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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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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씨앗 독립을 일구다 - ⑫ 故 우장춘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⑫ ‘종의 합성’으로 세계 유전육종학의 발전에 이바지한 과학자 故 우장춘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초대소장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종의 합성’으로 세계 유전육종학의 발전에 이바지한 과학자 故 우장춘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초대소장 대한민국의 씨앗 독립을 일구다. 한국 배추와 무, 강원도 감자 등 우량종자 개량해 식량난 해결 유전 육종 전문지식과 기술 보급으로 한국 농학 발전에 공헌

농작법의 발달로 계절과일의 구분이 사라지는 추세지만, 여전히 ‘수박’은 더울 때 먹어야 가장 맛있는 여름 과일이다. 수박이 주는 달달하면서도 시원한 맛은 무더운 여름마저 반갑게 느껴질 정도. 그 중에서도 ‘씨 없는 수박’은, 과육으로만 영양분이 축적돼 맛과 당도가 뛰어나다. 그렇다면 씨 없는 수박은 누가 개발했을까. 국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우장춘 박사로 알고 있지만, 이것은 우장춘 박사에 대한 오해 중 하나다. 씨없는 수박은 일본 육종학자 기하라 히토시의 개발품이고 우 박사는 농민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홍보 수단으로 재배했을 뿐이다. 실제 우 박사의 공헌은 우리나라 식량난을 해결한 농업지도자로서의 업적을 되돌아봐야 한다.

1916년 히로시마 현립 구레 중학교를 졸업한 우 박사는 도쿄제국대학 공학부 진학을 희망했지만, 홀어머니의 힘으로 학비를 감당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서류상의 국적을 이용해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의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연구자보다 기술자가 필요했던 조선총독부는 장학금을 주는 조건으로 농과대학에 진학할 것을 지시했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우 박사는 도쿄제국대학 농학실과에 입학했다.

1919년 농학실과를 졸업한 우 박사는 당시 농학자에게 최고의 직장이라고 불렸던 국립농사시험장에 입사했다. 취업으로 생활의 안정을 얻게 된 우 박사는 직장 내에서의 보이지 않는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박사 학위 논문와 유전학 연구에 열과 성을 쏟았다. 그가 처음 육종에 성공한 겹피튜니아 꽃은 대단한 성공을 거뒀는데, 당시 그의 신종 씨앗을 취급했던 사다까 종묘회사는 겹피튜니아로 화훼 시장을 독점해 높은 수익을 올렸다.

1930년, 그는 나팔꽃의 유전에 관한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완성했지만, 제출 하루 전날 농사시험장에 화재가 발생해 모든 자료가 소실됐다. 수많은 노력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어 버린 악재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고, 과제 대상을 유채꽃으로 변경해 다시 연구를 시작했다.

1936년 5월, 우 박사는 ‘종(種)의 합성’ 논문으로 마침내 동경제국대학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장춘은 양배추와 재래종 배추 씨앗을 교배해서 서양유채 식물을 만들었고, 양배추, 재래종 등 세 가지의 세포학적인 관계를 밝히는 염색체 분석에 성공했다. 이미 존재하는 유채를 인위적으로 만들고 그 과정을 유전학적으로 규명함으로써 종간 잡종과 종의 합성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종(種)의 합성’ 이론은 ‘우장춘의 트라이앵글’로 불리며, 유전학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것으로 인정받는다. 현재 전 세계 각지에서 사용하고 있는 종자 합성 기술의 기초가 우 박사의 이론에서 시작됐다. 이후 ‘종(種)의 합성’은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다윈의 진화론 중 '종(種)은 자연도태의 결과로 성립된다'는 설을 보충했다. 우 박사의 연구 결과는 현대진화론 시대를 열어주는 과학적 발견이었다.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 그는 상위 직급으로 승진하지 못했다. 만년 기수였던 우 박사는 1937년 농사시험장을 떠나 다키이 종묘회사 초대 연구농장장으로 이직했다. 그는 이곳에서 연구 이외에 다양한 분야로 활동 영역을 넓혔는데, 그중 하나가 육종학의 전파를 위한 강연 활동이었다. 다키이 회사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직원들을 상대로 농학 강의도 열었던 그는, 그들과 교류하며 자연스레 한국의 열악한 육종 실태에 관심을 갖게 됐다.

식민시대 한국의 농업 정책은 쌀과 보리와 같은 식량 생산에만 집중돼 있었다. 무, 배추와 같은 채소 육종은 일본산 종자를 수입했는데, 해방 이후부터는 종자 수입 단절로 불안한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우량 종자의 자급 생산은 국민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한국의 종자 문제를 해결할 인물로 우 박사가 거론되면서, 그의 귀국을 바라는 운동까지 시작됐다. ‘우장춘 환국추진위원회’를 통해 그의 귀국과 연구소 부지를 마련할 수 있는 자금이 모였고, 1950년 3월 8일, 그는 처음으로 조국의 땅을 밟았다. “이제껏 어머니의 나라에서 일본인 못지않게 노력해 왔습니다. 지금부터 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이 나라에 뼈를 묻겠습니다.”

