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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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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조선공학의 시작을 일구다 - ⑳ 故 김재근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⑳ 수많은 후학들을 배출한 조선공학계의 큰스승 故 김재근 서울대 명예교수

거북선 등 군선 연구의 개척자로 우리나라 선박역사 집대성 조선산업 육성정책 주도하며 조선강국의 기틀 마련

2000년대 조선산업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효자산업이었다. 세계 10대 조선소 중 7개를 보유했을 정도로 활황이었다.
조선산업은 해방 후 무에서 유를 창조한 분야 중 하나다. 전문적으로 조선공학을 배우지 못한 과학자들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야 했다. 황무지와 다름없었던 조선산업이 오늘날 한국의 주력산업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몇몇 선구자들의 부단한 노력과 열정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중 故 김재근 박사는 우리나라 조선공학을 개척한 대표적 인물로, 수많은 후학들을 배출한 조선공학계의 큰 스승이자, 빛나는 별이었다.

김재근 박사는 1920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났다. 1926년 덕동보통학교를 시작으로 1932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합격했는데, 덕동학교 개교 이래 재수를 하지 않고 평양고보에 입학한 건 김 박사가 처음이었다. 수재였던 그는 평양고보 졸업 후 1938년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1기생으로 입학한다.

그가 이과를 선택한 건 당시로선 흔치않았던 집안 분위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신학문을 접했던 김 박사의 집안엔 유독 이과 출신이 많았다. 또한 그는 모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의사의 딸이었던 모친은 김 박사가 의사의 길을 걷는 걸 반대했다. 육신이 고된 일이라 단명(短命)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기계공학을 전공으로 1943년 9월 경성제대를 졸업하게 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치하의 한국인들은 취직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선택할 수 있는 곳은 9개사 정도였는데, 그마저도 일본인 졸업생들에게 우선권이 돌아갔다. 선호하는 회사에 들어가지 못한 김 박사는 결국 인천에 있는 조선기계제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에 취업했다. 조선기계제작소는 한국 땅에 세워진 최초의 대단위 기계공장으로, 직원만 3~4천여 명이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일생의 진로를 결정하게 되는 ‘조선(造船)’을 접하게 된다. 그는 대학 스승인 시모사카 교수의 소개로 일본에서 부임한 기계공학자 야기 다다시가 책임자인 조병부(造兵部)에 배치됐다. 조병부는 일본 육군이 주문한 잠수운송정의 설계 및 건조를 담당하는 부서였다.
일본은 조선인 졸업생들에게 군사기술과 관련한 주요 기관이나 핵심 기술 업무에 참여시키지 않았고, 군함 구조와 설계를 극비에 부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박사는 야기 다다시의 잠수함 계획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며 조선공학의 실무 기술을 경험할 수 있었다.

대학에서 배에 관해 배운 것이 없었던 그는 곁눈질로 조선이론을 배워 나갔다. 이 시기 야기가 전해준 ‘기본조선학(Principles of Naval Architecture)’은 김 박사가 조선의 이론을 익히고 취미를 붙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김 박사는 야기와 함께 잠수함의 설계와 시운전 등을 통해 
조선 기술을 배워 나갔다. 그의 경험과 독학으로 축적된 조선공학의 이론들은 후에 한국 조선공학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반이 됐다.

해방 후 확실한 진로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김 박사는 국립해양대학(현 한국해양대학교) 학장이었던 이시형의 소개로 1946년 10월부터 동 대학에서 조선공학에 대한 강의를 맡게 된다. 그러나 당시 조선공학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변변치 않았다. 작은 고기잡이 배를 설계할 기술력도 없어 필요한 배는 해외에서 수입하는 실정이었다. 이에 인재 양성이 중요하다고 여긴 김 박사는 해양대학에서 1기 졸업생을 배출시킨 뒤, 서울대로 자리를 옮긴다. 그곳에서 그는 서울대에서 조선공학을 담당하는 유일한 교수로 모든 과목을 혼자 가르쳤다. 열악한 상황에도 그는 그곳에 조선공학에 대한 선진적인 학과 시스템을 구축하고 선진 학문을 도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1953년 문교부에서 선발한 제1회 관비유학교수단 10명 중 한 명으로 뽑힌 그는 1954년 3월부터 1년간 미국 MIT에서 방문연구원 자격으로 수학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여러 강의를 듣고 선형 시험도 해보면서 조선공학을 체계적으로 배운 그는, 1년 만에 귀국선에 오른다. 유학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더 체계적인 방식을 연구해 후학들을 가르치고 싶었던 마음에서였다. 귀국 후 그는 조선공학의 모든 과목을 스스로 공부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한국의 어선’, ‘해저자원개발용 Semi-Submersible 설계기준의 정립을 위한 연구’ 등 조선 공학에 대한 다양한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김 박사는 제자들의 취직 기회를 알선하는 데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조선회사는 물론이고 해운이나 기계와 관련된 기업을 직접 찾아다녔을 뿐만 아니라, 기계공학 전공자를 채용하는 기업을 찾아가 
조선공학 전공자에게도 입사시험 자격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내리사랑은 자신의 학위 취득에도 영향을 끼쳤다. 김 박사는 40대 후반에서야 제대로 된 자격과 학위를 받을 수 있었는데, 
후학 양성과 제작들의 취직을 위해 자신의 연구를 뒤로 미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보다 늦게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연안객선에 있어서 대형 구상선수(球狀船首)가 조파저항(造波抵抗) 감소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실험적 연구’(1968년)는 우리나라 선박의 선형설계에서 동력절감을 다루는 최초의 논문으로 우리나라 조선공학의 수준을 한 단계 도약시켰다는 의의를 가진다. 이 논문이 특히 의미가 있었던 건, 그가 직접 준공한 선박모형 시험수조로 이룬 성과였기 때문이다. 조파 장치가 구비되어 있어 파도가 치는 실험도 할 수 있었던 이 시험수조는 학생들의 교육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조선공학에서도 획기적인 발전을 이끌어내는 단초가 됐다.

