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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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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볍씨 ‘통일벼’로 보릿고개를 넘게 하다 - ㉙ 故 허문회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㉙ 작물육종기술 개발로 쌀 자급 이룩한 해결사 故 허문회 서울대 명예교수

세계 최초 벼 삼원교잡 육종 성공으로 최고 생산성 기록 벼의 동북아 전파 경로 규명 등 한국 농업과학의 선진화에 기여

지금으로부터 불과 5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고질적인 식량난으로 배고픔이 일상화돼 있었다. 쌀 생산량이 현저히 부족해 전 국민이 풍족하게 먹을 쌀이 없었고, 봄이면 항상 보릿고개를 겪어야 했다. 
한국 정부는 식량난 타개를 위해 수확량이 많은 벼의 신품종을 개발하려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벼에 대한 정책 부재와 더불어 개발된 품종이 한국의 기후와 풍토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식량난을 해결한 건 ‘통일벼’였다. 기존 품종보다 월등한 수확량을 자랑하는 통일벼의 성공은 식량난 해결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던 한 명의 과학자로부터 시작됐다. 통일벼의 아버지 허문회 박사는 품종 개량을 통해 쌀 자급의 토대를 마련한 세계적인 식물육종학자였다.

1927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난 그는 청주사범학교와 서울대 농과대학 농학과를 졸업한 뒤, 
현재 농촌진흥청의 전신인 농사원 농사시험장에서 근무하다 1957년 서울대 농학석사 학위를 취득한다. 당시 그의 주 관심 대상은 작물 개량이었다. 일하는 와중에도 학구열을 불태웠던 그는 1959년 미국 텍사스 A&M 대학교로 연수를 갔고, 그곳에서 벼와 곡물의 육종에 관한 실질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연수를 마치고 1960년 서울대 농과대학 교수로 부임한 허 박사는 
우리나라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밤낮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식량문제 해결에 집념을 보이고 있었다. 가난 추방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식량 자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다수확 품종을 도입하기 위해 1962년 문을 연 제미작연구소(IRRI)에 연구자를 파견했다. 국제미작연구소는 포드와 록펠러 재단의 지원으로 미작에 관한 연구와 인력 양성을 위해 필리핀의 로스바노스(Los Banos)에 설립된 비영리 연구기관이었다. 정부는 1964년부터 1968년까지 5년간 기술원조 차원에서 총 15명의 한국인 연구자를 미작연구소로 파견했다. 허 박사도 벼 품종 개량 분야의 학자로 초청받았는데,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특별연구원으로 위촉됐다.

그가 특별연구원이 될 수 있었던 데엔 남다른 인연이 작용했다. 1963년 서울대 교수로 미국의 국제학술대회에 참여했던 허 박사는 그곳에서 육종 연구분야의 아버지로 불리는 헨리 비첼(Henry Beachell) 박사와 인연을 맺었는데, 당시 그의 학문적 능력을 높게 평가한 비첼 박사가 특별연구원 위촉에도 도움을 준 것이었다. 미작연구소에 도착한 허 박사는 바로 인디카벼 육종 연구에 참여했다. 사실 허 박사가 IRRI에 파견된 것은 기술을 익히면서 열대형 벼인 인디카종 가운데 우리나라에 도입할 수 있는 종을 골라오기 위해서였다. 흔히 안남미로 알려져 있는 인디카종은 열대에 적응한 벼로 각종 질병과 해충에 강하며, 생산성이 높은 특징을 갖고 있다.

미작연구소는 인디카 연구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그곳엔 전 세계에서 수집된 인디카 모종들이 있었는데, 특별연구원의 위치에 있던 허 박사는 언제든 이 모종들을 이용해서 연구를 할 수 있었다. 특히 인디카벼 IR8을 개발한 비첼 박사가 그의 선임으로 있으면서 연구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준 덕분에 그의 연구는 물 흐르듯 진행될 수 있었다. 허 박사는 그곳에서 인디카에 대한 연구 역량을 키워감과 동시에 다수확 벼의 도입을 위한 인디카 선발에 몰두했다.

그러나 한국에 적합한 모종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필리핀보다 추운 한국을 고려해 추위에 잘 견디면서도 생산성이 높은 벼를 선발하려 했지만, 내랭성이 높은 벼는 기대보다 생산성이 낮았고, 생산성이 높으면 추위를 견디지 못했다. 그는 인디카가 한국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돌파구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결론은 색다른 방법을 사용해 보자는 것이었다. 허 박사는 인디카종과 한국에서 재배하는 자포니카종을 교잡해 신품종을 개발하기로 결정한다.

