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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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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업의 R&D 역사를 바꾼 바이오산업의 전설

LG화학 연구소를 주도하며 팩티브를 비롯한 신약 개발에 기여
선경을 글로벌 기업으로 이끈 폴리에스터 필름 제조기술 개발
기업 연구소의 성공 모델 제시와 바이오벤처 기업가의 배출

#1.(표지) 한국 기업의 R&D 역사를 바꾼 바이오산업의 전설 故최남석 ● LG화학 연구소를 주도하며 팩티브를 비롯한 신약 개발에 기여 ● 선경을 글로벌 기업으로 이끈 폴리에스터 필름 제조기술 개발 ● 기업 연구소의 성공 모델 제시와 바이오벤처 기업가의 배출 #2. 학력 1958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 졸업 1962 미국 포트헤이스캔자스주립대학 이학석사(화학) 1970 미국 브루클린공과대학 이학박사(화학) 경력 1971~1974 미국 ALZA사 책임연구원 1974~1979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연구부장 1980~1995 럭키중앙연구소 소장 1995~1995 LG화학기술연구원 원장 1996~1999 LG화학 고문, 미국 LG BMI 소장 포상 1979 국민훈장 목련장 1993 동탑산업훈장 1997 운경상(산업기술 부문) 2006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한국공학한림원) 2010 대한민국 100대 기술과 주역(한국공학한림원) #3. “어떻게 하면 우리 연구소를 월드클래스로 만들까. 15년 동안 변하지 않는 신념 하나로 연구소를 운영했다. 비행기 운전석에는 백미러가 없다. 과거를 돌이켜 보는 일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하면 된다. 평가는 먼 훗날에 받으면 될 것이다.”(LG화학기술연구원 퇴임 고별사 중) 최남석 원장은 한국의 민간기업 연구소를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나라의 바이오산업을 이끄는 인재들을 길러내며 ’바이오 인재 사관학교 교장‘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는 등 국내 바이오산업 발전에 크게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노력했던 그의 열정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밑거름이 됐다. #4. 최남석 원장은 1934년 순천에서 3남 5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자유로운 사고와 부드러운 인품을 지닌 아버지 최기철 박사의 영향을 많이 받고 성장했는데, 한 인터뷰를 통해 “아버지와의 모든 대화가 미래지향적인 사고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다”며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아버지라고 말할 정도로 아버지는 내 삶의 정체성의 뿌리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5. 어류학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과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그가 과학에 단순 흥미를 넘어선 애착을 갖게 된 건 서울사대부중·고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청계천이 있었는데, 당시 청계천 뒷골목에는 영세한 전자 상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곳은 최 원장에게 과학 실험실이자 놀이터였다. 전자공학도를 꿈꿨지만, 현실은 다른 꿈을 권유했다. 갑자기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팍팍한 피난 생활을 겪게 된 그는 응용과학을 공부해 엔지니어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종전 후 1954년 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에 진학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6. 그러나 막상 들어간 서울대는 그에게 큰 자극을 주지 못했다. 화공과 자체도 목적의식이 정립되지 않았다고 느꼈지만, 그 스스로가 미래의 방향성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뜻이 맞는 친구들과의 스터디그룹 결성은 전환점이 됐다. 함께 공부하며 고분자화학의 매력에 빠진 그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 고분자화학으로 유명한 브루클린공대(Polytechnic Institute of Brooklyn)에 진학해 1970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7.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은 참 바빴다. 브루클린 공대는 작은 학교였지만 고분자화학의 창시자였던 허만 마크 교수 등 관련 분야의 대가들이 모여있어 최고로 손꼽히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는 그는 훗날 한 인터뷰에서 “아침 10시에 나가서 실험하다가 집에 와서 저녁 먹고 다시 돌아가서 새벽 1~2시까지 매달리곤 했다”고 회상했다. #8. 허만 마크 교수의 실험실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활동한 그의 앞날은 이미 탄탄대로였다. 고분자화학의 최전선에서 교육 및 연구 경험을 쌓은 그가 갈 곳은 많았다. 그러나 그는 대학도, 대기업도 아닌 조그마한 벤처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안정적인 자리보다 모험을 택한 결정이었다. 그가 몸담았던 벤처기업은 알자(ALza)로, 약물 전달이라는 신생 분야를 개척하는 곳이었다. 최 원장은 이곳에서 약물 전달 효과를 높일 수 있는 고분자 화합물을 설계, 물에 닿는 순간 분해되는 고분자 피막재료를 최초로 합성해내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는 새롭고 유용한 화합물로서 약물 전달체계의 진전에 크게 기여했다. #9. 최 원장은 1974년 귀국했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15년의 미국 생활을 뒤로 하고 귀국한 그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이하 KIST) 화학공학연구부 생물고분자연구실장으로 부임해 본격적인 연구 활동에 나섰다. KIST에서 그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그중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성과는 주식회사 선경(현 SK)의 위탁을 받아 진행한 국산 폴리에스터 필름 개발이었다. 당시 폴리에스터 필름 제조기술은 미국과 영국, 일본 등 선진 5개국이 독점하고 있었다. 선경과 삼성이 비디오테이프 생산을 위해 필름 만드는 기술을 도입하려고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10. 자진해서 연구개발의 책임을 맡은 그는 팀원들과 함께 필름의 화학적 중합 과정에서 문제가 된 어안효과(fish eye effect)를 1년 만에 해결하고 국산 필름 개발을 성공시켰다. 각종 오디오와 비디오 테이프의 기초 소재인 폴리에스터 필름 개발로 선경은 매년 수천억 원대의 수입 대체효과와 수출 실적을 거둘 수 있었다. 최종현 회장은 팀의 노고를 인정하며 KIST에 10억 원이라는 거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100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KIST 사상 최대의 기부였다. #11. 1970년대 후반은 정부 주도형 기술개발 시대에서 기업 주도형 기술혁신 시대로의 변화가 막 시작되던 시기였다. 최 원장은 1980년 KIST를 떠나 럭키중앙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그 역시 향후 벌어질 신산업혁명을 민간 연구소 중심으로 이끌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마침 ㈜럭키(현 LG화학)는 민간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대덕연구단지에 중앙연구소를 세우고 대내외적으로 의욕적인 출범을 알린 상황이었다. 과감하게 럭키중앙연구소로의 이직을 결심한 그는 부임한 이듬해부터 연구소장직을 맡으며 럭키중앙연구소를 국내 제1의 산업기술연구소로 발전시키는 데 앞장섰다. #12.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연구환경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일이었다. 그는 연구 활동은 최소 10년 앞을 내다보고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선 연구원들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연구환경을 개방적이고 자율적으로 바꿔나갈 필요가 있었다. 실적에 연연하지 않고 연구에만 신경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생각해 ’방패막이‘ 역할을 자처했고, 그 결과 연구원들은 최남석이라는 든든한 뒷배 덕에 당장 돈을 벌지 못해도 당당하게 자신의 연구를 해나갈 수 있었다. #13. 당시 연구원으로 재직했던 그의 후배들은 훗날 인터뷰를 통해 “하고 싶은 것은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최 소장님 덕분”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 같은 연구 문화는 국내 바이오벤처 업계로도 이어져 10년 이상을 내다보고 연구개발에 매진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데 영향을 미쳤다. #14. 그는 고급 두뇌 유치와 첨단분야의 연구개발에 역점을 두고 연구소를 운영했다. 중점 분야는 유전공학이었다. 당시만 해도 유전공학은 ‘머리’만 있으면 선진국과 경쟁해 볼 수 있는 분야였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인력과 인프라가 전무한 상황이었다. 유전공학을 포함한 바이오산업이 미래 먹거리가 될 거라고 확신했던 그는 거리낌 없이 불가능에 도전했고,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균주와 효소를 개발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 모든 일들을 맡아 추진한 유전공학연구부(현 LG화학 생명과학연구소)는 국내 최고 수준의 투자를 바탕으로 해외 유수 제약기업들과의 전략적 제휴를 지속함으로써 글로벌 수준의 전문 의약품 연구개발 조직으로 성장해 나갔다. #15. 계속되는 호재에 연구원들은 신명나게 일했다. 1989년에는 세계 최초로 유전공학적 암 치료제인 ‘감마 인터페론’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 치료제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허가를 받은 한국 최초의 국제 공인 의약품이 됐다. 이밖에도 성장호르몬, B형 간염 백신, 적혈구 조혈인자, 합성신약으로 퀴놀론계 항생제, 항응혈제, AIDS 치료제, C형 간염 치료제 등을 개발하며 럭키중앙연구소가 ‘월드클래스’ 연구소임을 입증해냈다. #16. “‘캔 두 스피릿’으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이 모든 것들은 나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그 정신을 공유한 동료, 선후배들과 ‘더불어 함께’ 만들어 낸 것이다.” 최 원장은 15년간 최장기 민간 연구소장 기록을 세웠다. 그가 이끈 연구원은 우수 신기술 성과에 수여하는 ‘IR52 장영실상’을 10회 수상했고, 성장호르몬은 1조 원대의 매출을 기록했다. 대한민국 바이오 산업이라는 아름드리 나무는 그가 심은 씨앗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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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G화학 연구소를 주도하며 팩티브를 비롯한 신약 개발에 기여 선경을 글로벌 기업으로 이끈 폴리에스터 필름 제조기술 개발 기업 연구소의 성공 모델 제시와 바이오벤처 기업가의 배출