그에게 제일 우선은 언제나 제자들이었다. 연구실이 부족하던 시절 김 박사는 제자들과 집에서 동고동락하며 배를 설계했다. 당시 김 교수 연구진만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선박 설계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완성된 표준형선 설계는 국내 선박의 독자 설계 틀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효철 서울대 명예교수는 김 박사에 대해 “언제나 과학적인 근거와 체계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시면서도 항상 따뜻하게 대하셨다”고 회고했다.
(한국경제 ‘조선공학자 김재근, 국내 첫 선박 설계한 조선공학자’ 기사 중)

조선공학에 대한 김 박사의 연구는 선박설계에 실험적 방법을 적용하여 한국의 선박을 개선하기 위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같은 연구를 기반으로 그는 정부의 조선공업육성정책을 적극적으로 제안했을 뿐만 아니라, 64종의 표준형선을 설계하는 사업을 수임하여 설계기술 자립의 초석을 닦는데 크게 공헌했다. 국내 조선공학계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하게 된 그는 1960년~1970년까지 대한조선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조선산업의 인프라 구축을 위해 활발히 활동했다.
김 박사의 활동 영역은 학계에 국한되지 않았다. 한국선급협회가 세계적인 선급기관으로 성장하는데 힘을 보탰고, 정부간 해사자문기구(현 국제해사기구) 기술회의에 정부 대표로 참석하여 
조선공학 및 조선행정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국제적인 지위와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 힘썼다.

김 박사는 선박사를 개척한 역사학자이자, 대중화를 추구한 선구자이기도 했다.
그는 1957년 이후 임진왜란 시절의 거북선과 판옥선 등 우리의 옛 선박에 대한 글을 많이 남겼다. 김 박사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기본 사료를 철저히 조사해 실증적인 논문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의 논문은 국내외에서 높은 학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특히 잊혀 가던 우리나라 문화유산을 과학적으로 복원함으로써 대중적으로도 크게 주목받았다. 1980년대에 김재근은 전남 신안과 완도에서 이루어진 유물발굴 작업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수중고고학(水中考古學)이라는 새로운 학문에 접하면서 조선시대에 국한되어 있었던 선박사 연구의 시기를 삼국시대로 확장시키기도 했다.

김 박사는 1985년 서울대학교를 정년퇴임한 후 다음해부터 동 대학의 명예교수로 활동했다. 그의 후학들은 조선산업 발전에 크게 공헌한 자를 표창하기 위해 김 박사의 호를 딴 ‘우암상’을 1998년 12월에 지정하며 그를 기념했다. 퇴임한 이후에도 선박사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던 그는 1999년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김 박사를 2006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했으며, 2017년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하며 공로를 기렸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사명감과 자존심을 가져달라.” 
(과학과 기술 ‘원로와의 대담’ 중)
그는 후학들이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일해주길 바랐다. 학문을 돈벌이 방편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일침이었다. 스승도 없고,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도 없던 시절,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걸어 세계 1등 조선산업의 기틀을 세웠던 김 박사였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김 박사의 지도로 배출된 수많은 제자들은 우리나라를 조선 강국으로 발전시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마음가짐과 자세가 고스란히 후학들에게 전해진 셈이다. 조선공학계의 큰 별 김재근 박사는 그들의 마음속에 지지 않고 살아있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