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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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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농학의 ‘텃밭’을 일궈내다 - ㉛ 故 조백현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㉛ 근대 농학 및 생화학 연구의 선구자 故 조백현 서울대 명예교수

농학연구 및 선진 농법 개발 등 과학적 방법으로 식량 생산 증진에 기여 농학 분야 연구시설의 현대화 및 교육과정 개발 등 대학교육 체계 수립

최근 농학이 재조명 받고 있다. 식량 생산이라는 고유의 목적보다 친환경 농업, 도시 농업, 치유 농업 등으로 
농업의 가치가 재평가되면서 영역이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바쁜 도시의 삶에 지쳐 귀농 생활을 꿈꾸는 현대인들이 많아지면서 교육 수요가 급증한 게 인식의 전환을 불러온 중요한 계기가 됐다. “후진국이 공업발전을 통해 중진국 문턱에 이를 수 있으나 
농업발전 없이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농업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마다 언급되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사이먼 쿠즈네츠의 말이다. 농업발전 없이 미래산업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는 지금, 한국 농학은 새로운 기로에서 변화를 마주하고 있다. 이러한 농학의 발전 뒤엔 우리나라 농학의 텃밭을 일궈낸 근대 농학의 선구자, 조백현 박사가 있었다. 그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던 암흑기 한국 농업의 근간을 마련한 최초의 선지자였다.

조백현 박사는 1900년 2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매동초등학교를 거쳐 1912년 보성학교에 입학한 그는 수학에 관심이 많았다. 졸업 후 공학 계열로 가기 위해 학업에 정진했지만, 꿈을 이룰 순 없었다.무관이었던 그의 부친은 자신의 아들이 군인이 되길 바랐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그가 군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게 허약한 체구를 가지고는 군인이 될 수 없으니, 차라리 농사기술을 배우라.” 엄했던 아버지의 농사기술을 배우라는 말에 그는 꿈을 말해보지도 못하고 진로를 정하고 말았다.

가고 싶었던 학교를 뒤로 하고, 그는 수원농림학교에 입학한다. 수원농림학교는 우리나라 근대 농학교육기관으로, 일제 치하에 있던 권업모범장의 부설기관이었다. 학문보다 실습 위주로 진행되는 교육 과정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몸이 약했던 그는 실습을 감당하지 못했고, 1918년 학교의 전문부서 신설에 따라 그쪽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실습보다 강의가 늘어나면서 점차 학교생활을 즐기게 된 그는 여러 과목 중에서도 특히 화학 과목에 빠져들며 실험을 주도하곤 했다.

당시 한국의 농업은 아주 열악했다. 쌀의 생산량은 물론이고, 비료도 거의 회분이 전부일 때였다. 일제가 모범농장을 세워 쌀을 수탈하고자 했다. 일제의 우량 품종이 도입되고 새로운 농사기술이 보급되면서 우리나라의 쌀 수확량도 점차 늘어났지만, 그만큼 쌀 수탈은 더 심해졌다. 식량 부족 현상은 예견된 결과였다. 수원농림전문학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재 양성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고, 졸업생들이 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조 박사는 부모를 설득해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1921년 큐슈제국대학 농학부에 입학한 그는 농예화학을 전공으로 택하며 본격적인 농학인의 길에 들어섰다.

농예화학 중에서도 생화학은 당시로선 최첨단 학문에 속했다. 화학을 좋아했던 그는 단숨에 생화학에 매료됐고, 
그 관심은 졸업논문 작성으로까지 이어졌다. 독일 유학을 마친 젊은 일본인 교수의 지도로 완성한 그의 졸업논문 ‘계란 분화에 따른 아미노산의 변천’은 한국인이 발표한 생화학 분야 최초 논문으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교수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던 그는 1925년 규슈대를 졸업한 후 귀국해 모교로 돌아간다. 
그는 전문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승격된 수원고등농림학교에서 유일한 한국인 강사였다. 
2과목 강의를 맡아 학생들을 가르치고 나머지 시간에는 연구에만 몰두했다.

당시 그가 주목한 건 우리나라 전통 식품의 성분을 규명하는 일이었다. 특히 콩, 김치, 전통 장류 등과 관련 과학적인 접근을 통해 우리나라 전통식품의 가치를 밝혀내고자 했다. 콩나물과 산나물 등을 연구한 ‘두아제조 중 일어나는 제 성분의 변화에 관하여’(1932, 수원고등농림학교 창립 25주년 기념 논문집), ‘한국산야생식용식물의 식품적 가치에 대하여’(1932, 동상논문집) 등은 한국인 최초 농학 분야 학술논문으로 우리나라 근대 농학연구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의 연구로 인해 오늘날 국내 전통식품의 현대화와 식생활 증진이 가능해졌다.

생화학 이외에도 토양학, 발효학, 유기화학 등의 강의를 담당하며 학교의 유일한 한국인 교수로 활동하던 그는 해방 후 미군 군정청의 발령으로 교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1946년 8월 서울대학교가 새롭게 구성되면서 수원농림전문학교는 농과대학으로 편입됐고, 조 박사는 초대 농대학장을 맡게 된다. 그러나 당시 학교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 교수들이 모두 빠져나갔고, 정상수업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조 박사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한국인 교수진을 모아 교육의 정상화를 꾀했다.