1950년 5월 10일 우장춘은 한국농업과학연구소의 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제일 먼저 전국의 농촌을 직접 조사하며 현실을 상세히 파악하고, 채소원종 생산과 대량생산할 적임지를 고르는 일에 매진했다.
그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신품종 무와 배추 개발. 한국의 식생활에 맞춰 김장에 적합한 크고 아삭하며 병충해에 강한 신품종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1954년 대량생산에 성공하며 전국에 신품종 무와 배추 종자 보급이 시작됐다. 우 박사의 연구를 기점으로 한국 배추와 무는 독자적인 품질 개량을 거듭했고, 오늘날 세계 최고 수준의 육종 기술을 갖게 될 수 있었다.

무와 배추 개발 이후, 우 박사가 한국의 식량문제를 해결할 다음 단계로 주목한 것은 감자. 당시 한국의 씨감자는 바이러스 병균이 심해 수확량이 30~50%에 불과했기 때문에 일본에서 씨감자를 대량으로 수입했다. 우 박사는 강원도 대관령에 시험지와 채종포를 설치하고 무병 씨감자 생산에 착수했다. 세계 각지에서 공수한 신품종 감자와 동래의 연구소에서 만든 씨감자가 대관령 곳곳에 심어졌다. 아쉽게도 우 박사는 무병 씨감자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으나 이후 제자 최정일 박사가 연구를 이어받아 생산에 성공했다.

현재 제주도의 대표 과일인 밀감도 우장춘 박사의 작품이다. 1951년 우 박사는 제주도를 시찰했는데, 제주도는 빠른 장마와 평탄한 지형 때문에 채소 재배로는 부적합하지만, 기후가 귤재배에 안성맞춤이라고 판단했다. 우 박사는 제주에 온주밀감을 심고 과일나무를 취급하는 농민을 지원하도록 요청했다. 당장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여건이 우선이지만 식생활이 향상되면 귤 같은 비타민이 풍부한 과일이 국민의 건강증진에 기여한다는 혜안이 담긴 조치였다.

1954년 기생충 문제로 한국 먹거리에 불신이 심했던 주한 미군은 수경재배를 통한 깨끗한 채소 공급을 정부에 요구했다. 우 박사는 수원에 수경시설을 만들고 채소를 재배했는데, 청정채소는 비싼 값에도 인기가 높아 미군의 주문이 쇄도했다. 이때 도입한 수경재배 채소가 오늘날 우리 식탁에 오르는 깨끗한 채소의 시초이다.

우 박사의 ‘씨 없는 수박’은 신품종에 대한 불신을 없애기 위해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홍보활동의 일환이었다. 우 박사는 기하라 히토시 박사가 육종에 성공한 씨 없는 수박을 일본에서 들여와 보급하며 관심을 끌었다. 당시 육종의 과학적 원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기자들은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크게 부각시켰다. 우 박사가 직접 개발한 것은 아니지만, 씨 없는 수박은 우 박사의 종의 합성 이론을 규명하는 중요한 사례다.

채소와 과일에 이어 우 박사의 관심은 벼 연구로 이어졌다. 한 번 수확한 그루터기에 줄기와 잎이 다시 나와 일 년에 두 번 수확할 수 있는 ‘일식이수(一植二收)’가 목표였다. 이러한 벼 재배가 성공한다면 한국 농업은 물론 전 세계 육종학 발전에 한 획을 긋는 연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성공을 보지 못했다. 1959년 위와 십이지장궤양으로 세 차례의 수술을 받은 우 박사는 병세가 급속히 악화돼 다음날을 기약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병세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음에도, 그의 연구를 향한 열정은 여전했다. 우 박사는 제자들에게 연구하던 벼 이삭을 가져와달라고 부탁했다. 꽤 자란 벼 이삭을 잘 보이는 곳에 놓고 흐뭇하게 바라보기도 하고, 
연구 방법을 구상하듯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1959년 8월 7일 농림부 이근식 장관이 병실을 찾아 그에게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건국 이래 우 박사가 두 번째 수상자인 영예로운 포상이었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고맙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

그로부터 3일 뒤인 10일. 그는 문화포장이 장식된 병실에서 향년 61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씨앗에 헌신한 육종학자 우장춘. 그는 육종학의 암흑기에 놓여있던 조국으로 돌아와 육종학과 기술의 토대를 세우는 데 힘썼다. 또 후학들이 그 씨앗의 생명을 무한히 이어가도록 유전학의 계보를 구축해냈다. 수도사처럼 묵묵히 씨앗 연구에만 몰두했던 우장춘 박사에게 대한민국은 과학기술유공자의 명예를 헌정했다. 조국의 인정을 그토록 목말라했던 우 박사. 그의 업적은 유공자의 이름과 함께 영원히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