그가 생각한 원연교잡 방법은 종간 거리가 먼 종끼리 교잡하는 방법으로 교배 기술이 까다롭고, 성공한다고 해도 불임현상이 나타나 잘 사용되지 않는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시도해 볼 수밖에 없었다. 인디카로는 식량난 해결이 불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 박사는 효율적인 교배를 위해 인디카 중에서도 내랭성이 높은 대만 품종들과 생산성이 높은 IR8을 중심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잡종불임'이라는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

한편 그가 파견을 나가 있는 사이 한국의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1965년 기적의 볍씨로 소개된 ‘희농’이 한국의 희망으로 떠올랐지만, 한국 기후와 풍토에 맞지 않는 외래 품종이었던 탓에 추수가 어려울 정도의 흉작을 기록하고 말았던 것이다. 물러설 곳이 없었던 그는 교배조합을 바꿔가며 연구를 지속했다. 인디카와 자포니카의 교배로 600여 조합의 잡종을 만들었고, 그중 21개를 선별해 수대에 걸쳐 자가교배를 시켰다. 그 결과 잡종불임이 수대 교잡을 통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같은 사실은 인디카와 자포니카 간 원연교잡이 완전한 불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계기가 됐다.

뿐만아니라 그는 이 과정에서 ‘삼원교잡(Bridge cross)’을 통해 잡종의 불임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했다. 두 종의 잡종이 불임성을 보일 때, 이 잡종과 제3의 품종을 교배하면 
불임이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었다. 사실 여기에도 제3의 품종을 선택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삼원교잡으로 불임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결과는 다음을 엿볼 수 있는 희망이었다.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창의적인 방법으로 좋은 성과를 거둔 허 박사는 독자적인 기술로 벼 육종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곧 그가 한국의 식량난을 해결할 해결사로 급부상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삼원교잡으로 신품종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그는 한국의 자연환경에 맞는 다수확 벼 개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러하듯, 쉽지는 않았다. 문제는 벼의 수확 시기였다. 인디카는 수확시기가 빠른 반면, 자포니카는 늦었다. 한국 품종과 섞이면 출하 시기가 늦춰져 인디카 종의 특성이 발현되지 않았다. 한국 자연환경에 맞는 다수확 신품종 벼를 만들기 위해선 기존 한국의 벼보다 수확시기가 빠른 자포니카를 찾아야 했다.

연구가 진척을 보이지 않자 그는 비첼 박사와 함께 미작국을 돌아보기로 결심했다. 필리핀, 대만, 한국, 일본을 방문했는데 그중 마지막으로 방문한 일본에서 수확시기가 빠른 벼 유카라(Yukara)를 찾을 수 있었다. 
허 박사는 유카라 종자를 받아 삼원교잡을 추진했고, 그 결과 통일벼의 모종인 다수확 품종 ‘IR667’이 탄생했다. 허 박사는 곧바로 다수확 벼 품종이 육종됐음을 농진청에 알렸고, 1966년 7월 자신이 만든 볍씨를 가지고 귀국했다.

한국 정부는 반색했다. 희농의 실패를 만회해야 했기 때문이다. ‘IR667’은 곧바로 시험재배에 들어갔고, 3년만인 1969년 ‘통일벼’라는 이름을 달고 전국 농가에 보급됐다. 그러나 보급 첫 해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잇따른 자연재해와 재배 기술 부족, 그리고 미질이 좋지 않다는 단점 때문이었다. 정부는 ‘미질보다 먹고 사는 게 먼저’라며 보급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통일벼가 보급된 지 5년 만에 식량자급에 성공하게 된다. 
통일벼의 성공은 다른 작물 육종기술의 발전과 품종 수준 향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밖에도 그는 다양한 육종기술들을 개발해 우리나라의 육종기술을 세계 수준으로 향상시키는 데 힘썼다. 병해충 저항성과 추위에 강한 벼 육종 연구, 쌀의 고단백 및 품질 개선을 위한 성분 육종 연구, 잡종 1대에 나타나는 우수성을 이용하는 육종법 연구, 간척지에 벼 재배를 위한 소금기가 많은 흙에서도 잘 자라는 벼 연구, 유전자 돌연변이 벼 개발 및 분석 연구 등 논문 210여 편을 발표하며 농업과학자로서 우리 민족의 과학적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전파했다.

또한, 우리나라 및 동북아 벼 재배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동북아 벼의 전파경로 연구에도 매진했다. 이를 통해 벼의 기원과 분화 및 동북아 전파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남겼다. 서울대 농대 교수로 30년 이상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도 앞장섰던 그는 한국작물학회장, 한국육종학회장 등을 역임하고 SABRAO(아시아-오세아니아 육종학회), IRGC(국제 벼 유전학회) 상임이사 등을 지내는 등 우리나라 농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한국의 녹색혁명을 일궈내며 식량난을 해결한 그는 2010년 11월 24일 영면했다. 
한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며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했고, 
그의 고향인 충주시의 조동리 선사박물관에는 유품과 일대기를 볼 수 있는 전시실이 만들어졌다. 2017년엔 그를 기리는 공덕비도 세워졌다. 우리나라 성장의 원동력이자 국민들의 목숨을 구했던 통일벼.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연구에만 매진했던 그의 열정으로 대한민국의 오늘이 존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