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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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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핵심기술의 독자 개발 이끈 마에스트로

포니부터 에쿠스까지 34종의 자동차 모델 자체개발 / 현대자동차를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은 기술개발 역사의 산증인

이충구. 포니부터 에쿠스까지 34종의 자동차 모델 자체개발 / 현대자동차를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은 기술개발 역사의 산증인 학력-1967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공업교육과(자동차공학 전공), 2001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 경력 - 1969 현대자동차 기술개발부, 1993 현대자동차 연구개발본부장, 부사장, 1999 현대자동차 통합연구개발본부장, 사장, 2001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 2012 서울대학교 차세대융합기술원 지능형자동차플랫폼센터장, 2014 한국자동차공학한림원 회장 / 포상 - 1978 산업포장, 1994 3.1문화상(기술부문), 2000 금탑산업훈장, 2010 대한민국 100대 기술주역 선정(한국공학한림원) 저를 유공자로 인정해 준 것은 한국 자동차 산업이 인정을 받은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아요. 국내 자동차 산업의 역사를 일구는 데 함께 힘써 온 다른 숨은 주역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한국 자동차의 전설 ‘이충구’. 그의 손에서 대한민국 최초 자동차 고유 모델인 ‘포니’가 탄생했고, 그의 손에서 시작된 34종의 자동차가 전 세계를 누비며 ‘Made in KOREA’를 알렸다. 그가 대리 시절 만들었다는 ‘이대리 노트’는 초기 현대자동차의 ‘나침반’이 됐다. 대한민국 자동차 역사의 산증인인 이충구 전 사장. 그의 헌신으로 대한민국은 ‘우수한 자동차를 생산하는 국가’로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됐다. 일일이 손으로 다 고치시는데, 그게 참 멋있어 보였어요. 그래서 막연하게 기술자,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 그 후로 꿈이 흔들린 적은 없었어요. / 그는 1945년 충북 영동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방앗간을 운영한 부모님 밑에서 성장한 그는 고장난 기계를 고치는 아버지의 모습을 늘 동경하며 바라보곤 했다. 당시 기계는 그의 호기심을 자극시키는 모든 것이었다. 그와 자동차와의 인연은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화학이나 물리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는 좀처럼 관심이 가질 않았던 그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자동차공학 전공이 처음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고 망설임 없이 지원한다. 그러나 당시 대학 실험실에는 실습을 할 수 있는 장비가 거의 없었다. 자선단체에서 기증받은 낡은 지게차 한 대가 고작이었던 열악한 상황에서 교수가 구해 온 고장난 자동변속기는 학생들에게 중요한 실습 모형이 됐다. 그를 포함한 학생들은 자동변속기 하나에 매달려 밤새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기술을 습득할 수밖에 없었다. 자동차에 대한 갈급함은 군에 입대하면서 해결됐다. ROTC로 입대한 그가 배치된 곳은 수송병과였다. 그곳에서 정비담당 장교로 근무한 그는 자동차 운전은 물론 제대로 된 정비까지 배울 수 있었다. 기회가 찾아온 건 제대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자동차 회사였던 현대자동차에서 면접을 보게 된 그는 1969년 ROTC 공채 1기로 입사하게 된다. 그가 신입사원이었을 때 현대자동차 공장의 생산력은 포드의 차량을 하루 2~3대 정도 조립하는 것이 전부였다. 다른 국내 자동차 회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한국의 자동차 산업 자체가 조악했던 게 이유였다. 그러나 정부가 ‘중화학공업정책’을 선언하면서 사정은 급반전됐다. 자동차 국산화 계획을 제출하지 않으면 부품 수입을 금지하겠다는 정부의 엄포에 정주영 회장이 독자적인 고유모델 개발에 나선 것이다. 일본에서 구입한 후륜구동 엔진과 변속기, 조향장치 등 차량의 뼈대를 이루는 섀시 기술 위에 우리나라 고유 모델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신속하게 진행됐다. 그는 1974년 프로젝트 기술팀의 일원으로 생면부지의 나라였던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설계와 스타일링, 프로토타입 제작을 맡은 이탈디자인(Ital Design)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탈디자인에서 작업과정을 배운 뒤 국내 공장에서 실현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러나 막상 가본 현장은 막막함 그 자체였다. 