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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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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다 - ⑨ 권이혁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⑨ 예방의학과 보건학의 토대를 세운 의학자 권이혁 서울대 명예교수

예방의학과 보건학의 토대를 세운 의학자 권이혁 서울대 명예교수-한국인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다-우리나라 최초 보건대학원 설립…3,300여명의 제자 양성-한국형 인구집단 연구 통해 국민보건체계 확립

몸이 아픈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가족내력으로 태어날 때부터 건강하지 못한 경우도 있고, 생활환경이 해롭거나 개인의 생활습관이 무분별해서 병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래서 질병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예방의학’과 인간집단의 신체적 건강문제를 다루는‘보건학’은 한 쌍처럼 건강지킴이로 작용한다. - 반세기 전, 병원은 죽을 것 같이 아파야 가는 곳이고, 예방이나 보건의 개념도 생소하던 시절,  국민건강을 위해 한국형 보건학을 정립하고자 힘썼던 의학자 권이혁 박사의 삶은 우리나라 보건역사의 동맥과도 같았다.

광복 이후, 경성의학전문학교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통합되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대학이 설립됐다. 1947명 제1회 졸업생 108명을 배출했는데, 이들은 대한민국 의료계의 개척자이자 선구자로 활약했다. 
권이혁 서울대 명예교수 역시 서울대 의대 1회 학부 졸업생 중 하나다.

하지만 당시만해도 나라 전체의 모든 환경이 열악할 때였다. 권이혁 박사는 의학 공부, 특히 진로로 선택한 ‘예방의학’에 한창 재미를 느꼈지만, 그가 일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그는 졸업 후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 선배 교수의 강의가 끝난 후 흑판이나 닦는 무급 조교 시절을 보냈고, 한 선배의 권유로 자리가 비어있던 수의학 강의를 맡았지만 그마저도 한국 전쟁 발발로 계속할 수 없었다.

그는 전쟁 중 미군 민사처(Civil Assistance Office)에서 설치한 병원을 맡아 춘천과 포천 등의 진료소 운영을 담당했다. 
권 박사는 1954년, 미국대통령이 수여하는 ‘자유훈장’(Medal of Freedom)을 받았는데, 열악한 환경에서 3년 간 병원행정을 도맡아 한 공로로 미군이 추천했다. 이후 그는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해 미국 유학을 떠나 많은 경험을 한다. 권 박사는 1955년부터 1년간 미국의 선진보건 기술을 배우고, 미네소타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아 귀국했다.

권이혁 박사는 귀국 후 우리나라 최초의 보건대학원을 설립하는데 산파 역할을 한다. 유학 시절 그를 눈여겨 본 앤더슨(Gaylord W. Anderson) 미네소타대 보건대학원장은 그에게 서울대에도 보건대학원 설립을 권유했고, 한국형 보건체계 구축을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실감했던 권 박사는 미네소타대학의 자문을 받아 구조와 교육과정 등을 마련, 1959년 서울대 보건대학원을 설립했다. 여기서 지난 50년 간 배출된 인재만 석사 3,000여명, 박사 300여명이 훌쩍 넘는다.

그는 서울대에서 보건의학을 강의하며, 당시 국내에서 생소한 학문이었던 ‘보건학’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예방의학(1958, 대한위생학회)」, 「전염병관리(1962, 동명사)」,  「공중보건학(1963, 동명사)」,  「인구와 보건(1967, 동명사)」,  「보건학개론(1976, 신광출판사)」 등 다수의 저서를 냈고, 우리나라 의학교육 체제의 전면 개편을 추진하기도 했다.  197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 의학 교육 체제는 일제 식민지 시대의 교육 체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는데, 권 박사는 서울대의과대학장직을 수행하며 교과과정 개편은 물론, 학습 및 교육 원리에 대한 교육자 연수교육 체제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통합교과목을 신설해 운영하는 교과과정 개편을 단행했고, 전국 의과대학 교수들을 대상으로 연수 교육을 담당하는 ‘의학교육연수원’을 설립해 운영했다.  
권 박사가 1970년 초에 개발해 의학교육 체제는 우리나라 의학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하는 데 결정적 기반이 됐다.

권 박사는 보건학 연구에서도 많은 발전을 이끌었다. 보건학은 개인 환자의 질병 진단과 치료가 핵심적 주제인 전통적 의학에서 벗어나 건강인을 포함하는 인구집단의 건강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의학 영역이다. 
생물학적 측면의 건강, 질병뿐만 아니라 해당 지역 사회의 사회문화적 및 생활환경적 특성도  같이 다뤄야 하기 때문에 질병을 핵심 주제로 하는 의학과 달리 선진국에서 연구·개발된 내용을 그대로 우리나라에 적용할 수 없다.

