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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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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화학산업의 기술 경쟁력을 드높인 테크노 CEO

엔지니어링 플라스틱과 리튬 이차전지 등 기술개발 선도 /
우수한 리더십 발휘해 LG화학기술연구원을 세계적 연구소로 육성 여종기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44 / 엔지니어링 플라스틱과 리튬 이차전지 등 기술개발 선도
    우수한 리더십 발휘해 LG화학기술연구원을 세계적 연구소로 육성  여종기 한국 화학산업의 기술 경쟁력을 드높인 테크노 CEO

학력 - 1970 서울대학교 화학공학 학사, 1976 서울대학교 대학원 화학공학 석사, 1981 미국 리하이대학 대학원 고분자공학 박사 /
    경력 - 1981∼1995 럭키중앙연구소 책임연구원, LG화학고분자연구소 소장, 1996∼2004 LG화학기술연구원 원장, 2005∼2005 LG화학 부문장(사장), 2011∼2012 한국공학한림원 부회장 /
    포상 - 1985 한국화학공학회 기술상, 2001 아시아화학회연맹(FACS) 상, 2002 대한민국과학기술상 기술상, 2004 한국공학한림원 대상

Think big. Aim high!(생각은 크게, 목표는 높게 잡아라!)
    여종기 원장은 새로운 변화를 이끌 연구개발에 유독 몰두했던 개척자였다. 이를 위해서는 기초 공부가 중요하다는 점을 수시로 강조하기도 했다. 그의 치열한 연구개발 노력과 남다른 비전 덕분에 한국 화학산업의 기술역량은 선진 수준으로 크게 도약할 수 있었다.
    평생을 한 우물만 파며 정상에 오른 LG화학의 보배, 여종기 원장. 과학기술유공자의 명예로 그는 대한민국의 보배가 됐다.

어렸을 적 그의 꿈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책 읽기를 좋아했던 여 원장은 꿈도 크고 욕심도 많아 어른들로부터 선생님이나 학자가 될 거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정치, 사회, 경제 문제에 대한 분석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신문사의 논설위원을 꿈꿨다.    
    그러나 꿈과 현실은 달랐다. 
    경제 부흥기였던 1960년대, 화학공학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화학공학을 선택한다는 것은 미래를 보장받는 것이라 생각되던 시절, 그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화학공학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적지 않은 방황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화학에 대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대학 졸업 후였다. 
    여 원장은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함과 동시에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곳에서 자신의 지적 욕구를 분출하기 시작한다. 
    그는 KIST에서 일과 대학원 공부를 병행하며 화학 관련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다는 꿈을 새로 꾸게 된다. 
    1976년, 동료들에 비해 늦은 나이임에도 유학길에 오른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연구원으로 일하는 동안 화학 중에서도 어떤 분야에 더 흥미가 있고, 
    어떤 공부가 더 필요한지를 깨달아 좀 더 확실한 목표를 세울 수 있었다. / 리하이 대학교 건물 모습

여 원장은 KIST에서 6년간 연구원 생활을 마친 뒤, 공학 분야에서 명성이 높았던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리하이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는 5년간의 유학 생활동안 플라스틱과 섬유, 고무 등으로 대표되는 고분자화학에 대한 공부와 연구만으로 이 시간을 채웠다. 
    
    1981년 박사학위 취득 후 귀국한 그는 기업연구소로 발길을 옮긴다.

여 원장이 기업연구소로 간 이유는 고분자화학에 대한 개발연구 때문이었다. 
    꿈을 향해 꼿꼿이 걸어갔지만, 당시 우리나라 기업연구소의 환경은 열악했다. 
    그때의 선택으로 그는 기업연구소의 개척자 역할을 하며 화학산업을 이끄는 선두에 서게 된다. 
    럭키중앙연구소(현 LG화학기술연구원) 고분자연구부문 책임연구원으로 들어간 여 원장은 전기전자 및 자동차 부품 소재인 엔지니어링 플라스틱(Engineering Plastic, 이하 EP)을 개발하는 성과를 이룬다.

여 원장은 고기능을 지닌 EP 개발을 국내에서 선도적으로 추진하여 1983년에 새로운 플라스틱 소재로 PBT 수지를, 1986년에는 충격 보강을 위해 아크릴계를 첨가제로 이용한 PVC 충격 보강제를, 그 후에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플라스틱에 난연성을 띠게 하는 반응형 난연 ABS(내열성, 내후성, 친환경성)를 개발했다. 
    이 덕분에 1988년에 럭키중앙연구소에 EP사업부가 독립적으로 신설됐다.