1952년엔 자연보존 연구 및 시찰을 위해 유럽으로 떠났다. 당시 세계적으로 개간에 따른 토양 침식 및 토사 유실 등 다양한 피해들이 이어지면서 토양 보존에 대한 관심이 국제적으로 확대되고 있을 때였다. 
전쟁 중이었던 한국도 토양 문제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유네스코는 조 박사에게 비교적 토양을 잘 보존하고 있던 유럽에서의 연구 기회를 선물했다. 조 박사는 영국의 농과대학 및 연구소에 머물며 필요한 기술을 익혔고,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를 돌며 선진 문물을 습득했다. 
조 박사가 귀국하고부터 서울대 농과대학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의 외국 시찰은 학교의 규모를 확충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정부는 전쟁 후 황폐해진 대학을 재건하기 위해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 1955년부터 진행된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미국 정부의 예산으로 미네소타 대학이 서울대의 재건을 지원해주는 사업이었다. 그는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5개월간 미국의 대학 및 연구기관을 둘러보고, 농과대학의 현대화 및 교육과정 향상 등의 체계 수립에 나선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공대와 의대, 농대 등 기술교육에 특화된 사업이었다. 당시 농대에 투입된 원조액만 120만 달러에 달할 정도였는데, 조 박사는 그 자금으로 건물과 시설을 새로 짓고, 교수들의 교육 및 연구능력 향상을 위해 외국 유학도 지원했다. 시설이 현대화되고, 고급 인재들이 양성될수록 농과대학은 번창했다. 새롭게 일신한 서울대 농과대학은 8개 학과에서 11개 학과를 둔 교육기관으로 발돋움했다. 37년간 국내 농학 분야에서 후학 양성을 위해 노력했던 그는 
1961년 서울대 농과대학 학장직에서 물러나 강사로서 연구생활을 이어갔다.

행정 업무에서 벗어난 그의 관심은 원자력으로 향했다. 당시 원자력의 농학 이용 연구는 학계의 관심거리였다. 
이에 조 박사는 국제원자력기구(IAEA)로부터 방사성 동위원소를 지원받아 벼농사에 합리적 시비방법 및 시기 등을 알아내는 연구 과제를 수행, 2년간의 연구 끝에 벼에서 비료를 필요로 하는 시기가 꽃이 분화하는 시기와 같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해내며, 쌀 생산성 향상에 크게 이바지했다. 방사성 동위원소를 활용한 국제협력공동연구로는 한국 최초였던 그의 연구 결과는 IAEA의 극찬을 받았고, 연구방법 및 결과의 해석에 대해서도 창의적인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이밖에도 그는 1965년 9월부터 약 8년간 원자력위원회 상임위원직을 맡아 원자력 기술의 농업 이용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조 박사는 원자력청 산하에 방사선농학연구소를 설립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는데, 그런 그의 혜안은 이후 벼의 품종 개량과 토양 및 수질 환경에서의 동태 등 농업 현장의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며 산업의 토대를 다지는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은 그는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국민장을 수여받았으며, 1977년에는 과학 및 산업 발전에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에 수여하는 수당과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한국 농학의 개척자이자 선구자였다. 농학계의 여러 학회가 그를 중심으로 운영될 정도였다. 1954년 발족한 한국농학회 초대 회장이었던 그는 이후에도 1967년 토양비료학회, 1972년 품과학회의 초대 회장을 지내며 농학의 근대화를 위해 힘썼다. 1954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선임된 그의 주요 논문으로는 ‘토양의 모세관 수분이동 속도 연구’, ‘한국산 야생 식용식물의 식품적 가치 연구’, ‘전통발효식품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이중 ‘토양의 모세관 수분이동 속도 연구’는 미국보다 13년 앞선 세계 최초의 연구로 꼽히고 있다. 저서로는 ‘토양학’, ‘목야경영법’, 번역서로는 ‘토양학원론’이 있다.

은퇴 후 학계를 떠난 그는 1986년 농학 분야에서 기초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화농장학회 및 화농상 시상제도를 설립, 우리나라 농업 과학기술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큰 힘을 보태기도 했다. 그의 호를 붙여 만든 화농장학회는 1993년 재단법인 화농연학재단으로 발족됐으며, 매년 농업과학 기초분야의 우수 논문 발표자를 선정해 화농상을 시상하고 있다.

농학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국민 생활 및 건강과 관련된 실용 분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국민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그는 우리나라 농학의 텃밭을 가꾼 진정한 농학자이자 개혁가였다. 
평생을 농학과 과학기술에 헌신한 그는 1994년 눈을 감았다. 
서울대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6년 생명과학대(농대) 캠퍼스에 동상을 세워 그를 추억했으며, 정부 역시 과학기술유공자의 명예를 헌정하며 그를 기억하고 있다. 일제강점기라는 악조건에서 근대 농학의 뿌리를 곧추 세운 조백현. 더 먼 미래의 누군가를 위했던 그의 염원은 대한민국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