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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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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재료공학의 세계화를 이끌다 - ⑪ 윤덕용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⑪ 첨단 재료공학 주춧돌 놓은 1세대 재료공학자 윤덕용 KAIST 명예교수

첨단 재료공학 주춧돌 놓은 1세대 재료공학자 윤덕용 KAIST 명예교수 대한민국 재료공학의 세계화를 이끌다. 다결정 재료의 계면 이동과 입자성장의 원리 규명 
KAIST 제1호 재료공학과 전임교수로서 연구와 교육 발전에 공헌

재료공학이란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널리 응용되는 공업 재료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학문이다. 재료는 모든 산업의 기초로서 최근 급격히 발달하고 있는  
정보통신, 나노, 생명공학, 환경공학, 우주항공 기술 등 새로운 기술들 역시 첨단재료의 개발 없이는 불가능했다. 실험할 예산이 부족해 원조를 받아야만 가능했던 과거의 대한민국.  
첨단 재료의 개발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그때, 척박했던 우리나라 재료공학 연구의 기틀을 세운 학자가 있었다. 바로 윤덕용 KAIST 명예교수다.

윤덕용 박사는 1940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발발 바로 직전 월남한 그는 서울에서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미국 대학에서 교수로 자리를 잡은 부모를 따라 유학길에 올랐고,  
이공계를 전공해 사회에 기여하라는 부친의 권유에 따라 1958년 메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과학자로서의 미래를 꿈꾸며 입학한 MIT는 전 세계 수재들의 집합소와 같았고, 다소 강압적인 면학 분위기였다. 윤 박사의 말에 따르면 당시 입학생 중 첫 학기에만 200명 가량이  
낙제학점을 받아 학교를 떠났다. 그 정도로 MIT는 교육에 있어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나 윤 박사에게 MIT는 무척 재미있는 공간이었다. 과학이라는 학문에 첫발을 디딘 그가 마음껏 열정을 내뿜을 수 있는 곳이었고, 또 동시대 최고 석학들과 함께 수학할 수 있는 여건이 충족됐기 때문이다.  
“마치, 어린애가 놀이를 즐기는 것과 같이 나는 연구가 재미있어서 열심히 해왔다. 자기가 생각을 해서 자연의 원리를 작은 것이라도 발견하고 이를 응용해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재밌었다.” 
(2004년 12월, 사이언스타임즈 인터뷰 중)

이후 그는 하버드대학 대학원에 진학, 응용물리학(재료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땄다. 하버드대 대학원은 MIT와 달리 매우 창의적인 분위기를 자랑했는데, 이때 수학한 경험은 윤 박사에게 중요한 자산이 됐다.  
“하버드대는 영감이 떠오르는 분위기를 조성해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게 만들었다. 물리학과, 화학과, 응용물리학과 교수 중 20%가 노벨상 수상자이고 현재도 채용의 기준을  
노벨상 수상 내지는 수상 가능성이 높은 과학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런 교수들이 있으면 학생들은 스스로 공부를 안 할 수 없다.”

박사학위 취득 후 미국 웨인주립대 재료공학과 조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당시 창설을 준비하던 KAIST의 재료공학과 교수로 와달라는 부름을 받게 된다. KAIST의 산파 역할을 했던 정근모 총장의 호출에  
그는 15년간의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국가에 기여하기 위해 과학이라는 학문에 발을 디뎠던 약관의 초심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한국 과학 교육의 산실인 KAIST에 입성한 윤 박사는 오랫동안 외국에서 배운 학문을 고국인 우리나라에서 꽃피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는 재료공학이라는 분야 자체가 생소했던 때였다.  
그는 재료공학 분야의 연구 및 교육 기반을 다져야 한다는 중책을 안고 밑바닥부터 학문적 토대를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윤 박사가 미국에서 주로 했던 연구는 금속과 산화물 재료의 고압력 영향에 대한 기초적 연구 부분이었다. 그러나 1972년 KAIST에 부임한 이후 분말야금 분야로 연구 분야를 전환했다.  
이때부터 그는 방위산업용 텅스텐 중합금의 국산화를 위한 액상 소결 기구의 기초적 연구를 시작, 재료공학 분야에서 국내 최초로 해외 학술지에 관련 논문을 발표하는 쾌거를 달성하기도 했다.  
윤 박사는 이 논문으로 미국금속학회(AIME)와 IBM 연구소 등에서 강연을 하며, 한국 기초과학의 우수성을 널리 전파했다.