권 박사는 선진국의 보건학 개념만을 도입해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1959년 발표한 ‘한국인 혈액에 관한 연구’에 대한 논문을 시작으로, ‘갑산성종의 지역별 분포(1961)’, ‘서울시내 공기오염에 관한 조사(1962)’, ‘부산지역 콜레라에 관한 역학적 연구(1964) ’ 등은 초창기 보건학 연구의 방향을 제시한 성과다. 특히 권 박사는 1960년대부터 도시인구, 영세민/저소득층 인구, 맹인, 소아인구, 노인인구, 임산부 인구 등의 특수 인구 집단을 연구대상으로 하여 그 특수성이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반영되는  
발전된 한국형 보건학을 정립했다.

그는 1962년에는 미국인구협회의 벨포(Marshal C. Balfour) 박사의 권유로, ‘도시인구 조절에 관한 연구’도 수행했다. 미국인구협회는 우리나라 인구의 자연증가율이 엄청난 것을 우려하며 아무리 양호한 경제성장률을 달성할지라도 인구증가율을 감당하기 힘드니 가족계획을 채택해야 한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이에 대한 실행 정책 대비를 위해 진행된 연구는 서울시 성동구민을 표본집단으로 수행됐다. 자궁 내 장치 삽입 등 인구조절 방법을 비롯해 중요 사회학적 특성에 관한 연구 성과를 냈고, 연구팀이 1974년 발간한 ‘Ten Years of Urban Population Studies’는 선진국의 많은 대학에서 교재로 활용되기도 했다.

권이혁 박사는 행정가로서도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1979년, 서울대병원이 신축된 직후 병원장으로 취임해 병원연구소를 설립하고 의공학과, 소아정신과, 가정의학과 등을 신설했다. 1980년에는 서울대 총장직으로 임명 받아 행정업무를 원활히 수행했으며, 1983년에는 문교부(현 교육부) 장관으로 입각하며, 보건사회부, 환경처 장관으로 이어지는 각료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문교부 장관 재임 중 제적 학생 복교조치와 해직 교수의 복직조치를 시행했고, 대학입시에 논술고사를 도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보건사회부 장관 시절에는 우리나라 국민보건체계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주요 국민보건향상 관련 기술개발과 함께 정책 개발을 선도했으며 보사행정의 과학화를 추진, 발전시켜 전 국민의 의료보장체제를 완비했다. 환경처 장관 재직 때는 환경기술연구개발 지원을 위한 예산편성을 신설해  종합환경연구단지 조성, 오염측정 장비현대화, 조사연구사업 강화 등의 국책사업을 추진했다. 또한 국제환경협약대책위원회 신설 및 KIST의 환경연구센터 등과 산·학·연 합동연구체제 구축 등 저공해기술개발을 촉진하는 인프라를 구축했다.

민간차원의 남북과학기술 교류의 물꼬를 튼 선구자적 역할도 빼놓을 수 없는 업적 중 하나다. 그는 남북한 과학기술자간 교류와 협력을 위해 1990년 4월 남북 민간과학기술교류협의회를 창립하고, 북측의 조선과학기술총연맹과 과총 간의 협의체 구성을 전제로 한 정식교류를 제의하기도 했다.  그런 그의 노력 덕분에  1991년 8월 19일 중국 길림성 연길시에서 열린 ‘1991 중국 국제과학기술학술대회’에서 남북한 과학기술인의 첫 번째 공식 만남이 이뤄질 수 있었다.

“‘질병에 대한 본질 탐구’를 위해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았고, ‘한 사람의 전문가를 키워내는 일’을 통해  보람을 느끼고 감사와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기초의학과 나의 삶’ 중에서 권이혁 박사의 아호 ‘우강(又岡)’,인생은 언덕의 연속이며, 언제나 ‘또 하나의 언덕’’을 맞이한다는 의미다. 우리나라 근현대사가 수많은 변화 속에 도전을 이겨내며 발전을 이뤘듯이 권이혁 박사도 인생에 찾아온 언덕을 피하지 않고 매번 기꺼이 오르고 넘었다.

강산이 아홉 번이나 넘게 변한 세월. 그의 이름 앞에 붙었던 여러 이력들은 어느새 돌아보고 싶은 인생 이야기가 됐다.  
30년간 한국형 보건학 정립과 국민보건체계 확립에 힘썼던, 자랑스러운 과학기술인, 권이혁 박사. 그런 그의 노고에 정부는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라는 명예를 헌정했다. 100세를 바라보는 백발의 노학자는 자신의 남은 소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제 나이가 90을 훨씬 넘은 사람 아니에요. 그저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래도 오래 살아왔으니까요. 그걸 경험으로 후진들을 돕는데 전력을 다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