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과학기술 거버넌스의 초석을 마련하다
한국 현대 과학기술계의 살아있는 역사
한국과학원, 고등과학원, 한국과학기술한림원 등 설립의 산파 역할
국가 차원의 과학기술 개발전략 설립 및 실행을 주도한 과학기술정책가
(본 인터뷰는 지난 2020년 한림원의 창 여름호에 실린 정근모 유공자와의 인터뷰 내용을 각색한 것입니다)
굵직한 업적을 많이 쌓으셨습니다. 수많은 업적 중 스스로 가장 보람을 느낀 일은 무엇인가요?
KAIST 설립은 제가 자랑스러워하는 성과이자 일생의 보람입니다. 또 KAIST가 처음 예상한 것 보다 훨씬 잘해준 것 같아서 많이 만족스럽습니다. KAIST를 통해 한국의 많은 석·박사가 배출됐습니다. 그들이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일조했고요. 과학기술 입국을 이룬 진정한 주인공들이죠. 그 힘은 오랜 과학기술 교육과 연구에서 나온 겁니다. 과학기술 두뇌를 해외에 뺏기지 않으려고 세운 KAIST가 세계에서 그 위상을 인정받고 있어요. 한반도를 넘어 우리나라 과학기술이 진출하면 젊은 과학자들은 전 세계를 품고 마음껏 연구하고 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KAIST 설립 당시에는 반대도 있었지요?
미국 뉴욕공과대학의 부교수로 있을 당시, 제 모교인 미시간주립대 총장으로 있다가 국무성의 국제개발처 책임자로 임명된 존 해너(John Hannah) 박사가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한 원조정책에 대해 제게 아이디어를 물어왔습니다. 저는 한국 내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을 이수할 수 있는 국제 수준의 대학원이 필요하다는 말을 전했고, 해너 박사가 사업제안서를 들고 오라고 했죠. 밤새 쓴 보고서를 전달했더니 흡족한 표정을 지으시곤 곧 한국에 선물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그게 뭘 의미하는지 잘 몰랐지만 그 보고서가 우리나라 대통령에게 보고됐고, 1970년 3월 24일 귀국해서 브리핑을 하게 됐습니다. 당시 엄청난 반대도 있었지만 과학기술로 경제를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에 공감했던 사람들도 많았죠. 과학기술 자립을 위한 의지와 지혜, 국회의 입법 등이 맞아 떨어져서 KAIST가 설립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원자력 연구 발전에 대해서도 원 장님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시기상조라고 여겼던 한국형 표준형 원자로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셨습니다.
1982년 초, 청와대 경제수석을 맡고 있던 김재익 박사가 미국에 있던 저에게 간곡한 전화를 해왔습니다. 원자력연구소가 한국원자력기술주식회사(KNE)를 세웠는데 경영이 어려우니 도와달라고요. 저는 과학기술 정책수단 연구 때 발표한 연구기관과 기술회사가 함께 발전해야 한 나라의 과학기술이 실질적인 국가 발전을 이끌 수 있다는 주장을 상기하면서 원전 건설을 이끄는 한전이 KNE에 투자해 원자력 기술자립을 지원하는 장기 전략이 필요하다고 조언했습니다. 결국은 귀국해서 그 일을 맡게 됐는데 많은 사람들이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던 원전 기술자립과 설계 표준화를 추진했지요. 선진국에서의 기술 습득은 쉽지 않았고 그때까지 우리는 낮은 수준의 기술만을 갖고 있었어요. 기술종속의 어두운 시대에 울분에 차 있는 과학기술자들을 보니 직접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저는 우리 손으로 원전을 설계하고 건설해 운용하는 기술을 터득하지 않으면 에너지 자립과 안전기술 확보는 힘들다고 강조했어요. 다행스럽게도 참여한 과학기술자들이 공감했던 것 같아요. 힘든 과정이 계속됐음에도 불구하고 이겨내 우리 손으로 한국형 원자로를 설계하게 됐으니까요. 국제 입찰을 붙여 미국 컴버스천 엔지니어링(CE)사가 개발한 원전 기술을 도입했지만, 규모가 달랐기에 새로 개발하는 것처럼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CE사의 사장은 미국 에너지성 차관 출신의 Shelby Brewer 박사였고 기술담당 부사장은 미국 원자력학회에서 같이 일했던 Frank Bevilacqua 박사인데 한국의 원자력기술 자립과 표준원자력발전소 설계, 건설에 아낌없는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결국 우리 기술진은 주요 부품을 표준화하고 개량시켜서 기존 미국의 원전보다 안전성이 향상된 한국 표준형 원전 개발에 성공했고, 이 기술을 기반으로 아랍에미리트 수출의 기적이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수출이 결정됐을 때 무척 경이롭고 감격스러웠어요. 한국이 전 세계 원전 기술을 이끄는 선진국가로 발돋움했다는 증거니까요.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과기처 장관을 두 차례나 역임하셨습니다. 과기인이 행정가로서 일할 때 어떠한 철학과 자세가 필요할까요?
