서울대학교 교수 1982~1984 대한수학회 회장 1994~현재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회원 2001~현재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 포상 | 1987 국민훈장 동백장 1994 대한민국학술원상 1998 대한수학회 논문상 2007 한국과학기술한림원상 “논문을 많이 쓴 게 자랑이 아니에요. 조그마한 연구라도 제가 써서 발표하면 우리나라의 위상이 올라가니까 많이 썼어요. 학문의 역사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에요.” / 한국 수학계 ‘논문 왕’ 박세희 교수. 무급조교부터 시작해 정년 후 명예교수까지 약 60년에 걸쳐 서울대 수학과에 헌신한 그는 대한민국 수학계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고군분투한 대학자였다. 일신의 영광은 뒤로 하고 우리나라 수학계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평생의 사명감으로 달려왔던 지난 세월. 충실히 지나온 삶에 만족하며 현재의 시간을 채우고 있다는 그의 관심은 이전과 동일하게 여전히 한 곳에 머물러 있다. 연구를 향한 열정, 그리고 아직까지 봇물 터지듯 떠오르는 수학적 영감의 구현이다. 14살 아이의 눈에 비친 세상은 그저 혼돈의 모습이었다. 전쟁으로 모든 게 무너진 나라에서 그는 혼자였다. 가족과도 헤어진 그는 홀로 돌아다니며 일을 하다 틈틈이 야간학교 3개월, 주간학교 3개월을 다니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 번 책을 잡으면 다 읽을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독서광이었다. 문학의 길을 걸을 거라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꿈은 현실의 벽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그가 제대로 파고들 수 있었던 건 수학뿐이었다.  / “영어공부를 해봤지만, 중2 수준에서 발전하기 힘들었어요. 물리나 화학도 마찬가지였고요. 저에게 손쉬운 길은 수학이었어요.”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이유로 맞아 죽는 사람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수학은 정치와 이념에 좌우되지 않는 안전한 학문이었다. 또한, 수학을 전공하면 최소 고등학교 교사는 될 수 있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수학의 길을 들어서게 된 이유였다. 휴전 2년 뒤인 1955년 서울대 문리과대학에 입학한 그는 수학 외에도 문학, 철학, 역사 등 인문계 과목을 활발히 수강했다. 잠시 접어 두었던 학문에 대한 열정이 터져 나온 셈인데, 이때의 탐닉은 훗날 그의 저술 활동에 기반이 됐다. 교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수학과에 들어왔지만, 막상 졸업이 다가오자 장래에 대한 불안으로 그의 마음은 갈팡질팡했다. 그때 마침, 은사 최윤식 교수가 그에게 대학원 입학을 권유했다. 최 교수는 그가 좀 더 공부를 하길 바랐다. 우리나라 수학과 서울대 수학과, 대한수학회를 일으켜야 한다고 누차 당부했던 최 교수는 될성부른 떡잎이었던 그가 학계에 남아 좀 더 큰 뜻을 펼치길 원했다. 은사의 간곡한 권유로 대학원에 입학한 그는 무급조교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2년간 무급조교로 있다 대리 강사가 됐다. 교수가 부족한 시절이었기에, 대학원을 졸업한 인재들은 강의를 대신하기도 했다. 전임강사가 되기까지 5년 간 그는 가난한 시간 강사로 버텼다. 강사료는 한 시간에 100원이었다. 3학점 강의를 3과목 진행했던 그는 일주일에 900원, 한 달에 3,600원을 받았다. 빠듯한 살림살이에 연구는 어불성설이었다. / “논문 목록을 살펴보면 이 기간이 비어있어요. 한창 공부를 해야 할 석사졸업생이 돈이 없어 연구를 못했다는 게 가슴이 아프죠.” 어려운 상황에도 그는 모교를 지켰다. 스승의 당부는 그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우리나라의 수학과 서울대 수학과, 대한수학회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서울대 수학과 주임교수였던 그가 1972년 유학길에 오른 이유도 ‘수학과’ 때문이었다. 수학과가 자리를 잡지 못하는 이유가 ‘박사’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소리가 나돌자, 논문만 쓰면 박사학위를 주는 구제(舊制) 박사 제도로 선배들을 박사로 배출했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그는 조교수에서 대학원 학생으로 신분을 낮춰 유학을 가기로 결심한다. 서른 중후반의 나이에 미국 인디애나대학 대학원에 들어간 그는 1학년 강의부터 새로 들으며 열의를 불태웠다. 더군다나 ‘3년 안에 들어와야 한다’는 서울대의 요구는 그의 마음을 더욱 바쁘게 했다. 젊은 학생들이 3과목을 들을 때 5과목을 수강하며 연구를 거듭한 끝에 박사학위를 일찍 받을 수 있었다. 