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스토리 뉴스

스토리 뉴스

조선(造船)발명왕, 대한민국을 세계 1등 조선국가로 만들다 - ⑥ 민계식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⑥ 독보적 기술 개발로 조선해양 강국 확립 기여 민계식 현대학원 이사장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6 독보적 기술 개발로 조선해양 강국 확립 기여 민계식 현대학원 이사장 - 조선(造船)발명왕, 대한민국을 세계 1등 조선국가로 만들다 - 평생 논문 280편, 지식재산권 300여 건 발표 - 연구하고 발명하는 CEO로 현대중공업을 세계적 기업으로 육성

발명(發明): 세상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들어내는 창의적 활동. 5월 19일, 발명의 날은 1957년 지정된 기념일로 측우기의 발명일에서 연유했다. 세종대왕의 발명품들이 조선의 태평성대를 만든 것처럼, 창조적 활동을 통해 다시 한 번 잘살아보자는 국민의 염원이 담겨 있다. 과학기술인들 중에서도 분야별로 손꼽히는 ‘발명왕’들이 있다. 특히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최고의 수출 효자 종목이었던 조선업계에선 명실상부 최고의 발명왕으로 민계식 전 현대중공업 회장을 꼽는다.

8남매 중 막내였던 민계식 회장에게 최고의 스승은 가족들이었다. 아버지는 한글을 갓 뗀 어린 아들의 목에 세계인권선언 제1조, “Man is born equal by nature(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 문구를 적어 걸어주고 외우도록 가르쳤다. ‘만민평등’은 그가 평생 마음에 품고 실천하는 인생철학이 됐다.

그가 엔지니어의 꿈을 키울 수 있도록 동기를 제공한 것은 넷째 형. 문학을 사랑했던 형은 그에게 많은 독서숙제를 내줬는데, 다섯 살 꼬마에겐 소설보다 ‘에디슨 전기’가 더 감명 깊었고, 민 회장은 어릴 때부터 아인슈타인 같은 위대한 이론적 과학자보다 에디슨 같은 실용적 발명가를 영웅으로 삼았다.

조선해양공학자로서의 진로를 결정지은 것도 ‘책’이었다. 민 회장은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읽은 후 나라의 부국을 위해선 조선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3면이 바다인 한국이 발전하려면 바다와 관련된 일을 해야만 한다고 믿었고, 그때부터 그의 꿈은 대한민국 조선업을 세계 최고로 만들겠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이후 그의 항로는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한 번도 목표지가 바뀌진 않았다. 고민의 여지없이 ‘조선공학’을 전공으로 택했고, 미국 유학시절엔 막노동을 해서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는 와중에도 조선공학과 항공공학을 모두 공부했다. 미국의 항공모함 설계건조 전문 회사인 리톤십 시스템즈, 원자력잠수함 설계건조 전문인 제너럴 다이내믹스, 보잉사의 해양부문 등에서 일하며 엔지니어로서의 연구경험을 쌓았다.

1978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귀국한 이후에도 그는 줄곧 기업에 몸담았다. 첫 직장은 대우조선. 입사 직후, 그는 노르웨이 국영석유회사가 주관한 특수유조선건조 국제입찰에 응모, 일본의 제철 및 조선업체인 NKK(日本鋼管株式會社) 등 30여 경쟁사를 제치고 프로젝트를 따내며 이변을 연출했는데, 해당 유조선은 81년 세계 최우수 선박으로 선정되며 다시 한 번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후 그는 설계부터 영업, 연구개발, 심지어 생산분야 업무도 관여했을 만큼 다양한 역할을 하며 대우조선의 발전에 기여했다.

1990년 현대중공업으로 옮긴 후, 발명왕으로서의 민계식 회장의 기질이 만개(滿開)했다. 당시 세계 조선업계는 첨단 고부가가치 선박 개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고, 현대중공업도 ‘물량의 현대’에서 ‘기술의 현대’로 거듭나기 위해 연구개발 분야를 대폭 확대하는 중이었다. 1995년 3개 연구소를 통합해 기술개발본부를 출범했는데, 초대 본부장으로 민계식 회장(당시 부사장)을 발탁했다.

당시 현대중공업에선 여러 종류의 배가 지어질 때라 설계, 구조해석 등 일이 아주 많았다. 민계식 회장은 수많은 연구개발 과제를 풀어가는 선봉장이자 사령탑이었고, 자신이 직접 과제를 맡아 해결하는 일도 허다했다. 그때쯤부터 그는 6시가 지나면, 연구실에 홀로 틀어박혀 연구개발에 매진하며, 새벽 2~3시까지 논문을 써서 ‘최후의 퇴근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정해진 근무시간에는 맡겨진 역할에 충실했다면, 이후에는 혼자만의 깊은 사색과 연구의 시간으로 보낸 것.