장관의 임기는 대체로 짧습니다. 1년 6개월 안팎이지요. 1994년 두 번째 임기 때는 김영삼 대통령과 단독면담을 많이 하며 새로운 것을 많이 제안했는데, 감사하게도 대부분 들어주셨습니다. 우수연구센터(SRC, ERC)도 그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오히려 과기처 과장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짧은 임기 동안 반드시 해야겠다는 주요 사업을 이루기 위해 행사 초청이나 축사는 고사하고 일만 했지요. 기초과학분야 이론 연구를 위한 고등과학원, 최첨단 실험을 위한 국가핵융합연구소, 항공우주연구 종합사업 및 국제협력 강화를 위한 한·미과학기술협력센터 등이 그것입니다. 지금은 모두 우리나라의 자랑거리입니다.
미국에서 한국인 최초로 핵융합연구를 시작하셨고, 세계 최첨단 플라즈마 발생 장치 개발에 참여하시기도 했는데 연구자로서의 성공 기회 대신 귀국을 택하셨습니다.
사실 미국 유학 초기에는 제 공부가 우선이었어요. 프린스턴대학교 핵융합연구소에 들어간 이유도 당시 그 연구소가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연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1964년부터 2년간 연구를 했는데,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핵융합 연구를 하게 된 셈이 됐습니다. KAIST 설립 이후에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서 독창적인 연구업적을 쌓을 수 있는 연구에 도전하려고 했지요. 하지만 그 때 학생시절부터 존경하고 있었던 김법린 초대 원자력원장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김법린 원장님은 제가 미국 유학을 떠날 때 미국이 어떻게 과학기술을 일으켜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는지 알아내 대한민국 국민이 잘사는 데 기여하라고, 저에게 하나의 밀알이 되라고 하셨죠. 김 원장님은 한 나라의 과학기술 능력이 세계 선두에 서려면 3세대가 지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기초 기반을 닦는 1세대와 세계 수준급의 연구 활동을 전개해야 하는 2세대, 그리고 새로운 과학기술 세계를 개척해나가는 3세대가 잘 연계되어 발전해야 한 나라의 과학기술이 선진국 수준이 된다는 말씀이었죠. 저는 미국의 3세대 대신에 한국의 1세대로서 한국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작은 밀알이 되기로 결심했고, 기꺼이 귀국해 일했습니다. 힘들었지만 보람으로 가득찬 일들이었습니다.
미래 한국 과학기술계를 이끌어갈 젊은이 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과학기술의 가치를 이해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미래를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들이 앞장서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 한국의 희망적 메시지 를 전달하길 바랍니다. 큰 뜻을 가슴에 품고, 꿈을 펼쳐나가길 바랍니다. 대한민국은 과학기술로 일어선 나라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과학기술의 불씨를 새롭게 되살려야 경제가 살고, 그래야 나라에 활기가 생깁니다. 젊은 과학자들이 그 주인공이 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과감히 그 일에 열중해 보세요. 흉내내는 연구보다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나가는 과감한 도전자가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유공자 지정에 대한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초일류 국가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과학기술을 국가의 원동력으로 사람 중심의 두뇌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고 새로운 가치 창출에 나선다면, 그리고 인류 공동체를 위한 꿈을 꾼다면 가능합니다.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합니다. 실천하면 됩니다. 과학기술경제라는 키워드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과학기술경제에는 지평선이 없어요. 무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것을 빼앗을 필요가 없어요. 기술혁신을 통해 새로운 경제를 일으켜서 우리도 잘 살고, 이웃도 잘 살게 만들면 초일류 국가 대한민국으로 갈 수 있습니다. 저 역시 꿈을 잊지 않고 할 수 있는 역할을 다하겠습니다.