그의 박사논문은 “Fixed point theory of multi-valued symmetric product functions”였다. 1975년 귀국한 그는 박사과정을 제대로 만드는 일을 시작했고, 이는 서울대 수학과가 우수 인력을 배출하는 기틀이 됐다. 그가 귀국한 지 8년 만인 1983년, 서울대 수학과는 첫 번째 박사를 배출했다. 그가 체계를 잡은 박사과정 시스템과 더불어, 전임강사 시절부터 진행했던 세미나가 박사 배출의 중요한 자양분이 됐다. 주로 외국의 논문을 읽고 연구 거리를 찾아 같이 토의하고 발표하는 세미나였지만, 사정상 외국 유학을 가지 못하는 학생들에게는 선진 외국의 학문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가 됐다. 그는 30여 년간 세미나를 주재하며 15명의 석사와 12명의 박사를 양성했다. 또한 대학원 과정의 교육과 연구를 정상 궤도에 올리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세미나를 통해 배운 건 제자들뿐만이 아니었다. 그 역시 세미나를 진행하며 본격적으로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는 귀국 후부터 405편의 연구논문, 304편의 미국수학회의 Mathematical Reviews(MR) 게재 논문, 104편의 수학사와 수학철학 해설논문, 29편의 저서와 역서 등 총 842편을 써서 발표했다. 또한 국제학술회의 연구 발표 160여 회, 국내회의와 대학 초청강연 100여 회 등을 통해 수학계의 활성화와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앞장섰다. 연구 업적 면에서도 탁월함을 자랑했다. 그는 비선형해석학에 나오는 여러 부동점 이론을 하나의 이론으로 통일시켰다. 이 업적으로 그는 1994년 대한민국학술원상을 받기도 했다. 또한, 그는 통일된 이론을 발전시켜 ‘추상블록공간 이론’을 정립, 전 세계적으로 390여 회 인용되는 중요한 업적을 이뤄냈다. / “학자들이 제 이론을 공부하고, 논문을 인용하는 것은 굉장히 고마운 일입니다. 학자는 서로의 논문을 인용하고 격려하며 학문을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수학자들이 화려한 업적을 남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젊은 시절, 그는 우리나라 수학의 발전을 위해 서울대 수학과와 대한수학회의 각종 활동을 도맡아 했다. 대학원에 진학한 1959년부터 대한수학회와 인연을 맺은 그는, 이후 여러 직책을 역임하며 학회 운영은 물론, 학술지 창간부터 기금 모금까지 많은 역할을 수행했다. 대한수학회 창립 35주년이었던 1981년에는 부회장을 맡았고, 그 다음해부터 2년간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 수학계의 수장으로서 수학자들의 연구 활동을 격려하기 위한 이벤트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이와 함께 서울대 수학과 학사행정과 학회, 외부단체에도 다양하게 관여했다.그는 서울대 자연대 학장보(교무담당)에 이어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이사, 그 뒤 수학과 학과장, 서울대 교수협의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그 발전에 헌신했다.2년 반을 고생하며 만든 대한수학회 70년사 (2016)도 그의 업적 중 하나다. 편찬위원장을 맡은 그는 원로 수학자들과 함께 밤낮으로 몰두하며 844 페이지에 이르는 장서를 만들어냈다. 이밖에도 그는 대중과 만나는 글을 통해 수학의 대중화에도 기여했다. 각종 교과서의 편찬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은 물론, 수학과 수학사, 수학철학 등을 저술하거나 번역하여 황무지와도 같았던 이 분야를 개척했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아끼는 책은 2002년 펴낸 수학의 철학이라는 책이다. 오래전 하루에 한 페이지씩, 무려 3년에 걸쳐 번역했다는 1,000 페이지짜리 책이었다. / “한 사람이라도 읽었다면 그 한 사람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한 거예요. 그러면 됐지요.” “철학과 역사를 원하는 만큼 많이 공부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 여전히 연구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박세희 교수. 고령이지만 그의 하루는 연구와 저술활동으로 바쁘게 흘러가고 있다. 이렇듯 ‘영원한 수학자’로 불리는 그가 우리나라 수학계를 이끌어 온 근간에도 그의 마르지 않는 노력과 열정이 있었다. 스승의 당부를 사명으로 생각하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 길만을 달려온 뚝심. 그의 헌신으로 우리나라 수학계는 변방에서 중심으로 조금씩 나아갈 수 있었다. 한국 수학의 위상을 높인 공로로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된 그의 바람은 소박하다.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한국 수학계 큰 스승 박세희 교수.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배움을 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