2000년 8월, 순수 독자기술로 개발한 ‘힘센(HiMSEN)엔진’이 발명품 시리즈의 신호탄이었다. 사실 그는 1992년부터 선박용 중형 디젤엔진을 독자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품의서를 올렸다. 그러나 수 차례 청원해도 상사에게 ‘미친놈’ 소리만 들었고, 결국 홀로 부품을 구해가며 5년 간 취미처럼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개발을 완료한 후에도 누구 하나 사준다는 곳이 없어 직접 독일 선주를 찾아갔고, “6개월만 써보고 만족하지 못하면 당신이 원하는 걸로 바꿔준다”고 설득해서 겨우 탑재할 수 있었다. 최초 구입한 선주는 3개월 만에 대금을 모두 지급하고, 추가 주문을 넣었다.

힘센엔진은 2002년 세계시장 점유율 4%에서 2007년 74%까지 치솟으며, 외국 모델을 압도적으로 제쳤다. 또한, 2002년 산업자원부로부터 ‘대한민국 10대 신기술’로 선정됐으며, 2004년에는 ‘세계 일류상품’으로 인증 되었다. 힘센엔진은 현재도 동급 엔진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기록할 만큼 인기다.

힘센엔진은 ‘이동식발전시스템(PPS·Packaged Power Station)’이라는 독특한 발전설비에도 활용됐다. PPS는 컨테이너 안에서 힘센엔진을 주 기관으로 발전기를 구동시킬 수 있는 설비다. 어디든 이동할 수 있고 설치도 용이한 패키지 발전소인데, 민 회장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졌다.

특히 PPS는 잦은 허리케인으로 만성적 전력난을 겪어온 쿠바에 큰 인기를 끌었다. 2007년 12월, 쿠바는 총 344기의 발전설비를 현대중공업으로부터 구입해 설치했는데, 쿠바 전체 전력 생산량의 30%를 차지하는 양을 담당하고 있다. 이후 쿠바 정부는 가장 많이 통용되는 10페소 지폐의 도안에 ‘힘센엔진’을 그려 넣었다. 힘센엔진은 현재 멕시코, 엘살바도르, 도미니카공화국 등 발전시설이 취약하고 수력발전이 불가능한 개발도상국의 상시 발전용으로 쓰이고 있다.

“배에 비행기 날개를 달아볼까?” 2006년 현대중공업은 세계 최초로 ‘날개 단 선박’을 개발, 독일에 수출했다. 날개 단 선박은 프로펠러 뒤 방향타에 비행기 날개 모양의 ‘추력날개(Thrust Fin)’를 장착한 배다. 프로펠러 회전으로 인해 부가적으로 발생하는 회전류(Rotational Flow)를 항공기의 양력 원리를 응용해 추진력으로 활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비교적 간단한 장치지만, 4~6% 가량의 연료절감 효과가 있어서 대형 컨테이너선에 사용되면, 1척 당 평균 운항 수명 25년 동안 약 600억 원의 연료절감 효과를 볼 수 있다.

추력날개 역시 미국에서 우주항공학 석사학위를 받은 민계식 회장의 순수 개인 발명품이다. 1986년 추력날개에 대한 설계방법에 대해 특허신청을 해서 1993년 등록되었는데, 실용화를 위해 많은 해운회사를 찾아 다니며 판매에 나선 것도 그다. 처음 ‘날개 단 선박’을 인도한 독일 선사는 곧 6척을 추가 주문했고, 이후 여러 해운사들로부터 문의가 급증, 지금까지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민 회장은 현대중공업에서 사장과 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논문 280편, 발명특허 300여개, 기술보고서 90권 등의 학문적 성과를 올렸다. 학문연구를 업으로 삼는 대학교수들도 엄두를 못 낼 성과다. 그가 CEO로 재임하던 10년간 현대중공업은 세계일류상품 보유를 1개에서 34개까지 늘렸고, 연평균 27.4% 성장이라는 전무후무한 역사를 기록했다. 1990년대 매출액이 50억 달러 수준이었던 현대중공업은 민 전 회장의 리더십으로 2010년에만 매출액 300억 달러, 영업이익 6조7,000억 달러를 달성했다. 현대중공업을 명실공히 글로벌 1위 조선기업으로 탈바꿈 시킨 것이다.

“모두가 퇴근한 후, 그제야 ‘제 일’이 시작됩니다. 아무도 없이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연구개발을 위한 금싸라기 같은 기회죠. 문제의 실마리는 10분, 20분 고민해서 풀리지 않아요. 깊이 생각하다 보면 두 세 시간은 금방 지나가지요. 새벽 한 두 시쯤, 졸음이 찾아오면 잠도 깰 겸 옥상에 올라가요. 조용한 회사를 내려다볼 때, 그 시간이 그렇게 행복해요. 열심히 연구개발 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이 제품으로 나왔을 때, 그만큼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민계식 회장은 여러 차례에 걸친 학계의 교수 초빙을 마다하고 산업계를 지켰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은 한국 조선산업의 부흥기를 이끌었다. 정부는 한국을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데 한평생 바친 그에게 ‘과학기술유공자’의 명예를 헌정했다. 한국의 조선발명왕(造船發明王)으로 청춘들에게 희망을 전해주고 싶다는 그는, 77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며 체력을 유지한다. 미래의 세대에게 그가 꼭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희망을 지켜야 한다. 꿈과 희망을 잃는 순간,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