중국 지역 연구개발 교두보 확보를 위해 중국 칭화대와 MOU를 체결하는 여중기원장 사진 / 그가 주력했던 건 미래 신산업 발굴이었다. 
    1996년 LG화학기술연구원 원장에 오른 그는 제품개발보다 공통기반기술, 소재의 혁신 등 연구개발의 전환을 통해 성과를 이뤄냈다.     
    오늘날 LG화학의 먹거리로 자리 잡은 생명과학과 정보전자소재 분야를 일찌감치 전략 분야로 선정해 집중적인 투자와 연구개발이 이뤄질 수 있도록 지원한 것도 그의 결단이 주효했다.

LG화학이 개발한 리튬이온 폴리머 전지 / 그 결과 LG화학은 세계 최초로 성능이 가장 뛰어난 리튬이온 2차전지와 TFT-LCD용 편광판을 각각 1998년과 1999년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
    뒤이어 개발된 PDP용 형광체, 리튬폴리머 전지, 항생제 팩티브, 재조합 단백질, 유기 EL 핵심소재도 눈에 띄는 성과로 꼽힌다. 
    
    LG화학이 미래 신산업에서 세계적 기술경쟁력을 갖게 된 것은 
    전적으로 연구소에서 이룬 뛰어난 연구개발 덕분이었다.

여 원장은 평소에도 R&D에 대한 중요성을 피력했던 과학자이자 리더였다. 
    그가 생전 즐겨했던 이카루스 이야기에서 여 원장이 생각하는 R&D 정신을 엿볼 수 있다.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다 날개가 녹아 추락하는 이카루스에서 저는 R&D의 정신을 봅니다. 이상을 향해 끝없이 솟아오르려는 이카루스의 열정과 의지, 저는 이것이 R&D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추락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과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분수처럼 솟아나며, 자기가 가진 열정을 마음껏 불사르는 연구소가 제가 이루려고 하는 R&D의 참 모습입니다.

뛰어난 성과를 낸 연구원에게는 수억 원대의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좋은 연구결과를 많이 내려면 고급두뇌가 있어야 하고, 연구원들의 기를 올리려면 파격적인 보상을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그는 평소 “백만장자 연구원이 많이 나오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말해왔던 선지적 리더였다.    
    또한, 그는 서로 다른 기술 융합을 통한 미래 전략부문 개척을 위해 나노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유망 과제를 발굴하는 데 끊임없이 골몰했다. 
    연구원들의 우수한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이를 연구과제로 연결하는 등 연구원들의 성과를 인정해주려고 노력했다.

여 원장은 직접 우수 인재를 발굴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매년 두 세 차례 미국과 유럽을 방문해 우수 인재를 발굴했고, 현장에서 연구원들과 대화 나누기를 즐겼다.      
    LG화학이 1991년 이후 화학업계에서 최다인 30건의 매일경제 IR52 장영실상을 수상하는 등 뛰어난 기술력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기울인 노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LG화학이 먹고 살 것을 그가 다 마련해줬다는 말이 유행어처럼 번질 정도였다.

실제로 그가 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LG화학기술연구원은 1,600여 명의 연구개발 인력을 보유한 세계적 연구소로 발돋움했다.     
    여 원장은 우수한 두뇌와 팀워크를 강조하며 연구자들의 조직적 역량 발휘에 관심을 기울였다.
    LG화학은 전체 종업원 중에서 연구개발 종사자의 비율이 매우 높은 혁신적인 기업으로 바뀌었고, 획기적인 기술개발에 힘입어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배터리, 디스플레이 등을 선도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게 됐다.

한국공학한림원 대상을 받는 여종기 원장 사진 / 국내 화학업계에서는 최초로 기술연구원장 겸 CTO의 위치까지 오르며 실력을 인정받았던 그는 화학업계 최다 수상자로 알려질 만큼 혁신적인 연구자였다.    
    여 원장은 석유화학산업을 고부가가치화하고 첨단소재산업을 창출한 공적으로 1985년 한국화학공학회에서 수여하는 기술상을 받았으며, 이외에도 아시아화학회연맹상(2001), 대한민국과학기술상 기술상(2002), 한국공학한림원 대상(2004) 등을 수상했다.

엔지니어나 연구원들이 스스로 성과를 냄으로써 기술의 중요성을 증명해야 한다.
    실용적 개발연구에 헌신한 현장 지향형 엔지니어였던 여종기 원장. 응용화학이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던 시절, 열악한 환경에서도 불철주야 연구개발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했던 그는 세계 과학자들이 모여드는 연구소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했던 열정 넘치는 과학리더였다. 
    기술개발의 토대가 완성되기까지 리더의 역할이 그 무엇보다 중요함을 몸소 보여준 그는 현재를 살아갈 후세들에게 대한민국 응용화학의 거목으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