윤 박사는 재료 계면 연구에서 단연 돋보이는 연구 성과를 창출해냈다. 1980년대 미국과 유럽의 과학자들이 원자 확산이 일어날 때 입자간 계면이 움직이는 현상을 발견했는데, 
이후 이 현상은 ‘원자 확산에 의한 입계면 이동’이라는 원리로 밝혀졌다. 이 원리는 저장된 핵폐기물의 수명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데 활용되는 등 실용적인 문제에 활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윤 박사도 이 연구에 주목했다. 그러나 이전의 연구와 달리 그는 좀 더 범위를 확장해 입자 성장의 원리를 규명하는 데 몰입했다. 오랜 연구에도 불구하고 많은 과학자들이 밝혀내지 못한 원리를 규명해내기 위해서였다.

윤 박사와 연구진은 피나는 연구 끝에 온도 증가와 조성 변화에 따라 계면의 원자구조가 불규칙하게 되고, 입자 성장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원리를 실험을 통해 규명해냈다.  
그의 연구를 통해 약 70년간 재료 학계의 숙제였던 비정상 입자 성장 원리의 비밀이 세상 밖으로 드러나게 된 셈이었다. 이에 한국과 세계 과학계가 윤 박사의 연구 결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 연구는 Annual Review of Materials Science(1989)와 International Materials Review(1995)에 초청논문으로도 발표되며 이목을 끌었다.

이 뿐만 아니라 차세대 핵심기술인 나노 재료 등에서 입자 성장을 체계적으로 제어해 성능을 향상시킬 수 있게 됐다. 미국의 GE는 관련 특허를 항공기 엔진생산에 적용하고 있으며, 
대다수 산업체에서 실용화 연구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지질학과 물리학 등 다른 분야로도 파급되는 등, 세계 재료 공학 학계에서의 윤 박사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계기가 됐다.

이후 그는 고온 초전도체, Ni계 초합금, 기상에서 다이아몬드 형성에 대한 연구도 진행해 관련된 수십 편의 논문을 국제학술지에 발표하는 성과를 이뤘다. 이 연구 결과들을 미국 Gordon Conference에서 3회 발표했고  
여러 국제 학술대회와 세계 유수의 대학, 연구소에서 초청 세미나를 진행했다. 윤 박사는 이 같은 업적을 인정받아 호암상(1995)과 대학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2004)을 수상했고,  
2005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됐다. 항상 우리나라 과학의 국제화에 힘썼던 그는, 국제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만 150편 이상이 될 정도로 열정을 쏟았다

과학자로서의 소임만을 맡기엔 그의 능력은 너무 컸다. 그는 연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교육 행정 발전에도 공헌했는데, 특히 후학 양성 부분에서 그의 탁월한 능력이 발휘됐다.  
1972년 부임 이후부터 2005년 정년퇴임까지 KAIST에서만 외길 인생을 걸었던 그는, 재직 중에만 43명의 박사와 68명의 석사를 배출하는 등 후학 양성에 열과 성을 보였다. “많은 제자들이 나의 연구에 큰 도움을 주었다.  
내가 문제를 제시하면 그들은 해답을 내놓았다. 훌륭한 제자들과 함께 연구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그는 1995년부터 1998년까지 KAIST 제9대 원장을 지내며 KAIST를 세계 10위권 이공계 대학으로 육성한다는 비전을 확립하기도 했다. 현재 국내 최고의 MBA 과정 중 하나로 떠오른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과 신기술창업지원단 설립도 그의 작품이다.

과학자로의 천명(天命). 윤 박사에게 과학은 운명이었다. 사그러들지 않는 열정을 후학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열심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학생들에게도 연구와 학문은 호기심에서 시작되고  
재미있다는 것을 전하려고 노력해왔다. 연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구는 항상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 즐거움과 보람은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는 과정 그 자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