  • 국가의 미래를 설계한 과학기술행정가 국가의 미래를 설계한 과학기술행정가

    의약품·농약 성분 국산화와 정밀화학 산업 기반 구축 물질특허 시대를 대비한 신물질 창출 연구체제 확립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설립 등 과학기술 진흥정책 주도

  • 세포 신호전달 연구의 세계적 선구자 세포 신호전달 연구의 세계적 선구자

    포스포라이페이스 C(PLC) 아이소자임 발견 등 세포 신호전달 연구의 기틀을 마련 퍼옥시레독신(Prx) 항산화효소 발견 등 산화환원 생물학 분야를 개척 이화여대, 연세대, 기초과학연구원 등 한국 생명과학 기반 강화에 기여

  • 한국 국방연구개발의 기틀을 닦은 연구관리자 한국 국방연구개발의 기틀을 닦은 연구관리자

    번개사업의 성공적 완수로 기본 병기 국산화 달성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 백곰 개발 사업 주도 국내 최초의 품질보증제도 구축으로 공업기술의 표준화 및 규격화 기여

  • 대한민국 현대통계학의 선구자 대한민국 현대통계학의 선구자

    회귀분석, 실험계획법, 통계적 품질관리 도입과 학문적 체계화 통계적 공정관리 패키지 개발 등 산업체 품질관리 확산 지원 과학기술정책 자문과 기고 활동을 통한 과학기술 진흥 도모

  • 세계 일류의 공업한국을 꿈꾼 불소화학의 세계적인 권위자 세계 일류의 공업한국을 꿈꾼 불소화학의 세계적인 권위자

    기적의 유기화합물로 불린 프레온과 테플론 공동개발 유기화학의 반응을 설명하는 ‘박의 카바니온 이론’ 수립 국산 프레온 ‘코프론-12’ 개발을 위해 기술 노하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