이탈리아 사람들과는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어떤 디자이너는 하루에 선 한 개를 겨우 그릴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호의적인 것도 아니었다. 알아서 배우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포기할 순 없었다. 일단 그는 그들의 그림과 글을 무조건 노트에 베껴 적기 시작했다. 모든 일정이 끝난 밤에는 노트를 다시 펴고 퍼즐을 맞추듯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적은 노트만 3권이었다. 그가 적은 ‘이대리 노트’는 현대자동차 고유모델 생산의 기술 지침서가 됐다. 이 노트가 없었다면 ‘포니’의 탄생은 훨씬 뒤에나 가능했을 일이었다. 10개월 후, 국내로 돌아온 그는 전문가들의 도움 속에 상세설계를 비롯한 실제 생산기술 확보에 참여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1976년 포니가 출고됐고, 그해 7월에는 에콰도르를 시작으로 수출에도 나섰다. 한국은 그렇게 세계 9번째 고유모델 보유국이 될 수 있었다. 다음으로는 소형차를 개선하는 프로젝트가 추진됐다. 그 중심에는 포니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설계 책임자 이 전 사장이 있었다. 이 프로젝트의 결과로 전륜구동방식의 소형차 포니엑셀과 중형차 스텔라가 동시에 출시되었고 이중 스텔라는 88올림픽 공식 행사차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의 다음 목표는 미국 시장이었다. 포니 엑셀로 1986년 처음 미국 시장을 두드려 그해에만 17만 대를 파는 돌풍을 일으켰다. 엄청난 성공이었다. 그러나 이후 제기된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인테리어 부품들의 촌티, 도장품질, 승차감, 기술적인 문제까지 엄청난 불만이 쏟아졌고,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승부수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시 사용하던 3축 전륜구동 엔진을 버리고, 새로운 2축의 전륜구동 엔진을 독자적으로 자체 개발하도록 이끌었고, 이를 통해 현대자동차는 차체부터 섀시까지 자체 개발한 ‘엑센트’와 ‘아반떼’를 출시할 수 있었다. 명실상부 진짜 고유모델의 탄생이었다. 그의 주도로 현대자동차에서는 40년 사이에 무려 34종의 승용차 및 다수의 상용차가 개발됐다. 이 중에서도 포니(1976), 스텔라(1983), 포니엑셀(1985), 소나타(1985), 그랜저(1986), 엑센트(1994), 아반테(1995), 에쿠스(1999), 산타페(2000) 등은 한국을 대표하는 차종으로 미국을 비롯한 해외로도 널리 수출됐다. 이로써 한국은 가장 낙후되었던 자동차분야에서 짧은 기간에 세계 5위의 나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됐다. 포니 개발의 공로로 그에겐 산업포장이란 큰 상이 주어졌다. 현대자동차 직원 중에서는 가장 큰 상이었다. 이후 1994년에는 미국에 본격적으로 수출된 엑센트 개발의 성과를 높이 평가받아 3.1문화상(기술부문)을 수상했으며, 2000년에는 국가 산업발전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최고의 상인 금탑산업훈장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정부는 그의 공헌을 후대에도 널리 알리고 기리기 위해 2019년 과학기술유공자의 명예를 헌정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는 최고기술책임자이자 사장으로서 현장의 기술개발을 진두지휘했다. 작은 실수 하나로 큰 손해를 볼 수 있는 산업이었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완벽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직원들 사이에선 무서운 호랑이로 불릴 정도로 철저하게 원칙을 내세웠던 그였다. 리더에게 완벽주의는 별로 좋지 않은 요인이에요. 그런데 자동차 산업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완벽주의는 반드시 필요한 요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전 똑같이 행동할 것 같아요. 자동차밖에 모르는 사람, 그걸로 충분합니다. 한국 자동차 기술 개발의 궤적을 새롭게 창출하며 위상을 높이고, 한국 자동차의 기술 수준을 세계적 반열에 올린 지도적 엔지니어 이충구 전 사장. ‘젊은 세대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싶냐’는 질문에도 자동차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그는 한국 자동차 기술개발의 경로를 효과적으로 디자인해 나간 전방위적 혁신가였다. 언제나 긍정적이고 자신감 있는 태도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간 그의 이름은 지금도 반짝이며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